178화 신비로운 사내
용수는 말도 하지 않고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야홍릉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사람 몇 명이 밥을 먹고 있었다.
손님이 온 것을 보고 그들은 무심결에 시선을 돌렸다가 둘의 외모에 깜짝 놀랐다.
그들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들을 보고 희롱을 하려고 생각을 했다가 갑작스럽게 느껴진 압박감에 입을 다물었다.
주인은 그 사람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용수와 야홍릉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조용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졌다. 이곳의 풍경은 객잔 같지 않고 귀공자가 묵는 뜰 같았다.
야홍릉은 짐작이 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용수와 함께 돌이 깔린 정원의 길을 지나 맞은편 누각으로 걸어갔다.
공기 중에는 계화꽃의 향긋한 냄새가 담겨 있었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정원은 풍경이 아름다워 묵기 딱 좋았다.
누각으로 들어가자 정원에 숨어 있던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청의가 주인 나리를 뵙습니다.”
그의 뒤에는 흑의 옷을 입은 고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모두 주인에게 절을 올리는 자세였다.
용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일어나거라.”
그는 상석으로 걸어가 야홍릉에게 말했다.
“애비, 앉으십시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옆으로 가서 섰다. 용수가 말했다.
“반 시진 뒤에 점심 식사를 내오너라.”
“네, 알겠습니다.”
“애비.”
용수가 야홍릉의 옆에 앉으며 소개를 시작했다.
“이자는 사청의라 하고, 청의루(靑衣樓)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강호의 정보와 마장 운영을 맡고 있지요.”
“마장?”
야홍릉이 시선을 들며 말했다.
그러자 용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낭주의 두 면은 산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산 아래에는 비옥한 초원이 펼쳐져 있지요. 그곳에서 남성국 최고 우량마를 사육하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 애비를 모시고 가 보겠습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청의는 시선을 들고 야홍릉을 보더니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청의.”
용수가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분은 내 아내이자 남성국 봉왕의 유일한 안주인이시다. 지금은 동제 평양 공주의 신분을 사용하고 있지만 진짜 신분은 목국의 호국 공주 야홍릉이지. 네가 두 번째로 충성을 다해야 할 사람이다.”
이 말에 사청의와 야홍릉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청의는 용수가 이토록 정중하게 소개한 것을 듣고 이 여인이 용수의 중요한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청의루와 마장의 세력을 그녀에게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충성’이라는 두 글자를 언급하는 것을 보니 용수가 그녀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여인이 소문난 목국의 호국 공주라는 말인가?’
야홍릉이 놀란 이유는 용수가 그녀의 진짜 신분을 얘기했기 때문이었다.
남성국에서는 헌원 황제와 대제사 묵백을 제외하고 이 자가 유일하게 그녀의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용수가 사청의의 능력과 충성심을 얼마나 신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사청의는 시선을 내리깐 뒤, 다시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사청의가 여주인을 뵙습니다.”
그의 뒤에 있던 고수들도 무릎을 꿇으며 예를 올렸다.
“여주인을 뵙습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일어나거라.”
사청의는 야홍릉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그녀의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다. 만약 용수가 오늘 데려온 여인이 야홍릉이 아닌 다른 여인이었다면 그는 흔쾌히 큰절을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공주라도 사청의의 큰절을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용수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여인이 목국의 야홍릉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여인들도 가능하기는 했다.
내조를 잘하고 재능도 있으며 가문도 뛰어난 여인들도 있지만 그들은 그저 남자의 그림자로 남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야홍릉은 다른 여인들과 달랐다.
“애비와 이곳에서 하룻밤 묵고 가겠다. 오후에 누구도 와서 방해하지 못하게 하거라. 먼저 가서 업무를 정리하거라. 이따 저녁에 네 서재로 찾아가겠다.”
용수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사청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사람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누각 안에는 야홍릉과 용수 둘밖에 남지 않았다.
야홍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청의라는 사람, 평범하지 않은 것 같구나.”
용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는 능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용수는 탁자에서 찻주전자를 들고 야홍릉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사청의의 출신과 경력은 좀 특별합니다. 당분간은 비밀에 부칠 생각입니다. 나중에 천천히 말씀드리지요. 그러나 그의 충성심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야홍릉도 사청의의 충성심을 의심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이 사람이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다른 부하들과 달리 점잖고 조용한 것 같기도 하고 세상과 동떨어져서 사는 고수 같기도 했다.
그러나 온몸에서 풍기는 서생 느낌도 그의 도도함과 차가움을 가리지 못했다.
이때, 두 시녀가 물 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그들은 공손하게 둘이 씻는 것을 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시녀들이 풍성한 음식을 내왔다. 시녀들은 열다섯에서 스무 살 된 소녀로 청순하게 생겼다. 그러나 걸음을 걸을 때, 소리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공을 수련한 사람들이었다.
‘오동 마을의 청의루에는 거물들이 숨어 있군.’
야홍릉은 생각에 잠겼다.
용수가 남성국을 떠났다가 돌아온 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가 기억을 잃었을 때는 사청의와 연락을 취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십 년 전에 이미…….’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용수는 야홍릉의 목욕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야홍릉을 안고서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용수는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야홍릉은 피곤한 느낌이 없었으나 따뜻한 물에서 목욕을 하고 용수에게서 안마를 받자 온몸의 힘이 풀리며 졸음이 쏟아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용수가 옆을 지키고 있으니 그녀의 경계심이 점점 약해졌다.
“애비.”
나지막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야홍릉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순간 눈에 입술이 가볍게 촉 하고 닿는 느낌이 들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야홍릉은 몸을 살짝 떨었다.
준수한 청년이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눈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떴지만 그의 입술 때문에 시야가 가려졌다. 남자의 말쑥한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담겨 있었으나 그의 뜨거운 숨결에 야홍릉은 볼, 귀, 목까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야홍릉은 시도 때도 없는 용수의 애정행각에 익숙해져 있은지라 그가 장난을 치려고 이러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평소와 다르게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그녀는 눈을 뜨고 담담하게 물었다.
“용수, 지금 뭐 하는 것이냐?”
청년은 행동을 멈추고 당황한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인님, 저는 지금 잠자리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잠자리 시중?’
야홍릉은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침의가 활짝 열린 채, 벌어져 피부가 드러난 것이 보였다. 피부 곳곳에는 용수가 남긴 빨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점심을 배불리 먹지 못한 것이냐?”
용수는 눈을 깜박이다가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왜 날 물고 빠는 것이냐?”
“주인님이 탐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습니다.”
용수는 씩 웃으며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말을 마친 그는 또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야홍릉은 그를 밀치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게 이유냐?”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럼 또 거짓말을 한 것이냐?”
용수는 침묵을 지키다 고분고분하게 말했다.
“송구합니다.”
야홍릉은 할 말을 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조용해지자 야홍릉은 다시 눈을 감았다.
“날 먹지 말거라.”
용수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비, 주무십시오. 더 이상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야홍릉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더 이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용수는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저녁 무렵, 야홍릉은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그녀는 녹을 듯이 달콤한 눈빛과 마주치게 되었다.
순간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했다.
“이 시끄러운 소리는 무엇이냐?”
용수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곳에서는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 앉았다.
“사청의에게 볼일이 있다면서? 날 신경 쓰지 말고 가 보거라.”
“괜찮습니다. 그도 지금 바쁩니다. 그가 바깥의 일을 다 해결하면 다시 얘기하지요.”
‘바깥의 일을 다 해결하면?’
야홍릉은 말없이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다고?’
“밖에 나가 보시고 싶은 겁니까?”
용수는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나가고 싶으시다면 구경하러 나가시죠.”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깥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둘은 옷을 입고 외모를 정돈한 다음 누각 밖으로 나갔다.
향긋한 냄새가 풍기는 정원을 지나자 둘은 뒷문으로 위층에 올라갔다.
2층에 도착해서 난간 앞에 서자 1층의 광경이 훤히 보였다.
오전에 도착했을 때는 1층에 사람이 몇 명 있었지만 지금은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탁자와 의자가 엎어진 채,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객잔 밖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는데 하나같이 몸집이 건장한 것이 한눈에 고수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강호 사람들이 자주 입는 짧은 저고리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분위기는 강호 사람들과 많이 달랐다.
야홍릉은 그들을 힐끗 보고 내정 고수일 거라고 짐작했다.
사청의는 계산대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주판을 움직였다.
계산대 맞은편에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옅은 파란색 비단 장포를 입은 남자가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측근 고수가 몇 명 있었는데 한눈에도 만만하지 않은 상대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 사장.”
비단 장포를 입은 남자가 언짢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방금 전 얘기한 거래 조건이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소.”
“맘에 들지 않소.”
비단 장포 남자는 그 말에 실눈을 뜨며 말했다.
“이건 내 체면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