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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77)화 (178/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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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앞으로 잘해줄게

물론, 이런 관념은 야홍릉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녀는 한 번도 누구에게 빌붙어 살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전생에 한옥금을 좋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여인의 매력을 느끼지는 못하는 듯했다.

한옥금도 결국에는 그랬다.

그도 녀의 앞에서 신분 차이를 실감하게 할 언행을 내비치지 않을 정도로 총명했지만 결국 그는 야자릉처럼 연약하고 애교가 많은 여인을 좋아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야홍릉처럼 차갑고 딱딱한 여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야홍릉은 지금 한옥금에게 별 감정이 없었다.

그저 한옥금을 떠올릴 때면 전생에 헌원용수가 그녀를 위해 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한옥금의 배신으로 그녀는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걸고 다시는 진심을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나타나더니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어버렸다.

기나긴 꿈을 꾼 그녀는 세상에 진심이 없는 게 아니라 눈먼 그녀가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용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앞으로 잘해주마.”

용수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옅게 웃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네, 주인님. 꼭 약속을 지키셔야 합니다.”

둘은 산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용수는 야홍릉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결정하신 것입니까? 물리지는 않으시겠죠?”

“내가 물렸으면 좋겠느냐?”

“아니요.”

“그렇다면 그 입 좀 다물거라.”

용수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요즘 기분이 좋은가 보구나?”

‘자꾸만 웃는 게 기분 좋은 일이 많나?’

“주인님과 함께하는 매일매일이 다 즐겁습니다.”

용수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즐거우니 자꾸만 웃음이 나옵니다.”

그는 그녀와 함께 있을 때에만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영광을 누릴 수 없었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웃음기 짙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용수의 우아한 용모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난 아주 재미없는 사람이다. 앞으로 내가 싫어지면 미리 말을 하거라. 만약 나 몰래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다면…….”

이때, 풉 하고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홍릉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왜 또 웃는 것이냐?”

“아닙니다.”

용수는 고개를 저었지만 입꼬리는 한껏 위로 쳐들린 상태였다.

“제가 몰래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다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고자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용수는 눈을 깜박이더니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늑대처럼 야홍릉을 와락 덮치고 그녀를 단단한 팔 안에 가두었다.

그는 자연스레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이곳은 산을 오르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이었으나 깊은 산도 아니었고 밀림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 맹수가 올 일도 없었다.

용수는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은 채, 행복에 잠겨 있었다.

‘애비가 너무 귀엽잖아. 세상에 이런 보물이 또 어디 있겠어? 어떻게 애비가 재미없을 수 있지? 애비가 싫어질 리가 없잖아?’

그는 수많은 노력을 들여서 그녀의 마음을 녹였다.

그녀는 드디어 그와 혼인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 한마디만으로 그는 매일같이 행복에 빠질 수 있었다. 예전에 겪었던 모든 고생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졌다.

그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싫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야홍릉이 싫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전생에 이번 생까지 더하자 그녀는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각인이자 없앨 수 없는 집념이 되었다.

“주인님께서 허락하셨으니 남성국과 동제의 통혼 소식을 세상에 알려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입술에서 입을 뗀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알아서 해라.”

야홍릉은 손으로 그를 밀치고 나무에 기대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앞으로는 내 허락 없이 이렇게 제멋대로 날 덮치지 말거라.”

방금도 그녀의 입술을 훔친 그가 순순히 대답했다.

“네.”

야홍릉은 그를 흘겨보고 나서 일어나 아래쪽으로 걸어갔다.

“그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용수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대답했다.

“영린의 계획대로 그가 직접 정무를 본 다음에 가장 먼저 할 일은 제국을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동제와 남제는 언젠가 전쟁을 치를 것이지요. 이 소식은 아직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남성국과 동제가 통혼한다는 소식이 퍼진다면 세상이 떠들썩해질 것이고 가장 먼저 움직이는 것은 남제의 황실이 될 것입니다.”

야홍릉도 상상할 수 있었다. 세상의 싸움에서 빠져 있던 강한 남성국은 수백 년 동안 그 어떤 나라와도 통혼을 한 적이 없었다.

만약 이 소식이 퍼진다면, 통혼 상대가 어느 나라든, 각 나라의 제왕들은 당황하고 두려움에 떨 것이다.

남제는 최근 국력이 점점 약해져서 동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남성국의 태자 헌원용수는 남제 출신의 황자였다. 만약 남성국과 동제가 통혼한다는 소식이 남제로 퍼지면 남제의 황제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것이다.

따라온 시위들은 모두 산 아래에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숙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용수와 야홍릉이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갈 때는 너무 빨리 갈 필요가 없다. 길거리의 풍경도 구경하고 싶으니 천천히 가자꾸나.”

야홍릉은 말 앞으로 걸어가 말 등으로 올라탔다. 그리고 용수를 돌아보더니 물었다.

“겨루어 보지 않겠느냐?”

용수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영광입니다.”

말을 마친 그도 훌쩍 올라탔다.

말의 배를 차고 고삐를 당기자 둘은 거의 동시에 앞으로 내달렸다.

시위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검은빛과 갈색빛이 앞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두 상전은 나는 듯한 속도로 말과 함께 내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멍하니 서 있다 정신을 차리고 말을 몰아 둘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반 시진 정도 내달린 뒤, 그들은 멀지 않은 곳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애비의 기마술은 일품입니다.”

한 보 늦게 도착한 용수가 진심으로 찬사를 보냈다.

그는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따라가기 힘들었습니다.”

야홍릉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다른 일을 하고 싶다면 대내총관의 자리 정도는 남겨 줄 수 있지.”

용수는 아부를 천연덕스럽게 잘 떨었기에 궁에서 대내총관의 자리에 딱이었다.

용수는 기분 좋은 얼굴로 웃었다. 그의 눈매에는 지울 수 없는 웃음기가 넘실거렸다.

“제가 대내총관이 되면 애비는 어떡할 것입니까? 평생 독수공방하실 것입니까?”

“나는 후궁도 많이 둘 텐데. 매일 밤 미소년 한 명씩 불러들일 거니 넌 옆에서 보고 있거라.”

야홍릉은 담담한 어조로 말하며 말고삐를 잡은 채, 천천히 걸었다.

용수가 말했다.

“그럼 해마다 후궁을 많이 들이셔야 할 것입니다.”

“왜?”

“그들에게는 기회가 한 번밖에 없을 테니 말입니다. 애비와 함께 잠자리에 드는 동시에 죽을 거니까요.”

용수가 대답했다.

그 미소년들은 이튿날 아침까지 살아있기는커녕 그날 밤도 지새우지 못할 것이다.

“괜찮다.”

야홍릉이 말했다.

“세상에 미소년은 많으니 말이야. 난 그저 풍류를 즐기고 무정한 여 황제만 되면 되지. 그들이 언제까지 살지는 그들에게 달렸고 말이야.”

그녀는 원래도 이렇게 무정한 사람이었다. 궁에 들어온 이상 생존 능력이 없는 사람은 일찍 죽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용수는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미소년들이 불쌍해서 그러냐?”

“아니요.”

용수는 고개를 젓고 담담하게 말했다.

“전 애비가 살인마가 되는 게 싫습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난 사람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가 질투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면 그게 애비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살인마는 저일지라도 기록은 애비에게 나쁘게 작성될 것이고 후대의 욕설도 애비가 들을 것입니다. 원래 그 자리는 그런 곳입니다. 그게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애비가 저만 총애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도 없을 것이 아닙니까?”

“네가 말을 이렇게 잘했던가? 예전에는 분명 과묵하고 고분고분했던 것 같은데.”

야홍릉이 미간을 찌푸렸다.

용수는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주인님은 과묵하고 고분고분했던 제가 더 좋으십니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과묵한 게 좋다는 게 아니라…….’

과묵한 능묵은 어딘가 안쓰러웠고 말을 잘하는 용수는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분명 같은 사람이지만 기억을 되찾은 뒤로 용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야홍릉에게는 모두 같은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진짜로 좋아하게 되고 그 사람의 존재를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의 모든 모습도 좋게 보이는 법이다.

물론 그녀는 이 말을 그에게 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가 기쁜 나머지 들뜰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마을에 가까워지자 오가는 행인들도 점점 많이 보였다. 둘에게서 한참 뒤떨어졌던 시위들도 쫓아왔다. 곤륜산으로 갈 때는 관도(官道)로 가서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돌아갈 때는 남성국 백성들의 삶도 보고 싶어서 다른 길을 선택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오동(梧桐)이었다. 마을이 크지는 않았지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다 있었다.

“이쪽은 남쪽이라 사람들이 적습니다. 그러나 농민이나 상인들이 모이는 곳이지요.”

용수는 길을 가며 야홍릉에게 이곳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오동의 서쪽은 낭주(瑯州)입니다. 내일 아침 애비를 데리고 그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낭주?’

야홍릉이 물었다.

“낭주는 서릉에 가깝지?”

용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동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다 나타나는 곳이었지만 용수와 야홍릉의 용모가 뛰어나고 분위기가 평범하지 않은 탓에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모두 그들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것은 사람들의 본능이었다.

그러나 둘의 뒤를 따르고 있는 시위 일행들을 보자 행인들은 바삐 시선을 거두었다.

더 보았다가는 화를 입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용수는 깨끗한 객잔을 찾아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오동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많았다. 호탕한 강호 사람, 약삭빠른 상인들과 피비린내를 풍기는 폭력배들이 공존하는 곳이라 조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이런 오동에도 조용한 객잔이 있었다. 객잔의 주인은 이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게 서생처럼 차분하고 깔끔한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글을 꽤 읽은 사람 같았다.

용수와 야홍릉은 객잔 앞에서 말을 세웠다. 객잔의 머슴이 나오며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말을 뒤뜰의 마구장에 데려갔다.

이때, 객잔의 주인이 직접 나와 허리를 굽히고서 그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안으로 드시지요.”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힐끗 보았다.

서른 살 남짓한 주인은 파란색 장포를 입고 마른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준수한 그에게서는 점잖은 서생 느낌이 풍겼다.

그는 순하고 착해 보였다.

물론 이건 그저 그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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