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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76)화 (177/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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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화 교활한 녀석

야홍릉은 말을 하지 않고 눈을 내리깐 채, 용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준수하고 온화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하필이면 온몸에서 부드러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넌 전생에 나쁜 일을 한 악당이었던 게 분명해. 이번 생에 날 만난 것을 보면.”

“그 말씀은 주인님을 만난 게 제 업보라는 것입니까?”

용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의 다리를 베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다음 생에도 이런 업보가 찾아오기를 바라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둘은 더 이상 목국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야홍릉은 창가에 앉아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달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옆에서는 한 사람이 모든 도도함을 내려놓은 채, 충성스러운 기사처럼 그녀의 다리를 조용히 베고 기대어 있었다.

“내일 아침에 주인님을 모시고 곤륜산으로 가겠습니다.”

한참 뒤, 용수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부 계획은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으니까요.”

남성국의 황성은 곤륜산과 삼천 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가장 강한 무인이 가장 빠른 말을 타고 중도에 말을 바꾸면서 간다고 해도 사흘이 지나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것도 밤낮 쉬지 않고 가야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 말을 두고 두 다리로만 걸어간다면 삼천 리를 얼마나 오랫동안 가야 할까?

거기다 무릎을 꿇으면서 간다면?

가는 길은 별다른 장애물 없이 평탄했다.

야홍릉은 태자인 용수가 전생에 이 삼천 리 길을 갈 동안 옆을 지키는 시위가 많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에게 음식과 물을 먹여줄 사람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누구라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일곱 날 동안 버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체력은 공복에 더 쉽게 떨어진다. 사람의 몸으로 삼천 리의 길을 무릎 꿇으며 걸어갔다. 존엄을 내려놓은 것은 물론이고 두 다리가 까지면서 느끼는 고통은 한 사람의 의지를 무너뜨리기 충분했을 것이다.

팔 월 이십일 새벽.

말 두 필이 곤륜산 아래에 도착했다. 야홍릉은 고개를 들고 앞에 있는 높고 가파른 산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애비.”

용수가 말을 그녀의 옆에 세우며 부드럽게 말했다.

“산에 올라가 보실 겁니까?”

‘산에 올라갈 거냐고?’

야홍릉은 침묵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조용히 계시는 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 말을 들은 용수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애비는 이 산에 신이 있다고 믿으시는 겁니까?”

“믿지 못할 건 없지.”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산에 신이 있다는 것은 사실로 밝혀졌잖아. 아니냐?”

믿든 말든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야홍릉은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녀처럼 평범한 사람의 힘으로는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정말 신이 없다면 그가 전생에 누구의 마음을 움직였기에 그녀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왔다는 말인가?

용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은 말없이 산 앞에 도착했다.

한참 뒤, 야홍릉은 말에서 내렸다.

“애비?”

용수는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보더니 덩달아 말에서 내렸다.

“애비, 힘드십니까?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젓고 산 위로 올라갔다.

용수는 그녀의 반응에 조금 놀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따라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갔다.

곤륜산은 사람들에게 신비로운 곳이었다.

가파르고 협곡이 많아 사람들이 오르기 힘들어 인적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남성국이 삼 년에 한 번씩 주최하는 기도제를 제외하고 다른 시기에 이곳으로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신을 경외하기 때문이고 이곳의 숲이 울창하고 산길이 울퉁불퉁해 가기 힘든 것도 있었다. 전임 대제사는 이 산에 진법을 쳐서 남성국 백성들이 산에 오르는 것을 금지했다.

행인들이 산에서 길을 잃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야홍릉과 용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다란 길을 가로지르자 산길 양옆에 우뚝 선 나무들이 나타났다.

무성한 나뭇잎이 빛을 하늘을 가리자 나뭇잎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게 다였다.

둘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앞으로 걸어갔다.

이때, 야홍릉이 문득 물었다.

“무릎, 아팠더냐?”

‘무릎?’

용수는 멍하니 있다가 그녀가 물어본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프지 않습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입니다.”

용수는 그녀를 위로하듯 한 번 더 반복했다.

“아픈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하고 있어서 몸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때 그는 마지막 희망을 안고 곤륜산에 오른 것이었다.

그러니 아픈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래?”

야홍릉은 시선을 거두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길을 바라보았다.

“나도 걸어보고 싶구나.”

‘뭐라고?’

용수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애비?”

“무릎을 꿇고 삼천 리를 가는 것은 불가능해도 이 정도는 갈 수 있을 것 같구나.”

야홍릉은 돌 부스러기가 잔뜩 깔린 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용수가 안색이 변하며 소리를 질렀다.

“안 됩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야홍릉의 무릎이 이미 땅에 닿아 있었다.

그녀의 싸늘한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용수, 그거 아느냐? 난 여인이지만 사내들보다 무릎이 더 뻣뻣하지. 툭하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는 궁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무릎을 꿇은 적은 한 번밖에 없었어. 바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말이다. 그때 난 어리고 천성적으로 감정이 없어서 정말로 슬퍼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구나. 그런데 어머니는 날 낳으셨으니 내가 무릎을 꿇고 보내드리는 게 당연했었어.”

그녀는 말을 하며 무릎으로 걸어갔다. 딱딱한 돌에 무릎이 부딪히자 아주 아팠다.

그러나 이 정도 통증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이 길을 충분히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꿇는 것은 사람에게 꿇는 게 아니라 신에게 꿇는 거야. 난 네가 그때 겪었던 고통을 느껴보고 싶은 거지. 사람의 감당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구나.”

야홍릉이 말했다.

그러나 용수는 그녀가 고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야홍릉의 앞에 무릎을 꿇고 몸으로 그녀가 가려는 길을 막았다.

그리고 낮고 슬픈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애비.”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돌아가시죠. 다 지나간 일입니다. 애비, 뭘 느껴보고 싶으신 것입니까? 그건 그냥 꿈일 뿐입니다…….”

“그냥 꿈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꿈에서 아픔을 느끼지는 않았느냐?”

야홍릉이 물었다.

용수는 침묵을 지키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릎이 까져 가슴을 찌르는 통증에 시달리고 먼 길을 피로 물들였다.

그의 두 다리는 아파서 일어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뻣뻣해졌다. 밤낮없이 무릎을 꿇어서 통증과 피곤이 그를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의 환생을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견뎌낼 수 있었다.

그가 견뎌냈다고 해서 야홍릉도 겪어봐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귀로 들은 건 직접 겪은 것보다 못하지. 나도 그 느낌을 겪어 본다면 감동 받아 너에게 몸과 마음을 다 비칠지도 모르잖느냐?”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투가 한결같이 싸늘하지 않았다면 용수는 그녀가 농담하는 줄로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농담이든 아니든, 그는 야홍릉이 이런 방식으로 그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게 싫었다.

“몸과 마음은 제가 바치겠습니다.”

용수는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께서 절 정말 아낀다면 남은 평생 저만 총애해주시면 됩니다. 아주 많이 말입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용수, 너에게 시집가야겠다.”

“네, 뭐…… 뭐라고요?”

용수는 뒤늦게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놀란 눈으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진심이십니까?”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평생 다른 사람과 혼인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용수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요.”

그러나 그는 곧 말을 이었다.

“하지만 주인님은 다른 사람을 맞아들일 수는 있습니다. 저,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야홍릉이 입가를 실룩이며 물었다.

“정말?”

“명분일 뿐인데 신경 쓸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림이나 도자기처럼 감상용으로 두셔도 됩니다.”

용수가 말했다.

야홍릉은 성미가 차갑고 천성적으로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참지 못하고 미소를 지었다.

“부드러운 말인 듯하나 아주 난폭한 말이구나.”

용수는 침묵을 지키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제가 이러는 게 싫습니까?”

“……싫은 게 아니라 좋지 않을 뿐이지.”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용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좋아한다는 말입니까? 싫어한다는 말입니까?”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예의 없이 굴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용수는 바로 꼬리를 내리고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야홍릉이 물었다.

“이 수는 누구에서 배운 것이냐?”

예전의 그는 위엄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굴복시키고 세상 사람들이 고개를 조아리게 만들었다.

헌원용수가 언제 누구한테 굽힌 적이 있던가?

“배운 게 아니라 스스로 깨우친 것입니다.”

용수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서 나무에 기대앉았다.

“저와 주인님은 비슷한 성격, 비슷한 이력, 비슷한 인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결말이 많이 달랐지요. 똑같이 도도하고 강압적인 사람이 사랑에 빠지려면 둘 중 한 명은 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이 서로 지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겠는가?

“제가 먼저 주인님을 알게 되었고 주인님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바뀌어야 하는 사람은 제가 마땅하지요.”

용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게다가 저는 사내가 아닙니까? 사내가 고개를 숙이는 게 맞지요.”

‘사내가 고개를 숙이는 게 맞다고?’

그러나 야홍릉이 본 부부들은 항상 여인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남자의 자존심과 체면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여인이 남자에게 빌붙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인은 남자보다 한 단계 아래라고 인식했다.

세상 남자 중 자신이 남자라고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도리어 정실이나 첩실이나 남편의 눈치를 보기 바쁠 뿐이다.

남자가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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