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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75)화 (176/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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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화 생각이 많은 가을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황후의 출입도 통제당했고 당분간 궁 밖의 사람과 접촉도 금지당했습니다. 한씨 가문 역시 저택에 갇힌 채, 신은전의 첩자의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선왕이 야소숙과 동제의 황제가 왕래한 증거를 바쳤다는 것을 또 누가 알고 있느냐?”

“표면적으로는 아직 폐하만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정왕이 줄곧 선왕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그도 알 것입니다.”

영영이 대답했다.

야홍릉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선왕이 증거를 정왕 손에서 가졌다는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이셨냐?”

“별다른 반응은 없었습니다. 폐하는 선왕더러 이 일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폐하의 옆에 있던 내관이 무심결에 태자 책봉의 일로 선왕의 편을 들어 얘기했습니다. 선왕이 그렇게 많은 대신을 매수해 자신을 지지하게 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고요. 그 말은 선왕이 누군가의 음모에 당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폐하의 속마음은 폐하만 아실 게 아니겠습니까.”

야홍릉은 침묵했다.

제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요즘 기분이 최악일 것임은 예상할 수 있었다.

“변방의 장군을 바꾸는 일은 일단락되었지만 폐하는 신은전의 대교습더러 믿을 만한 사람을 파견해 공주의 행방을 찾도록 시켰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래도 공주 전하가 병사들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신 듯합니다. 3황자를 변방에 장기적으로 내버려 둘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영영이 말하는 속도는 느리지 않았다.

그는 간결하게 조정의 얘기를 마친 뒤, 한경백의 근황을 얘기했다.

“한 공자는 어산서원에서 임직하고 있는데 최근에 골치 아픈 일에 마주쳤습니다. 자꾸 누군가 여색으로 한 공자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것입니다. 결국 감진 공자가 나서서 일은 원만하게 해결이 되었습니다. 제가 알아보니 한경백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던 사람은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정왕부 출신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야홍릉은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녀가 떠난 뒤에도 정왕은 한시도 쉬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가며 음모를 꾸미기 바빴던 것 같았다. 게다가 그의 술수 또한 은밀하여 눈치채기 쉽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초 각로의 적손자 초유가 육 장군의 누이동생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지난달 말에 혼인 얘기를 꺼내러 갔지만 육 장군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좋아해?’

야홍릉은 초유가 공주부에 들어와서 그녀의 측부가 되겠다고 하던 일이 떠올랐다.

‘이렇게 빨리 사랑에 빠지고 혼인 얘기를 꺼낼 정도로 발전했다고?’

그녀의 입가에 조롱의 미소가 흘러나왔다.

사랑에 빠지고 말고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육연지와 사돈 관계를 맺는다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이었다.

초유는 정왕과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었다.

그가 누구를 위해 이렇게 했는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육씨 가문은 부모가 일찍 죽어서 가주 노릇을 하는 사람이 육연지 밖에 없었다. 그는 정왕의 편을 들 생각이 없기에 이 혼사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말했다.

“먼저 가서 쉬거라. 내 생각을 해보겠다.”

영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용수는 그에게 거처를 마련해주라고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들이 떠난 뒤, 용수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야정연은 황위를 차지하려고 형제를 음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변방의 전쟁도 신경 쓰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황제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족 형제지만 전생이나 이번 생이거나 그녀는 다른 형제들과 왕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목국의 황자들에 대해서 성격만 알 뿐, 그들의 처사 방식을 잘 알지 못했다.

증거를 야정연에게 보낸 건 그녀의 실수였다.

야홍릉의 원래 계획대로면 야소숙이 전쟁터에서 적어도 이 년은 조용하게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증거가 황제의 손에 넘어간 이상, 이 계획은 실패했다고 봐야 했다.

야정연이 야모침을 끌어들인 것이 변수가 되었다.

야홍릉은 창밖을 바라보며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팔월 십오일에 떠나자. 그때면 목국도 가을이 되었겠지.”

야모침의 충동적인 행위로 봤을 때, 야홍릉은 그가 증거를 황제에게 넘길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야소숙이 전쟁터에서 얼마나 있을 수 있을지는 예견된 일이었다.

전쟁 직전에 장군을 바꾸는 것은 금기된 일이었다. 일 년 안에 연달아 장군을 두 번 바꾼다면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릴 것이다.

야소숙이 변방에 오래 있는 것도 전쟁에 도움이 되질 않았다.

무고한 병사들만 죽이고 국고만 손해 볼 뿐이었다.

“처음에 난 그저 복수할 생각에 대부분의 일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어. 지금 느낀 것인데 황위를 차지하는 과정은 강한 무력만으로는 부족한 것이군.”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싸늘한 한기가 담겨 있었다.

“어쩌면 난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예로부터 훌륭한 장군 뒤에는 수많은 병졸의 죽음이 있다는 말이 있었다.

황권의 최고 자리인 황위로 가는 길에는 더욱 많은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을 것이다. 진정으로 황위에 앉고 싶은 사람은 세심한 마음가짐과 독한 수완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했다.

만약 야홍릉이 전쟁터에 나간 적이 없다면, 전쟁에 대해 잘 모른다면 그녀도 독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병사와 생사를 함께 했던 그녀는 마음을 모질게 먹을 수 없었다.

현재 전쟁터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직접 훈련시킨 병사는 아니었으나 모두 목국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목국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 부모와 처자식을 남겨두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곳으로 떠났다.

그녀더러 권력 싸움을 위해 수만 명 병사의 목숨으로 도박을 하기에는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전쟁을 미룬다는 것은 단순히 승패 문제가 아니었다.

그 과정에 치러야 하는 대가와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는 변화에 대해서 생각해야 했다. 이것은 전쟁터에 나가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것이다.

“주인님, 마음이 흔들리셨습니까?”

용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야홍릉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얘기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주인님께서도 야소숙이거나 야정연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을 두고 보시지만 않을 게 아닙니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야소숙과 한옥금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황후도 한씨 가문과 함께 파멸로 가야 했다. 그녀는 야정연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지만 이번에 그녀가 떠난 뒤, 그녀에게 온갖 음모를 꾸미는 것을 보고 야홍릉은 야정연을 쉽게 놔줄 생각이 없었다.

말없이 창밖의 야경을 보고 있던 야홍릉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나에게 미안한 짓을 한 건 목국의 황족이지 무고한 병사들이 아니야. 난 그들의 목숨으로 도박을 걸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죽어 마땅한 사람을 살려주지도 않을 것이고.”

“목국은 이미 혼란 상태입니다.”

용수가 말했다.

“주인님이 떠난 지 반년도 되지 않았는데 목국의 조정과 후궁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황제도 기분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난리를 치고 있으니 야정연이 아무리 생각이 깊어도 이 일에서 완전히 몸을 빼지는 못할 것입니다.”

야홍릉이 싸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이 똑똑한 줄 알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모두 파악한 것처럼 굴더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것을 잊은 거지.”

용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야홍릉의 강한 모습을 많이 봐서 잘 알고 있었다. 전생이나 이번 생이나 그는 야홍릉이 자신의 결정을 의심할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야홍릉의 마음이 흔들린 것을 보고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권력 다툼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변방 병사들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여인은 겉보기엔 차갑고 매정해 보이지만 사실…….’

“이 세상에 주인님보다 그 자리에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용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투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제왕은 백성들을 헤아려 주어야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수많은 병사와 백성들의 목숨을 버린다면…… 그런 사람은 황제가 되어도 백성들에게는 불행이 될 것입니다.”

야홍릉은 침묵했다.

“주인님.”

용수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잡고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황위로 가는 길은 하나만이 아닙니다. 피해를 최저로 줄이고 시간과 정력을 최소화하려면 지름길이 있습니다.”

‘지름길?’

야홍릉은 그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지름길?”

용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바로 주인님의 지름길이 아니겠습니까? 왜 쓰지 않는 것입니까? 전 무공이 강할 뿐만 아니라 강한 병사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영위와 첩자들은 수시로 각 곳의 동향을 살필 수도 있고요. 게다가 남성국처럼 강한 나라도 가지고 있는데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시면 안 되겠습니까?”

야홍릉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주인님?”

“조건을 말하거라.”

‘조건?’

용수는 눈을 깜박였다.

“주인님의 뜻은…… 몸과 마음을 제게 바치겠다는 말씀입니까?”

야홍릉은 실눈을 떴다.

“제 모든 것이 주인님의 것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도 모두 주인님의 것인데 제가 어찌 주인님과 조건을 논하겠습니까?”

용수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사람의 마음을 간질이는 듯한 목소리로 그는 말을 이었다.

“앞으로 주인님께서 저만 총애하시면 충분합니다.”

‘총애하기만 하면 된다고?’

야홍릉은 창가에 기대앉은 채, 느긋한 말투로 말했다.

“이번 기회에 원하는 조건을 얘기해 보아라. 내가 생각을 해보겠다.”

용수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전 주인님을 진심으로 연모합니다. 전 주인님이 원해서 저와 혼인하는 것을 바라지, 다른 이유로 인한 압박 때문에 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말했다.

“능묵, 넌 참 교활한 녀석이야.”

그는 분명 강압적인 사람이었으나 그녀를 대할 때만큼은 조금도 강요하지 않고 부드럽게 대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녀는 점점 그를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

꽁꽁 얼었던 마음이 조금씩 녹더니 이제는 완전히 녹은 것 같았다.

“네, 주인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용수는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 교활할 뿐만 아니라 냉혈한입니다. 오직 주인님만 저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주인님, 부디 제가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게 꽉 잡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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