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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74)화 (175/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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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용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뒤에야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발정? 저택으로 돌아가서 하라고?’

난폭하던 행동이 서서히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용수는 퉁퉁 부은 야홍릉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자신의 ‘작품’을 본 그는 야홍릉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인님…….”

야홍릉은 자신의 입술을 만져 보았다. 아프고 뻣뻣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흘겨본 뒤, 마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이때, 그녀의 몸이 휙 들렸다. 용수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 번쩍 안은 뒤, 낮게 속삭였다.

“제가 주인님을 안고 들어가겠습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발이 없는 것도 아니고.”

용수가 낮게 웃었다.

“제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셈 치고요.”

말을 마친 그는 마차에서 내렸다.

야홍릉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를 안고 저택으로 들어가는 게 왜 소원이지?’

“전하.”

이때, 정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부 문 앞에 처음 보는 이상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처음 보는 이상한 남자?’

야홍릉을 안고 마차에서 내리던 용수는 정려의 말을 듣고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봉왕부 안은 등불로 환했는데 흑의 남자는 저택 밖 어두운 곳에 서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봉왕이 저택에 있지 않으니 대집사 한운은 찾아온 낯선 사람을 저택에 함부로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 사람이 정식적인 이유로 찾아온 게 아닐 수도 있었다.

봉왕부 밖에서 봉왕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남자는 그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의 품에 안긴 여인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애비, 영영이 왔습니다.”

용수가 낮게 말하고 정려에게 당부했다.

“들이거라.”

말을 마친 용수는 야홍릉을 안고 대문으로 향했다.

정려는 당황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남자 앞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를 훑어보며 말했다.

“저희 전하가 들어오시래요.”

흑의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말없이 몸을 돌려 봉왕부로 들어갔다.

왕부의 대문을 지키고 있던 시위들은 용수의 말을 듣고 그를 막지 않았다.

영영이 조용히 서 있을 때에는 몰랐으나 그가 걷기 시작하자 정려는 그가 다쳤다는 것을 발견했다. 걷는 모양이 절뚝거렸기 때문이었다.

정려는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손을 뻗어 그를 부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괜찮으세요?”

남자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다친 건 맞지만 걷는 속도가 느리지 않았다.

“내려놓거라. 이게 뭐지?”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용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능수전 앞에 가서야 야홍릉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따라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영영.”

영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물론 그가 무릎을 꿇은 방향은 야홍릉 쪽이었다.

야홍릉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제가 저녁에 소식을 전하러 왔다가 봉왕부의 영위와 오해가 생겼습니다.”

그가 짧게 한마디 했지만 야홍릉과 용수는 그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용수는 전에 야홍릉의 측근 어영위였고 영영은 공주부의 암위 수령이었다.

어영위는 다른 사람이 몰라야 하는 존재였지만 영영은 능묵을 본 적이 몇 번 있었고 능묵도 영영을 알고 있었다.

목국에서 떠나 위성, 또 동제의 제경으로 갈 동안 야홍릉은 줄곧 영영, 영일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야홍릉이 봉씨 저택이나 평양 공주부에 머물 때는 영영이 그녀를 만나기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남성국으로 오게 되자 영영은 낯선 데다가 힘에 부친 느낌을 받았다.

그가 혼자의 힘으로 봉왕부 전체의 사람과 붙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다친 것이었다.

“먼저 일어나거라. 심하게 다쳤느냐?”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영영이 대답했다.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용수가 지시를 내렸다.

“주방에서 먹을 것을 내오너라.”

저택의 하인은 바로 그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심청(沈青), 데리고 나가 씻기거라.”

시위에게 지시를 마친 용수는 영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요기를 한 뒤, 다시 얘기하자꾸나.”

영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자의 말대로 하거라. 난 능수전에 있을 테니 반 시진 뒤에 찾아오너라.”

야홍릉이 말했다.

영영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야홍릉은 돌아서서 능수전으로 들어갔다. 용수는 봉매를 불러 몇 마디 물은 뒤, 따라서 침전으로 들어갔다.

“영위들은 지붕 위로 걷는 것이 버릇이지 않습니까? 영영이 오늘 저택으로 들어와 애비를 만나려고 하다가 봉매에게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싸움이 났고 혼자이던 영영이 다친 것입니다.”

용수는 따뜻한 물을 따라와 야홍릉의 손에 건네주었다.

“의원을 불러 진찰받게 했습니다.”

영영은 수세에 몰린 데다 야홍릉을 만나는 게 급해 봉왕부의 능 공자를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결국 봉매는 그더러 저택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 것이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영영의 일은 그녀의 실수였다.

그녀가 미리 연락할 방법을 얘기해 주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영영이 심하게 다친 게 아니기에 며칠 쉬면 바로 나을 수 있었다.

야홍릉도 예전에 전쟁터에서 쉽게 다쳤다. 그러니 무인이 다치는 것을 큰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왕부는 경비가 엄격해서 영영도 쉽게 들어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봉자 돌림 영위는 영영과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영위 한 명이라도 영영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영영의 실력이 못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용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일은 오해이니 화를 내실 건 아니시죠?”

‘화를 낸다고?’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화를 왜 낸다고 생각하지?”

‘봉왕부의 사람들이 영영을 모르니 막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야홍릉은 봉자 돌림 영위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의 무공 경지는 모두 최정상이었다. 그들 중 아무나 뽑아도 영영과 실력이 엇비슷했다. 영영은 능묵이 아니었다. ‘어’자 돌림 영위를 제외하고 혼자의 힘으로 수십 명의 영위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화나신 게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용수는 그녀의 이마에 얼굴을 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에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나서 애비의 기분이 상했을까 걱정했습니다.”

많은 일이 일어난 것은 맞았다.

야홍릉의 원래 성격으로는 진녕 공주의 일을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목국을 떠나 있은 몇 달간 그녀의 성격은 전보다 많이 유순해졌다.

불필요한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수가 그녀를 이렇게 잘 지켜주는데, 심지어 그녀를 위해 황족 전체와 선전포고까지 하는데 화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영영이 직접 온 것을 보니 전할 소식이 많나 보군.”

야홍릉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용수, 나는…….”

“주인님, 아무 말씀도 하시지 마십시오.”

용수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주인님이 어디로 가시든 전 따라갈 것입니다. 만약 정말 돌아가려고 하신다면 저도 주인님을 따라갈 것입니다.”

그는 그녀가 홀로 목국의 늑대들을 마주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지금 돌아가겠다고 한 적 없다.”

그녀는 떠날 때 돌아올 날짜를 확실하게 얘기하지 않았다.

몇 달이 걸릴 수도 있고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만 했다.

사실 그녀의 계획은 장기간에 걸쳐서 이뤄낼 생각이었기에 빨리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모든 계획에는 변수가 생기는 법이다.

목국의 일을 해결해야 하는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다.

목국의 황자들은 모두 성인이 되었고 황위 싸움도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야모침이 야소숙과 다른 나라의 황제가 왕래한 비밀 서신을 증거로 내놓는다면 목국의 조정은 또 한 번 발칵 뒤집힐 것이다. 심지어 전쟁터의 장군도 바뀔 수 있었다.

이는 야홍릉이 바라는 결과가 아니었다.

그녀는 야소숙이 참패하기를 바랄 뿐, 변방을 지키는 장군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능묵.”

야홍릉은 창가의 비단 탑에 기대 창문으로 야경을 바라보았다.

“난 지금에야 내가 그렇게 똑똑하지 못하다는 걸 알겠구나. 완벽한 계획을 세울 수 없다는 것도.”

그녀는 병사들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 싸움을 하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 갖은 변수를 생각하는 것은 직설적인 성격의 그녀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말을 들은 능묵은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의 고민을 제가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능묵도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녀의 옆에 조용히 있었다.

밤이 점점 어두워졌다.

반 시진 뒤, 영영이 심청과 함께 들어왔다. 밥을 먹고 간단하게 세수를 마친 그는 봉왕부의 의원에게서 상처를 치료받고 약을 받았다.

안색이 전보다 훨씬 좋아졌으나 약간 피곤한 기색은 숨길 수 없었다.

그것 말고도 영영은 내상이 심했다.

그래도 충분히 야홍릉에게 소식을 보고할 수 있었다.

“한 달 전쯤에 조정 대신들이 폐하를 찾아가 태자를 책봉하라고 했습니다. 대신들은 선왕을 추천했지요. 폐하는 화가 난 나머지 허락하지 않으셨고요. 그 참에 선왕과 그의 어머니 초 숙비는 난감한 상황에 몰렸습니다. 지난달 전하께서 영일에게 주신 증거는 이미 정왕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영영은 고개를 숙인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왕은 이 증거를 누가 보냈는지 알지 못해서 처음 며칠은 조용히 알아보더군요. 그러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자 함정을 설계해 소식이 누출되게 했습니다. 선왕부의 첩자가 이 소식을 듣고 저택에 숨어 들어가 비밀 서신을 손에 넣은 것입니다.

선왕은 태자 책봉의 일로 폐하의 눈 밖에 난 상황이었는데 야소숙과 동제의 황제가 왕래한 서신을 손에 넣자 급히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그 서신을 폐하께 드렸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영영은 말을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하지만 선왕도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황제가 그 서신을 보고 화를 내면서 어디에서 난 것이냐고 묻자 그는 바로 정왕에게서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폐하는 이 일로 크게 화를 내시며 다음 날 조례에서 3황자를 불러들이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육연지를 전쟁터에 파견하려고 했지요. 그러나 신하들이 전쟁을 앞두고 장군을 바꾸는 것은 절대 안 되는 일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이미 공주 전하에서 3황자로 바꾸었는데 다시 바꾼다면 변방 장군과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이 갈 것이고 전쟁도 불리하게 될 것이라면서요. 그래서 황제는 그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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