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혼인은 아직입니다
이 말을 들은 헌원 황제는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결국 제왕으로서의 자신감이 부족한 게 아니냐?”
제왕이 능력이 출중하고 신하들을 다스릴 자신감이 넘친다면 자식까지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달랐다. 모든 제왕이 모두 너그럽고 현명할 수는 없었다. 역대 황조를 보면 자질이 뛰어나지 않은 황제가 운 좋게 황위를 물려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만약 황제로 되는 사람이 하나같이 현명하고 능력이 뛰어나다면 황조가 바뀔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는 침묵을 지키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자네와 용수의 혼인에 대해서 부황과 황형들은 아직 모르고 있느냐?”
이 말에 야홍릉은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그러나 그녀는 곧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와 헌원용수는 아직 혼인하지 않았습니다.”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황제는 놀란 표정을 짓고 용수를 바라보았다.
“어찌 된 일이냐?”
용수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전 그냥 용수가 원하지 않는 혼인을 하지 않도록 막아주기로 약속했을 뿐이에요. 아직 그의 구혼에 동의하지 않았고요.”
야홍릉이 대답했다.
“그래서 계속 남장을 한 채 있던 것이지요.”
그녀의 말을 들은 황제는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의 손자는 신분이 고귀할 뿐만 아니라 아주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와 혼인하고 싶어 하지 않는 여인이 있다니?
그러나 한동안 둘을 지켜본 결과 헌원 황제는 손자가 야홍릉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야홍릉처럼 성미가 차가운 여인이 용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절대 그를 따라 낯선 나라에 와서 그의 저택에 묵지 않았을 것 같았다.
‘아마 서로 좋아하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헌원 황제는 속으로 몰래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아무리 오랫동안 남성국을 지배해온 황제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의 자랑이자 잘생기고 문무 모두 뛰어나며 귀티가 흐르는 손자가 사실 야홍릉의 측근 어영위였다는 것을.
그러니 야홍릉이 왕부에 묵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용수는 심지어 공주부의 침실에 묵은 적도 있었다.
왕부에서도 그는 주인님의 명령을 따르며 조금도 어기지 못했다.
충성스러운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셋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궁인이 들어와 보고를 올렸다.
“폐하께 아룁니다. 대제사께서 오셨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용수를 바라보았다.
“대제사와 할 얘기가 있는데 남아서 들을 것이냐, 아니면 먼저 돌아가 쉴 것이냐?”
‘뻔한 질문을 하시네.’
용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야홍릉을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애비,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시지요.”
헌원 황제는 입가를 실룩거렸다.
‘혼인도 하지 않았는데 ‘애비’라고 말은 잘하는군.’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나 헌원 황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용수와 함께 돌아서서 떠나갔다.
대전 밖은 등불로 환했다. 멀리서 불빛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바람이 불어오자 새하얀 장포를 입은 대제사의 옷자락이 나풀거리며 고결한 빛을 뿜었다.
그는 마주 오는 용수와 야홍릉을 보더니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공주 전하, 오늘은 채찍으로 사람을 갈기지 않으셨습니까?”
“오늘은 채찍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 써야 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묵백은 실소를 터뜨렸다.
“공주 전하, 조금 더 부드러워지시면 좋겠습니다.”
“애비, 부드러워지실 필요 없습니다.”
용수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맞아도 싼 사람들을 마음껏 혼내주십시오. 그 인간들에게는 채찍도 과분합니다.”
말을 마친 용수는 그녀의 귓가에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께서 필요하시다면 제 계편도 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야홍릉은 그의 말을 듣더니 무덤덤한 시선으로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더니 낯설 것 같구나. 오늘 밤 먼저 너로 연습을 해보아야겠다.”
말을 마친 그녀는 묵백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계단을 내려갔다.
“얼마든지요.”
용수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애비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세를 취할 것입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지만 멀리 가지 않은 묵백의 귀에 들리고 말았다.
묵백은 입가를 실룩이고 고개를 돌려 태자의 훤칠한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전생에 고귀하고 강압적이며 차갑던 봉왕이 이번 생에는 왜 이렇게 변한 거지?’
묵백은 직접 운명을 바꾸는 행위에 참여하고 다시 태어난 뒤에도 용수의 모든 계획을 하나하나 실행에 옮겼다.
만약 그가 직접 전 과정을 지켜보지 않았다면 용수가 원래의 사람이 아니라 바뀌었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묵백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혼잣말로 뭐라고 중얼거린 뒤, 계단을 올라 제왕의 궁전으로 향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꼭 맞는 것 같았다.
궁문 밖에 도착한 용수와 야홍릉은 막 궁에서 나오던 진녕 공주와 마주쳤다.
야홍릉을 바라보는 진녕 공주의 눈빛은 독기로 가득했다.
야홍릉은 그런 그녀를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용수와 함께 마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거기 서!”
진녕 공주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어른을 보고도 인사 한마디 하지 않다니. 그러라고 배웠느냐?”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자꾸만 시비를 걸고 멍청하게 덤비는 여인에게 야홍릉은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애비, 먼저 마차에 오르시지요.”
용수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하며 문발을 젖혀 야홍릉이 들어가게 했다.
그는 돌아서서 진녕 공주를 바라보았다. 온화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아까 맞은 따귀가 아프지 않나 봅니다?”
진녕 공주의 안색이 퍼렇게 변했다.
“헌원용수, 이 고모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입니까?”
“전 친척관계를 그다지 중히 여기지 않아서요.”
용수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절 건드리지만 않으면 전 할아버지의 체면을 봐서 헌원 황족의 사람들을 존중할 생각입니다. 지금이나 앞으로 황위에 오른 뒤에나 마찬가지지요. 황족 종친들이 누리는 부귀영화도 그대로 유지할 생각이었고요. 하나 고모 같은 분은…….”
순간 용수의 눈빛이 섬뜩하게 번뜩이며 목소리에도 서늘한 기운이 풍겼다.
“정말 질색입니다.”
말을 마친 그는 싸늘하게 외쳤다.
“심풍(沈風).”
“예, 전하.”
측근 시위 수령이 앞으로 나서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시하여 주십시오.”
“오늘부터 출가한 공주는 특별한 지시 없이는 황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라. 만약 어긴다면 역모죄로 다스릴 것이다.”
용수는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진녕 공주는 화를 버럭 냈다.
“헌원 용수, 너…….”
“조(曹) 부마가 살인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들었는데 대리사더러 빨리 수사하여 결과를 가져오라고 하거라. 황족과 연관된 일이라 대리사에서 뭘 걱정하는지 안다. 9황숙을 대리시로 보내 협조하여 수사하도록 하여라. 반드시 사흘 안에 결과를 받아야겠다.”
용수는 고개를 돌리고 심풍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심풍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진녕 공주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용수…….”
“고모님, 잘 알아서 하십시오.”
용수는 말을 마친 뒤, 마차에 올랐다.
훤칠한 뒷모습은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간다.”
진녕 공주는 제자리에서 굳은 채, 봉왕부의 마차가 방향을 돌리고 천천히 떠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그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차 안.
용수는 옆에 앉아 야홍릉의 안색을 살폈다.
“애비, 화나셨습니까?”
“무슨 화?”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그를 보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
“화를 낼 필요가 없지.”
“애비, 역시 현명하십니다.”
용수는 기분이 좋은 듯, 입꼬리를 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화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수는 다정하게 자신의 다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애비, 누우시면 더 편할 것입니다.”
야홍릉은 잠깐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그의 말대로 자리에 누웠다.
용수의 다리를 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돌아온 지 보름밖에 안 지났는데 태자의 권력을 제대로 되찾았구나.”
용수가 말했다.
“남성국의 태자자리는 원래 아주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황제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말을 마친 그는 한 마디 덧붙였다.
“그렇다고 황권을 위협해 황제의 의심을 살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황제와 태자는 원래 서로 존중하고 믿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태자는 책봉되면 쉽게 폐위되지 않습니다.”
이 점은 목국과 달랐다.
제사전의 존재로 태자를 책봉하는 일은 조심스럽고 엄격했다.
태자는 황제와 제사전, 그리고 신하들의 동의를 동시에 받아야 하기에 태자로 책봉된 사람들은 능력이 뛰어나고 품행이 훌륭하며 총명하고 침착했다.
황제의 신임을 얻고 신하와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자만이 태자로 책봉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태자의 지시는 성지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성지와 어긋나는 경우에는 성지에 따르나 다른 경우에는 황제도 태자의 결정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조 부마가 진녕 공주의 남편이냐?”
용수는 야홍릉의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네.”
야홍릉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황족이나 귀족들은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사생활이 깨끗하고 자신의 품행을 단속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를 수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굴었다. 평소 너무 과한 게 아니라면 눈감아 줄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파고든다면 누구도 자신이 청렴결백하다고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진녕 공주의 성격을 보니 부부 둘이서 사람 몇 명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마차가 봉왕부에 멈췄다. 용수는 고개를 숙이고 야홍릉의 빨간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애비.”
야홍릉은 눈을 뜨고 잠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도착했느냐?”
그 모습을 보자 용수는 마음이 떨렸다. 그는 야홍릉의 허리를 와락 감싸고 고개를 숙인 뒤,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시녀와 시위는 모두 마차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려는 왕부 대문 밖에 낯선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젊은 나이인 듯했으나 기운이 강한 것이 무공을 익힌 사람 같았다.
정려는 미간을 찌푸리고 마차를 돌아보았다.
한참 기다렸지만 주인이 나오지 않자 그녀는 입을 열어 재촉했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용수는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야홍릉에게 난폭하게 입을 맞추었다. 야홍릉의 입술을 모조리 삼킬 듯한 기세였다.
야홍릉은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바, 발정이 나려고 하거든 저, 저택으로 돌아가서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