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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72)화 (17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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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화 오래된 한

진녕 공주는 궁에서 바로 나가지 않고 황후의 궁으로 갔다.

“어마마마.”

양쪽 볼에 투명한 연고를 바르자 그녀의 상처는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스무 살 여인처럼 하얗고 여린 피부를 가진 진녕 공주는 수심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남성국의 미래 황후 자리를 타국 여인에게 내줘도 되나요?”

황후가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

“봉왕의 뜻이 정 그런데 나라고 무슨 수가 있겠느냐?”

진녕 공주가 대답했다.

“어마마마는 후궁의 주인이시잖아요. 봉왕이 아무리 태자라고 해도 혼사는 황실의 규정에 따라야죠. 어마마마께서 아내를 점지해 준다면 그가 거절할 수 있겠어요?”

‘봉왕에게 아내를 점지해 주라고?’

황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조용히 앉아 차를 마셨다.

그동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전 안에는 측근 시녀가 황후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는 미세한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한참 뒤, 황후는 시선을 들어 진녕 공주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그럼 너는 봉왕비 자리에 누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느냐?”

진녕 공주는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예전에 동생이 성녀가 되었잖아요? 그런데 결국 동생은 마음을 다해 신을 모시지 않고 남자 때문에 자신의 책임을 포기했어요.”

그녀의 말에서 짙은 원한이 드러났다.

이십 년이나 지난 일이었지만 그녀는 그때의 질투와 분노를 줄곧 지우지 않았다.

황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서 차를 마셨다.

“동생이 이미 죽었으니 저도 다른 말은 하지 않을게요.”

진녕 공주가 담담하게 말했다.

“동생의 아들이 태자가 되었으니 제 딸을 봉왕비로 세우는 것은 과분한 요구가 아니겠죠?”

그 말을 들은 황후는 고개를 들고 진녕 공주를 힐끗 보았다.

담담한 그녀의 눈빛은 전혀 놀란 것 같지 않았다.

황실 공주는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으나 자매끼리 싸움이 나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제사전의 성녀가 되는 것은 남성국 여인에게 가장 큰 영예였다.

성녀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었고 제사전의 인정을 받아야만 될 수 있었다.

남성국은 개국한 뒤로 성녀는 두 번밖에 나오지 않았다.

진녕 공주도 제사전에 들어가고 싶었다. 마음을 다해 신을 구 년 동안 모시고 나오면 나이가 좀 많지만 대제사처럼 높은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평생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제사는 그녀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정((靜) 공주(公主)를 선택했다.

그리고 정 공주가 바로 헌원용수의 어머니였다.

이 일은 진녕 공주의 마음속에 가시처럼 박혔다. 그 뒤로 헌원 황제가 대제사와 함께 남제로 가서 용수를 데려오고 그를 태자로 책봉하자 진녕 공주의 쌓였던 질투는 점점 더 강하게 타올랐다.

그녀는 정 공주가 자신의 것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질투해도 바뀌는 건 없었다.

용수의 태자 자리는 누구도 흔들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봉왕비의 자리를 노리는 것이었다. 만약 그녀의 딸이 앞으로 국모가 된다면 그녀는 황제의 고모이자 장모가 될 것이다. 그러면 혈연관계로나 장모의 신분으로나 봉왕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봉왕비의 자리는 반드시 그녀의 딸이 차지해야 했다.

“진녕, 내가 충고 한마디 하마.”

황후는 찻잔을 내려놓고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봉왕은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란다. 그는 성미가 차갑고 만만하지 않은 사람이지. 황족의 규정도 중요하나 그가 그대로 하기 싫다고 한다면 누구도 그를 강요할 수가 없단다. 너도 이것을 잘 알고 있지?”

황후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폐하께서는 그의 말이라면 껌뻑 죽으니 그더러 원하지 않는 여인을 맞이하라고 강요할 리는 없을 테고. 봉왕이 열 살에 남성국을 떠나 스무 살에 돌아왔다. 기나긴 십 년 동안 누구도 그의 자리를 대체하지 못했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누가 태자의 자리를 내버려 두고 십 년이나 돌아오지 않았겠느냐?”

십 년은 열흘이 아니었다. 조정의 세력과 인맥은 물론이고 귀족 세가의 사람들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십 년 안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데 누가 태자의 자리를 두고 떠나겠는가?

그러나 성인들도 할 수 없는 일을 열 살 된 용수가 해냈다.

그가 황실 규정을 무시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자신감이 넘쳐서 그런 건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 용기와 박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두 세대를 사이에 둔 황후도 신분으로 헌원용수를 제압할 생각이 없었다.

진녕 공주는 굳은 얼굴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번 일은 널 도와주지 못하겠구나. 나도 나이가 드니 그저 조용히 여생을 살고 싶단다. 네 오라버니들도 그 자리를 탐내지 않는데 넌 왜 그렇게 집착을 하는 것이냐?”

황후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진녕 공주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오늘 그 능씨는 종친들 앞에서 제 따귀를 때렸어요. 전 여태 그런 억울함을 당해본 적이 없고요. 어마마마께서는 제가 괴롭힘을 당한 걸 보고만 계실 생각이신가요?”

황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녁에 일어난 일에 대해 특별히 자초지종을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나도 모르는 게 아니야. 누가 옳고 그른지 나도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진녕아, 너도 이젠 어리지 않은데 사사건건 이 어미가 나서주기를 바라는 것이냐?”

진녕 공주는 안색이 확 바뀌었다.

그녀는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황후가 손을 내저었다.

“피곤하니 이만 돌아가 보아라.”

말을 마친 황후는 내전으로 들어갔다.

진녕 공주는 제자리에 굳은 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얼굴은 서리가 낀 것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 * *

“동제의 평양 공주?”

헌원 황제는 대전 안에서 시중을 드는 궁인들을 내보낸 뒤, 침궁 안의 탑에 기대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맞은편의 아름다운 한 쌍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목국의 호국 공주라고 하지 않았더냐?”

야홍릉은 말없이 손에 든 차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신분은 하나씩 밝혀야죠. 그러는 편이 신비감이 있으니까요.”

용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당분간 동제의 공주라는 신분만으로 충분합니다.”

황제는 그의 말을 듣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정말 동제와 통혼할 생각이냐?”

용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에는?”

“그다음에는 말이죠…….”

용수는 입꼬리를 올리고 싸늘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남성국의 태자가 된 지 오래되었으나 제 몸에는 아직 남제 용씨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으니 아버지와 형님들을 만나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병사들을 데리고 가겠지?’

황제는 그를 힐끗 보더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동제와 통혼하면 남성국과 동제는 사돈이 되는 것 아니냐? 앞으로 병사들을 출동하려면 동제 공주의 입장도 생각해야겠지 않느냐?”

용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애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지.”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헌원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어찌 상관이 없는 일이란 말인가?’

“그건 맞습니다.”

용수가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이런 것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다 알아서 할 것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갑자기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

“목국과 금국의 전쟁은 공주가 맡은 것이 아니냐? 왜 갑자기 3황자로 바뀐 것이냐?”

‘이 질문은…….’

용수가 대답하려고 할 때, 귓가에 여인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실에서의 권모술수는 나라마다 존재하는 것으로 흔한 일이지요.”

이 말을 들은 황제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공주는 여인이지 않더냐?”

“여인이 뭐가 어때서요?”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담담하게 말했다.

“전 전쟁터에 나갈 수 있어요. 능력으로 따지면 그 어떤 황자에게도 뒤지지 않고요. 그래서 황제의 경계심을 사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폐하께서도 이 이치를 잘 아실 텐데요.”

헌원 황제는 잠자코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자네가 내 여식이거나 손녀였다면, 절대 자네를 의심하거나 경계하지 않을 것이야. 다른 황자들이 해치게 두지도 않을 거고.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가?”

황족 사이의 권모술수, 권력 싸움은 항상 남자들 사이의 일이었다.

이런 일에 여인을 끌어들이지 말아야 했다.

게다가 이 여인은…….

헌원 황제의 야홍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오늘 궁에 들어오자마자 공주의 따귀를 때린 것으로 봐서 성격이 직설적이고 차가운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은 꿍꿍이가 많지 않고 음모나 음해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목국의 황제가 왜 이런 딸에게 경계심을 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약 제가 공을 여러 번 세우고 병권을 움켜쥐고 있으며 제 휘하의 부대 역시 저의 지령만 따른다면 그래도 폐하께서는 절 경계하지 않으실 것입니까?”

야홍릉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만약 병권을 가지고 있다고 경계심을 사야 한다면 어느 장군이 열심히 나서서 나를 지키겠느냐?”

헌원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헌원창은 짐의 아들이자 용수의 황숙이다. 십 년간 그 아이는 정예 기예병 부대를 훈련하는 데만 집중했지. 짐은 이 부대가 천하를 평정하고 모든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자부한단다. 그러나 이 병사들은 오직 그의 지시에만 따르지. 그런데 그게 뭐 어떠냐? 그가 이 부대로 황위를 노릴 거라고 의심할까? 아니면 일찍 그를 죽여 후환을 없앨까?”

황제의 말을 들은 야홍릉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대답했다.

“남성국이 강한 것은 이유가 있군요.”

제왕이 믿어주고 신하가 충성을 다하니 국력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군이 역모를 꾀하는 것은 대다수가 사지로 몰렸기 때문이다.”

헌원 황제는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에게서는 무시할 수 없는 제왕의 위엄이 풍겼다.

“제왕이 우매하거나 폭군이어서 세상이 지옥 같을 때, 장기적으로 내전이 지속되어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때야 누군가 총대를 메고 썩어빠진 황조를 뒤엎으려고 하지. 이는 강산이 이어가면서 생기는 필수적인 과정이야.”

이 경우를 제외하고 신하가 부대만 믿고 역모를 꾀했다가 성공한 선례는 극히 드물었다.

병권을 움켜쥔 것은 큰 권력이나 역모의 성공 여부는 다른 일이었다.

그러니 역모를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더욱 적었다.

제왕이 현명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며 충신을 믿어주고 백성들을 아낀다면 누가 이런 야심을 품겠는가?

“사람들은 서로 다르듯이 황제들도 서로 다릅니다.”

야홍릉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현명한 제왕은 백성의 복이고 멍청한 제왕은 불행의 씨앗입니다. 일부 황제들은 보기에는 너그러워 보이나 실제로는 능력이 강한 신하를 용납하지 못하지요. 그게 자신의 자녀라고 해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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