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맞아도 싸지
“제가 무슨 욕을 했는데요?”
진녕은 시선을 들고 싸늘한 눈빛으로 용수를 바라보았다.
“조카님 옆의 천……, 저 사람이 먼저 저한테 무례를 범하지 않았다면 제가 왜 혼내겠습니까?”
“고모님, 기억력이 좋지 않은 듯합니다.”
용수는 시선을 그녀의 얼굴에 돌린 뒤,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고모님께서 먼저 저한테 무례를 범했고, 애비가 절 아끼는 마음에 고모님의 말에 대답한 것입니다.”
‘아끼는 마음에?’
이 말에 대전의 사람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소년이 봉왕을 아낀다는 말인가?’
야홍릉을 바라보는 시선이 좀 더 의미심장해졌다.
방금까지 이 소년이 잠자리 시중을 드는 남첩 같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봉왕의 이 말은 어딘가 이상했다.
‘아끼는 마음에? 그리고 ‘애비’라는 호칭도 그래. 둘이 이미 ‘애비’라고 부를 정도로 사이가 발전했다는 말이야?’
종친들의 표정이 미묘해지고 눈빛이 야릇해졌다.
“애비?”
진녕 공주도 드디어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 건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야홍릉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역시 그런 사이가 맞았군. 제가 말을 잘못 했다는 말인가요? 봉왕 전하께서 이렇게 추잡스러운 물건을 황족 연회에 데려왔다는 것은 황족의 체면을 안중에 두기나 했다는 말인가요? 폐하와 황후마마를 조금이라도 생각하신다면 이럴 수는 없어요. 태자가 남첩이나 들이고 품행이 단정치 못하며 규정을 완전히 무시하는데…….”
“그만하거라!”
황제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녕 공주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분노로 가득했다.
“용수의 말이 맞구나. 입을 간수 하지 못하면 맞아도 싸지.”
‘뭐라고?’
“부황?”
진녕 공주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대전의 사람들도 황제의 말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들은 황제의 말을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헌원 황제는 찻잔을 내려놓고 서리가 낀 듯이 차가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황실 공주가 우아한 품위를 유지하기는커녕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길거리의 아낙네처럼 상스러운 말을 마구 퍼붓다니? 공주의 권세를 믿고 위엄을 부리는 것이냐? 아니면 어른이라고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것이냐? 짐이 평소 너희들을 너무 너그럽게 대한 모양이구나.”
황제가 화를 내지 사람들을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무릎을 꿇었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죄를 묻는 관아로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용수를 원망했다.
‘역시 젊은이는 믿을 게 못 되는군. 태자로서 규정에 따르고 선을 지켜야지. 해도 되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을 전혀 모른다는 말인가? 지금 봐, 폐하께서 노하셨잖아. 황족 연회를 망쳤으니 이따 어떻게 수습하는지 봐야겠군.’
황제의 차가운 말에 진녕 공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부황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호된 꾸짖음을 들은 그녀는 서럽고 억울해 눈시울이 빨개져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녀는 용수의 웃어른인데 황제가 수많은 종친과 어린 공자, 군주들 앞에서 그녀를 이렇게 혼냈으니 이 무슨 망신인가?
용수에 대한 부황의 편애를 그녀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이 정도로 편애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남첩을 데리고 궁에 들어온 것도 눈감아 주며 무작정 편을 들다니…….’
“용수야.”
헌원 황제는 시선을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
“이 공자의 신분이 어떠한지 소개하지 않겠느냐?”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누구도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용수가 싸늘한 말투로 대답했다.
“제가 마차를 궁 문 밖에 세우고 궁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진녕 고모께서 호되게 꾸짖으셨습니다. 제가 사람들 앞에서 풍기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하고 황족의 체면을 깎는다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저는 당황했습니다. 고모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옆에서 듣고 있던 애비는 심기가 불편하셨나 봅니다. 애비는 제 고모라는 것을 모르고 저를 아끼는 마음에 공주답지 않다고 말했고 그 결과 고모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소개하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진녕 공주는 화가 치밀었다.
“헌원용수, 조카님의 남첩이 제 따귀를 때릴 때는 못 본 척하더니 제가 쟤를 욕하는 말은 다 기억하고 있네요?”
“입 다물어라!”
황제는 버럭 화를 냈다.
“예의라고는 전혀 없구나!”
진녕 공주는 흠칫 놀라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부황, 노여움을 푸십시오.”
“애비가 진녕 고모를 때린 것은 맞습니다.”
용수는 담담한 어조로 인정했다.
“그건 고모께서 먼저 욕설을 퍼부었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입을 간수 하지 못하면 맞아도 싼 게 아닙니까?”
“…….”
용수는 차갑게 웃었다.
“다 태자인 제가 위엄을 잃은 탓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저를 막 대하는 거겠지요.”
고개를 숙이고 용수를 원망하던 황자들과 종친들은 이 말을 듣자 몸서리를 쳤다.
용수는 여전히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진녕 공주에게서 겨우 벗어나 구화궁(九華宮)으로 들어왔는데 문턱을 밟기도 전에 석월 군주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저에게 따지더군요. 그리고 제 애비를 ‘천한 남첩’이라고 욕하면서 말이죠. 할아버지, 이런 망발을 퍼붓는데 따귀를 때리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왕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는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방금 황제가 ‘입을 간수하지 못하면 맞아도 싸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가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하면 자리에 계시는 분들은 마음껏 얘기를 하셔도 좋습니다.”
용수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오늘부터 제 규정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저를 건드린 사람은 그 사람이 종친이든, 어른이든 막론하고 저는 전혀 봐주지 않겠습니다.”
쉽게 말에서 상대방이 누구든 건드리는 사람은 혼날 준비를 하라는 말이었다.
그때에는 따귀 두어 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족보에서 제명이 되어 평민으로 될 수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이었다.
그의 말에 대전 안은 오래도록 정적에 잠겼다.
물론 그에게 따지는 멍청한 사람은 없었다.
황제가 이 태자를 얼마나 아끼는지 그들이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두 달 뒤에 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다고 말한 것만 봐도 그들은 곧 황제로 될 사람의 역린을 건드릴 수 없었다.
게다가 봉왕이 무턱대고 편을 드는 사람도 아니었다.
방금 궁 밖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들 보아서 알고 있었다. 궁 안에 들어온 뒤, 석월 공주가 맞은 이유 또한 청왕과 다른 황자, 종친들도 모두 보았다.
석월 군주가 먼저 예의 없는 말을 한 것이 사실이었다.
평소라면 곱게 자란 왕부의 군주가 예의 없는 말을 해도 그저 두어 마디 꾸짖고 지났을 것이다.
그러나 봉왕이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고 호되게 혼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만하거라.”
황제는 미간을 문질렀다.
“이 일은 이쯤 하자꾸나. 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알아내고 싶지도 않다. 다들 일어나거라.”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진녕 공주는 울분이 차올랐지만, 부황이 그녀가 당한 수모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억울하고 서러워 황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황후는 대전에 일어난 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담담하게 앉아 있었다.
진녕 공주는 화가 나서 이를 깨물었다.
“다들 조용해졌으니 제가 다시 소개하지요.”
용수는 야홍릉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그는 느긋한 말투로 놀라운 얘기를 꺼냈다.
“이분은 제가 아내로 맞아들인 봉왕부의 정실이자 동제의 평양 공주인 능야입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뭐라고?’
“원래의 신분이나 지금의 신분이나 여러분들이 마구 깎아내릴 분은 아닙니다. 그러니 다들 우월감은 접어 두기 바랍니다.”
용수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지만 그의 말에는 압박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애비는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게 익숙해져 무례를 범하는 사람은 늘 채찍으로 다스렸습니다. 오늘 그저 따귀를 내리친 것은 사정을 봐준 것이니 고맙게 생각하십시오.”
‘고맙게 생각하라고?’
진녕 공주는 이 말에 피를 토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내가 고맙다고 고개라도 조아려야 해?’
그러나 사람들은 진녕 공주와 석월 공주가 따귀를 맞은 것보다 봉왕비에 대해 관심이 더 많았다.
“이, 이 공자가 여인이라는 말입니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청왕이 놀란 시선으로 야홍릉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종친의 안사람들은 소년이 여인이라는 말을 듣고 야홍릉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야홍릉은 아름답게 생겼으니 여인들처럼 유약하고 가녀린 아름다움이 아니라 싸늘하고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아름다움을 풍겼다.
의자에 앉아 있어도 보이는 얇은 허리와 그린 것처럼 정교한 눈매는 정성을 들인 조각 같았다.
그들은 소년이 남첩이라는 것을 알고 경멸 어린 시선으로 이 소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남첩의 신분을 제외하고 얼굴만 본다면 소년이 너무 아름답게 생겨 봉왕이 좋아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소년의 남첩 신분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여인이라고 말을 했다면 그들은 절대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첩’이라는 신분이 먼저 뇌리에 박힌 데다 봉왕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이 봉왕에게 전혀 기가 눌리지 않자 사람들은 그녀를 여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소년은 여인일 뿐만 아니라 신분이 고귀한 공주일 줄이야.
더욱 놀라운 것은 봉왕이 이 여인과 혼인했다는 것이었다.
‘언제 한 거지? 남성국을 떠나 있는 십 년 안에 한 건가?’
“능 낭자의 신분이 고귀하여 ‘남첩’이라는 말이 모욕으로 들리긴 하나 이것 또한 오해입니다.”
청왕이 종친 황자들을 대표하여 입을 열었다.
그의 말투는 온화하고 침착했다.
“봉왕 전하는 남성국의 태자이신데 혼사처럼 큰일을 어찌 스스로 결정하신 것입니까?”
“맞습니다. 봉왕께서는 남성국의 태자이신데 미래의 황후를 정하시는 것은 남성국의 종묘사직에 연관됩니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쉽게 결정하신 것입니까?”
“전하께서는 언제 혼인하신 것입니까? 저희가 몰랐으니 이 혼인은 무효로 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동제의 공주라고요?”
이때, 대전에 있던 한 종친이 뭔가 떠올랐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동제의 황족은 영씨가 아닙니까? 언제 능씨 공주가 생겼다는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