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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69)화 (17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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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누가 때린 것이냐?

사람들은 시선을 헌원용수와 야홍릉에게 돌린 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봉왕이 외부인을 데리고 황족 연회에 참석하러 온 것만 해도 불만이었지만 그들은 누구도 나서서 뭐라고 하지 못했다. 무안을 당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년은 정말 남첩이 맞나……?’

청왕과 다른 종친들은 나이가 있는지라 소년의 딱딱한 성격을 보고 그가 귀족들의 취향에 맞는 남첩 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남첩들은 온화한 성격에 나긋나긋한 말투로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는데 이 소년은 아무리 보아도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리고 봉왕도 그러했다. 봉왕이 아무리 제멋대로 군다고 해도 이런 장소에 남첩을 데려오지는 않을 게 아닌가? 이게 황족의 체면을 얼마나 깎는 행위인가?

소문은 사람의 눈과 귀를 가리고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속일 뿐이었다.

“봉왕 전하, 공자에 대해 소개해 주지 않겠습니까?”

청왕이 분위기를 풀려고 온화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공자가 인물이 훤하고 귀티가 흐르는 것을 보니 일반 인물이 아닌 듯합니다.”

야홍릉은 그를 힐끗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분이 어떤 사람인지는 잠시 뒤에 황숙들에게 밝힐 것입니다.”

용수는 방금 전의 차가운 표정을 거두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굳은 그의 표정에 사람들은 겁을 먹어 불만스러운 표정도 짓지 못했다.

청왕도 용수의 대답에 깜짝 놀랐다.

‘이 공자가 정말 특별한 신분이라는 말인가?’

야홍릉의 얼굴을 본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석월 군주가 어려서 철이 없습니다. 공자, 노여움을 푸십시오.”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석월 군주보다 두어 살 많아 보이는 소년은 놀라울 정도로 차가운 성미를 가지고 있었다.

헌원 황실의 장남인 청왕은 쉰이 가까운 나이였다. 그는 조정의 정무를 오랫동안 보았고 궁 밖의 일에도 적잖이 개입했다. 그동안 그가 겪어 온 사람은 아주 많았다.

출신이 고귀한 사람도 있었고 비천한 사람도 있었으며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나 대쪽 같이 곧은 사람도 있었다.

또 총명한 사람, 멍청한 사람, 아부에 능한 자, 권세에 빌붙는 자, 도도하고 콧대 높은 자들도 있었다. 그의 성미는 나이가 들수록 온화해졌지만 안목은 아주 날카로웠다.

사람은 겉모습을 숨길 수 있으나 성미를 속이기는 힘들었다.

뼛속 깊이 새겨진 도도함은 가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소년은 도도하고 차가운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절대 잠자리 시중이나 드는 남첩일 리 없었다.

청왕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봉왕 전하, 이 공자에게 자리를 내어드리지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기로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섬뜩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천한 것이 황족의 대전을 더럽혔는데 오라버니는 신분도 파악하지 못하고 자리를 내어준다고 하시는군요? 전 동의할 수 없어요!”

그 말에 대전 안은 다시 정적에 잠겼다.

사람들은 시선을 돌리고 밖을 바라보았다.

진녕 공주가 시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드높은 기세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황족의 종친이 여러 명 서 있었다. 다들 표정이 굳은 것이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청왕은 진녕 공주의 반응이 이상해서 입을 열려고 하다가 그녀의 얼굴에 찍힌 손자국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얼굴이 왜 그러냐?”

그는 누가 때린 것인지는 차마 묻지 못했다.

손자국이 또렷했다.

하지만 공주처럼 신분이 고귀한 사람에게 누가 감히 따귀를 때린다는 말인가?

청왕의 질문에 진녕 공주의 안색은 순식간에 퍼렇게 변했다.

“헌원용수 옆의 천한 것에게…….”

“고모님, 한 번만 더 욕을 하신다면 따귀 두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용수는 고개를 돌리고 한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제 경고가 먹히지 않았나 봅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진녕 공주는 화가 나 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를 손가락질했다.

“헌원용수, 어른한테 이렇게 무례하게 굴어도 됩니까? 황족의 어른이 눈에 뵈지도 않는다는 겁니까? 이 고모와 황숙들에게…….”

“왜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냐?”

위엄 가득한 목소리가 진녕 공주의 말을 잘랐다.

“멀리서부터 너희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구나. 이게 무슨 추태냐?”

대전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무릎을 꿇은 뒤,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일상복 차림의 황제와 황후가 나란히 들어왔다.

그들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대전 중앙에 있는 용수와 야홍릉에게 쏠렸다.

그도 그럴 것이 대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는데 오직 이 둘만 꼿꼿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황제와 황후의 시선이 쏠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용수는 싸늘한 표정으로 애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리로 가서 앉으십시오.”

말을 마친 그는 야홍릉의 손을 잡고 옆으로 걸어갔다.

황후의 뒤에는 숙비, 현비(賢妃), 장비(莊妃) 등 신분이 높은 비빈이 있었다.

신분이 낮은 비빈들은 본래 이런 장소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다. 황제에게 총애받는 비빈 몇 명이 건너와 함께 식사하고 얘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오늘은 중추절이라 떠들썩해 마땅하나 소리를 들으니 싸우는 것 같더구나?”

황제는 동물 가죽이 씌워진 좌석에 앉으며 말했다.

나이가 든 그는 정식적이지 않은 장소에서는 편한 게 좋았다.

“다들 일어나거라.”

종친들은 감사의 인사를 올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일어서자 용수는 야홍릉의 손을 잡고 황제의 바로 아래에 있는 상석에 앉았다. 느긋한 그의 행동과 다른 싸늘한 표정에서 언짢은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황제가 앉은 뒤로 황후와 비빈들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봉왕과 그의 뒤에 있는 소년에게 쏠렸다. 그 시선에는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모두가 무릎을 꿇는데 봉왕과 그 소년만 무릎을 꿇지 않았으니 이상할 만도 했다.

그러나 헌원 황제는 봉왕과 그 소년을 모른 척했다.

연회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전 안의 사람들은 모두 귀티가 나는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아주 혼잡해 보였다.

평소의 엄숙하던 황실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바로 이때, 대전 밖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단왕이 화를 내며 들어와 소리를 질렀다.

“어떤 년이 석월을 때린 것이냐? 당장 나오지 못하겠느냐!”

이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단왕은 사람들 사이에서 의자에 앉은 황제와 그의 뒤에 서 있는 황후를 비롯하여 비빈들을 보고 표정이 굳었다. 그는 바로 무릎을 털썩 꿇었다.

“부황과 모후를 뵙습니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노기가 가득한 단왕을 보며 황제는 담담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누가 석월을 때렸다고?’

단왕은 황제의 질문을 듣더니 바로 대답했다.

“방금 전에 웬 종년이 종친들 앞에서 석월이의 따귀를 때렸다고 합니다. 제가 그 얘기를 듣고 바로 왔지요. 석월이는 울면서 절대 연회에 오지 않겠다고 합니다. 집사람은 어화원에서 석월이를 달래고 있습니다. 부황, 부디 이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황제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두운 그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그는 나이가 많은 데다 황제 자리에 오래 있었기에 아들딸, 손주들도 가득했다.

사실 황제는 석월 군주가 누군지 알고 있었지만 그저 얼굴만 알 뿐, 딱히 아끼지는 않았다.

손주가 그렇게 많은데 언제 하나하나 아껴주겠는가?

그러나 황족의 군주가 맞은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특히 이렇게 많은 종친 앞에서 군주에게 손을 댄 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황제는 단왕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

“너도 나이가 적지는 않은데 수많은 종친 앞에서 ‘종년’이 뭐냐? 체통이 뭐가 되겠느냐?”

단왕은 안색이 변했다. 그는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화가 난 나머지 이성을 잃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숙비는 시녀에게서 찻주전자를 받아서 찻잔에 따랐다.

헌원 황제는 찻잔을 받아들고 가볍게 마신 뒤, 위엄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방금 누가 석월이를 때렸다고?”

사람들은 표정이 굳은 채, 헌원 황제와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봉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려가 앞으로 나서서 무릎을 꿇으려는 순간, 용수가 입을 열었다.

“제가 때렸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지만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직접 때린 것은 아니나 그가 지시를 내린 것은 맞았기에 그가 때렸다고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정려는 고개를 돌려 용수를 바라보고 다시 야홍릉의 뒤에 가서 섰다.

단왕은 고개를 돌리고 화난 얼굴로 용수를 노려보았다.

“봉왕 전하는 왜 자꾸만 석월이를 괴롭히는 겁니까? 그 어린애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전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침묵했다.

황제도 이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진녕, 너는 또 왜 우느냐?”

“부황께 아룁니다.”

진녕 공주는 앞으로 걸어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곱게 단장한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저도 방금 맞았습니다. 부황,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저, 저는 이 나라의 공주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맞았으니 체면이 뭐가 됩니까?”

대전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이상하게 변했다.

헌원 황제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말없이 시선을 진녕 공주의 얼굴에 돌렸다. 어여쁜 얼굴에 또렷한 손자국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 손자국은 어딘가 이상했다.

가느다란 손가락 자국을 보니 여인 같기도 한데 손바닥이 찍힌 모양을 보니 힘을 크게 쓴 것 같았다. 연약한 여인이 사용할 수 있는 힘 같지 않았다.

헌원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넌 또 누구에게 맞은 것이냐?”

‘오늘 연회에 폭력이 왜 이리 난무하는 것이지?’

“용수 옆의 천한…….”

진녕은 튀어나올 뻔한 말을 가까스로 삼킨 뒤, 이를 악물고 나지막하게 흐느꼈다.

눈치를 챈 황제는 고개를 돌려 용수와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용수는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찻잔에 차를 따라 야홍릉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놀랍도록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애비, 차 드십시오.”

‘애비?’

황제는 하마터면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뿜을 뻔했다.

그는 다급히 차를 마신 뒤,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용수야, 어찌 된 일이냐?”

“할아버지, 자초지종을 잘 알아보셔야지요.”

용수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고모님이 무슨 욕을 했는지, 석월 군주가 사람들 앞에서 내 사람에게 어떤 망발을 했는지 알아보십시오. 그들이 무슨 권력이 있어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입 하나도 간수 하지 못하니 맞아도 싼 게 아니겠습니까?”

야홍릉은 말없이 차를 마셨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차분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싸늘한 표정을 보니 지금 상황을 전혀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헌원 황제는 이 광경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야홍릉을 바라보는 시선이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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