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천한 것이라고?
방금 정려가 나서지 못한 것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려서 봉왕과 능 낭자에게 민폐를 끼칠까,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잃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런데 능 낭자가 망설임 없이 진녕 공주의 뺨을 때릴 줄이야.
봉왕의 ‘애비, 대단하십니다’와 꼭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남성국 황성에서 공주의 따귀를 때릴 수 있는 여인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여인은 물론이고 사내들 중에서도 없을 것이다.
‘능 낭자는 간도 크고 패기도 넘쳐. 봉왕 전하도 자신의 여인을 지킬 줄 알고. 진녕 공주에게 밉보일까 전혀 걱정하지 않잖아. 앞으로 좋은 남편이 될 거야.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능 낭자를 ‘이분’이라고 부르다니. 능 낭자를 아주 아끼시나 봐.’
정려는 앞으로 능 낭자에게 잘 보여 호감을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능 낭자만 잘 모신다면 다른 사람의 미움을 사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봉왕이라는 뒷배가 뒤처리를 깔끔하게 해줄 텐데 뭐가 걱정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능 낭자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봉왕은 화난 나머지 그녀의 목을 비틀어버릴 수도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정려는 자신의 앞날이 훤해진 것만 같았다.
야홍릉은 정려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방금 내 행동이 어땠느냐?”
“너무 멋있었습니다.”
용수는 그녀에게 칭찬을 퍼부으며 고개를 돌리고 버릇처럼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애비, 너무 멋있었습니다. 제가 다 영광스럽던데요.”
‘영광스럽다고…….’
정려는 속으로 그의 말을 되뇌었다. 봉왕이 이런 행위에 영광을 느끼다니.
게다가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의 행위에 정려는 놀랍기만 했다.
‘황제 폐하, 황후마마, 비빈 마마, 전하들 중 체면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런데 자신의 여인이 밖에서 이렇게 난폭하게 구는 걸 봐주다니… 음, 다른 사람들은 능 낭자가 여인인 걸 아직 모르지? 다들 능 낭자를 수치스러운 신분의 남첩으로 안다는 말이야. 그래서 능 낭자는 아직 봉왕 전하의 ‘안사람’이 되지 못했지. 그래도 황족 종친의 웃어른에게 손을 대는 건 아주 무례한 행위잖아.
겉보기식이라도 다른 황자들은 안사람을 혼내는 척이라도 했을 텐데 봉왕 전하는 너무 감싸주잖아. 만약 진녕 공주가 정말 앙심을 품는다면 이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을 텐데. 만약 진녕 공주가 폐하나 황후마마께 고자질이라도 한다면…….’
여기까지 생각한 정려는 걱정이 되어 어쩔 줄 몰랐다.
그녀는 봉왕의 훤칠한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전하.”
용수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정려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진녕 공주가 오늘 일을 분명 그냥 넘어가지 않고 폐하나 황후마마께 고자질할 것입니다.”
“고자질?”
봉왕이 담담하게 말했다.
“난 고자질하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구나.”
‘뭐라고? 이게 무슨 소리야?’
정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침묵을 지킨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귀띔을 했다.
“전하, 오늘 저녁의 연회는 황족끼리의 연회입니다. 능 낭자는 아직 전하의 안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진녕 공주는 폐하의 친딸이자 전하의 웃어른이십니다.”
‘그러니 상황이 누구에게 기울지 뻔하잖아?’
게다가 야홍릉에게는 ‘남첩’이라는 신분이 씌워져 있었다. 그런 그녀가 공주에게 손을 댄 것 하나만으로 죽을죄였다. 황제가 아무리 너그럽고 현명하다고 해도 딸이 이런 수모를 당하는 걸 참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방금만 해도 수많은 황족 종친들이 진녕 공주가 맞는 광경을 보았는데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들이 외부인의 편을 들 리는 없지 않겠는가?
그때 가서 그들이 말을 보태기라도 한다면 용수와 야홍릉이 둘만의 힘으로 그들을 당해내지 못할까 걱정이었다.
용수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애비, 절 믿습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죽어도 네가 먼저 죽겠지. 내가 두려울 게 뭐가 있느냐?”
질문과 다른 대답이었으나 이 말을 들은 용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준수한 얼굴에 멋스러움이 풍겼다. 평소의 차가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야홍릉이 다정하게 ‘널 믿어’라고 말하는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야홍릉이 할 수 있는 가장 친근한 말임을 알고 있었다.
이런 말이 야홍릉의 성격에 더욱 어울렸다.
야홍릉이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고 하나 그들은 아직 혼인을 한 사이도 아니고 아이도 없었다. 게다가 천하를 손에 넣지도 못했으니 지금 바로 죽으려는 계획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야홍릉이 그와 함께 궁에 들어오기로 결정한 것은 자신의 안전을 그에게 맡긴 것이었다.
그러니 이 말이야말로 믿는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방금 전에 야홍릉이 진녕 공주의 따귀를 때린 것도 그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만약 그가 먼저 야홍릉에게 진녕 공주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진녕 공주가 어른이란 핑계로 그의 기를 누르려고 하지 않았다면 야홍릉의 차가운 성격으로는 진녕 공주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애비가 나를 아낀다는 거지.’
이렇게 생각한 용수는 꿀을 먹은 것처럼 마음이 달콤하기만 했다.
진녕 공주에게 밉보인 게 뭐가 대수인가?
야홍릉만 있다면 모든 황족 종친들에게 밉보여도 상관이 없었다.
둘은 곧 구화궁(九華宮)에 도착했다.
황제와 황후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먼저 도착한 종친들이 먼저 용수에게 예를 올렸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미소년을 훑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야홍릉은 자신을 바라보는 호기심 어린 시선이나 악의 어린 시선을 모두 무시로 일관했다.
이때 대전에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황족 연회인데 어찌 천한 남첩 따위가 온 것입니까? 봉왕 오라버니…….”
“정려.”
용수의 온화한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따귀를 때리거라!”
정려는 조용히 대답하고 몸을 날렸다.
곧이어 철썩, 철썩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야홍릉의 뒤로 돌아와 섰다. 눈을 내리깔고 서 있는 모습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기만 했다.
그러나 대전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석월 군주의 얼굴에 닿았다.
하얗던 얼굴에 시뻘건 손자국이 나 있었다.
석월 군주는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갑자기 누군가 자신을 때릴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야홍릉도 이 상황을 예상치 못한 듯했다.
그녀는 궁으로 들어오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했지만 귀하게 자랐을 황족 중에 멍청하고 무례한 여인이 이렇게 많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라마다 상황이 비슷하군. 남성국도 예외는 아니네.’
어느 나라나 숨겨진 총명한 사람이 있나 하면 멍청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다.
만약 오늘 연회가 무력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면 그녀는 머리를 쓰지도 않고 이 사람들을 모조리 쓸어 눕혔을 것이다.
그들이 인원수가 더 많았지만 그녀에게는 더없이 강한 어영위가 있지 않은가?
궁중에는 어림군까지 있으니 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어림군이 출동해야 하는 상황까지 간다면 용수는 태자 자리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를 건드린 사람은 모조리 죽을 테니 말이다.
대전 안은 더없이 조용했다.
석월 군주는 정신을 차리고 놀랍고 당황한 얼굴로 정려를 노려보았다.
“천한 종년 주제에 감히 날 때려?”
정려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보더니 야홍릉의 뒤에 선 채, 입을 삐죽였다.
‘내가 때리려고 한 게 아닌데…….’
석월 군주는 말하는 게 얄밉긴 하지만 신분이 군주인지라 용수가 지시를 내린 게 아니었다면 그녀도 석월을 때리지 못했을 것이다.
‘봉왕 전하가 지시 내린 걸 다 들었으면서 왜 전하에게 따지지 않고 명령대로 움직이는 나한테 난리야? 내가 만만한가?’
“내가 시킨 것인데 불만이냐?”
용수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앞에서 무례한 발언을 해서 때린 것이다. 네가 여인인 것을 감안하여 시녀더러 때리라고 하였지, 네가 사내였다면 내가 직접 나섰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석월 군주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봉왕에게 따질 용기가 없어 야홍릉을 독기 서린 눈빛으로 흘겨보고는 ‘천박한 것’이라고 욕했다.
그리고 얼굴을 감싸고 울면서 뛰어갔다.
그녀가 대전 문 앞까지 갔을 때, 야홍릉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서 싸늘하게 물었다.
“천박한 것이란 말은 누구한테 하는 욕이었지?”
“뭐 하는 거야? 이거 놔!”
석월 군주는 화가 나 소리를 질렀다.
“봉왕 오라버니가 좀 예뻐한다고 정말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는 거야? 천박한 것은 널 두고 하는 말이다. 왜? 너도 날 때리려는 것이냐?”
“널 때린다고?”
야홍릉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스스로를 욕하는 사람에게 손을 대고 싶지 않아.”
“누가 스스로를 욕했다는 거…….”
석월 군주는 멍하니 서 있더니 야홍릉의 말을 이해하고 표정이 구겨졌다.
“널 두고 하는 말이라고! 이 천한…….”
야홍릉이 손을 들자 석월 군주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피했다.
“네가 감히?”
야홍릉은 손을 들기만 하고 때리지 않았다. 그러나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족 출신인 소녀가 고귀하고 우아한 귀족 여인다운 품위까지 바라지는 못해도 아낙네처럼 상스러운 말은 하지 말아야지. 황족의 체면을 깎는 건 둘째치더라도 성격이 나쁜 사람을 만나 목숨이라도 잃으려면 어떡하려고 그래? 난 원래도 세상에 두려운 게 없는 사람이야. 앞으로 또다시 내게 욕을 퍼붓는다면 네가 여인이거나 군주라고 봐주는 게 없을 줄 알아라.”
말을 마친 그녀는 석월 군주를 풀어주었다.
석월 군주는 어렸을 때부터 왕부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며 곱게 자랐다.
그런 그녀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혼나 봤겠는가?
그것도 한낱 남첩에게 말이다.
화가 치민 그녀는 욕을 퍼부으려고 했지만 용수의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치자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에 몸을 흠칫 떨었다.
태자에게서 나오는 차가운 한기를 그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하려고 했던 욕을 꾹 삼킨 채,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대전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