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초대를 했으면 가야지
중추절은 가족이 모이는 중요한 날이었다.
황족 연회라고 하지만 봉왕이 직접 데려온 손님이었다. 봉왕이 연회에 참석하러 궁에 들어올 동안 봉왕부에서 혼자 있는 손님은 얼마나 적적하겠는가?
봉왕이 그런 손님을 안쓰럽게 여기지는 않겠는가?
그래서 숙비는 그 공자를 궁의 연회에 초대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족의 연회에 황족이 아닌 사람이 참여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고, 게다가 봉왕과 연관되기까지 한 일이라 그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황후에게 물어보러 온 것이었다.
황후는 후궁의 주인 자리를 수십 년 지킨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성격이 온화해졌지만 머리가 둔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숙비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들었다.
봉왕이 아름다운 미소년을 데리고 왔고 그 소년은 보름 동안 저택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숙비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었다.
소년을 궁에 초대하여 중추절을 보내자는 것이 봉왕의 마음을 배려한 것인지, 아니면 숙비가 사람들에게 이 소년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은 것인지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미소년?”
숙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목소리를 깔고서 대답했다.
“지금 귀족 소저들 사이에서 이 소년이 봉왕의 남첩이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신첩은 그 말을 믿는 건 아니나…….”
‘믿지 않는다고?’
황후는 그녀를 흘겨보았다.
숙비가 그 소문을 진짜로 믿지 특별히 여기까지 와서 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난 이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네. 봉왕에게 직접 물어보거나 봉왕부에 초대장을 보내게. 그를 데리고 들어올지 말지는 봉왕에게 맡기게나.”
황후가 말했다.
이 말뜻은 오고 싶으면 오고, 싫으면 말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핑계로 소년을 난처하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숙비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지만 황후의 이런 반응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한참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만약 그 소년과 봉왕이 정말 특별한 사이라면…….”
“정말 특별한 사이라면 폐하께서 알아서 하실 터이니 자네나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네. 봉왕의 일은 자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황후가 담담하게 말했다.
숙비는 흠칫 놀라더니 다급히 말했다.
“네, 잘 알겠습니다.”
황후는 나이가 많아 황자들 사이의 권력 싸움에 대해 모르는 척, 눈을 감아주었다.
그녀는 그런 것에 개입할 힘이나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십 년 전, 황제가 태자를 책봉하고 아이의 생모가 제사전의 성녀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그녀는 황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구도 그 아이를 대체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제사전에서 유일하게 인정한 태자도 헌원용수 한 명밖에 없지 않던가?
그녀도 이 일에 불만이 있었지만 최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안 그러면 궁에서 수십 년을 어떻게 보냈겠는가?
외부에서 퍼진 소문은…….
“정향(丁香).”
숙비가 물러가자 황후는 옆에 있는 시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최근에 궁 밖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느냐?”
“마마께 아룁니다.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단왕부의 석월 군주가 퍼뜨린 것입니다. 봉왕 전하가 돌아온 날, 석월 군주는 봉왕부에 갔다가 그 공자와 언쟁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단왕을 불러 그 공자를 혼내주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궁에서 돌아온 봉왕과 마주쳤고… 봉왕 전하의 성격은 십 년 전과 똑같이 차가우셔서… 단왕 부녀가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석월 군주가 이 일을 다른 소저들에게 얘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황후는 그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봉왕은 떠도는 소문에 대해 뭐라고 하더냐?”
“봉왕 전하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평범한 친구와의 관계가 이렇게 왜곡된다면, 또는 ‘남첩’이라는 소문이 돈다면 가만히 있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야?’
황후는 숙비가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보름 동안 저택에서 나온 적이 없다, 라…….’
“그만.”
그녀는 미간을 문지르며 천천히 일어났다.
정향은 다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여 내전으로 걸어갔다.
“난 이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구나. 나이가 드니 쉽게 피곤해지는구먼. 이만 들어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 * *
초대장이 봉왕부로 보내졌다. 용수는 탑 앞에 무릎을 꿇고 야홍릉의 어깨를 주물러 주고 있었다.
“편합니까?”
야홍릉이 느긋하게 ‘응’이라고 대답했다.
용수는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주물러드리는 것 같습니다.”
야홍릉은 잠깐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지금 태자이지, 궁녀가 아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용수가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전 예전에도 궁녀가 아니었습니다. 주인님의 어영위였죠.”
야홍릉은 말이 없었다.
그녀는 일어나 앉더니 탑을 두드리며 말했다.
“엎드려라.”
용수가 경악했다.
“애비?”
“너도 피곤할 테니 나도 주물러 주마.”
야홍릉은 그의 팔을 잡고 강제적으로 엎드린 뒤, 팔을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여기는 어떠냐?”
용수는 눈을 깜박이며 비단탑의 무늬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야홍릉은 움직임을 멈추고 물었다.
“왜 그러는 것이냐?”
“간지럽습니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해 본 그녀는 다시 주무르기 시작했다.
“여기가 간지러운 것이냐?”
용수는 고개를 돌리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아, 아닙니다. 애비, 제가 원래 간지러움을 잘 탑니다.”
야홍릉의 표정이 순식간에 이상하게 변했다.
‘간지러움을 잘 탄다고?’
“전하.”
한운이 초대장을 가지고 들어오다 이 광경을 보고 민망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봉왕은 탑에 엎드려 있고 준수한 소년은 옆에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봉왕의 어깨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어깨를 주물러주는 것 같기도 하고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했다. 특히 활짝 웃고 있는 봉왕은 평소 차가운 인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하게 봉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운은 눈을 내리깔고 공손하게 말했다.
“궁에서 능 공자더러 연회에 참석하라는 초대장이 왔습니다.”
‘연회에 참석하라고?’
“무슨 연회냐?”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린 채, 용수를 바라보았다.
용수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그녀의 얼굴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애비, 잊으셨나 봅니다. 오늘은 중추절이지 않습니까? 오늘 밤 궁에서 황족 연회가 열립니다.”
‘애비?’
한운은 이 호칭을 듣더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는 애써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저었다.
“알겠다. 먼저 물러가 보아라.”
용수가 말했다.
한운이 지시를 받아들였다.
“네.”
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황족 연회가 나와 무슨 상관이지? 내가 헌원 황족도 아니고.”
“그거야 어렵지 않은 문제지요.”
용수는 씩 웃더니 신난 얼굴로 말했다.
“애비께서 저에게 시집만 오면 헌원 황족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야홍릉은 그를 흘겨보았다.
“제가 애비에게 장가들어도 되지요.”
용수는 바로 말을 바꾸었다.
“저한테 애비가 있고, 애비한테 제가 있으니 애비가 제 성을 따르든, 제가 애비의 성을 따르든, 앞으로 남성국에 있으나, 목국에 있으나 우리는 모두 황실 종친이지요.”
그는 설레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애비, 전 애비와 혼인하고 싶습니다. 성인식을 치른 뒤, 혼인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야홍릉은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애비.”
용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더니 그녀의 얼굴을 잡고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주인님…….”
야홍릉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를 싸늘한 눈길로 노려보았다.
“그만하면 되었다.”
“안 됩니다.”
용수가 낮은 목소리로 웃고 그녀의 이마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할아버지께서는 제가 성인식을 올린 뒤, 퇴위하실 생각이십니다. 저는 등극하는 날에 애비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애비는 헌원 황후가 되는 것입니다. 남성국의 백성들이 모두 우리의 혼례식을 보는 거지요. 그렇게 하면 남첩 소문도 사라질 거고요. 애비도 남성국의 황후가 되면 좋은 점이 많을 텐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그는 낮은 목소리로 혹할 만한 조건들을 얘기했다.
야홍릉을 아이처럼 달랠 생각인 듯했다.
야홍릉은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좋은 점이 있는지 들어나 보자꾸나.”
“저의 모든 것이 애비의 것이지요. 애비가 하라는 대로 할 것이고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애비가 황후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전 애비의 말을 들을 거지만 명분이 있어야 안심될 게 아닙니까?”
그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헌원창도 애비의 지시에 따를 것이고 그의 휘하에 있는 기예병도 애비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애비가 목국의 황제 자리를 차지하는 데 더욱 유리하겠지요.”
야홍릉은 침묵했다.
용수는 그녀의 귓가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자 그의 뜨거운 숨이 야홍릉의 목덜미에 닿았다.
“음, 명분을 제외하고도 애비는 저를 마음껏 짓밟을 수 있습니다…… 전 고분고분한 노리개가 되어 애비의 각종 요구를 만족시킬 것입…….”
퍽!
말이 끝나기 전에 야홍릉은 그를 발로 걷어찼다.
야홍릉은 반항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려서 억울한 얼굴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야홍릉은 침묵을 지킨 뒤, 담담하게 말했다.
“생각을 좀 해보아야겠다.”
‘생각을 해 본다고?’
용수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기쁜 얼굴로 물었다.
“정말입니까?”
야홍릉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탑에서 내려 후전으로 걸어갔다.
“목욕을 할 것이니 시중을 들거라.”
“네.”
용수는 다급히 일어나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랐다.
“전 꼭 주인님을 만족시킬 것입니다.”
궁에서 먼저 초대장을 보냈으니 야홍릉은 피할 이유가 없었다.
저녁 무렵, 그녀는 용수와 함께 마차를 타고 궁으로 갔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궁 문에는 마차가 한 줄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제 막 마차에서 내린 종친 자제와 군주들은 봉왕의 마차를 보더니 발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손을 내린 채,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러나 다들 호기심을 못 이겨 고개를 슬쩍 들고 훔쳐보았다.
봉왕부의 시위와 시녀는 옆에 서서 공손한 자세로 대기했다.
마차에서 가장 먼저 내린 사람은 봉왕이었다.
종친 공자와 귀족들은 이 광경을 보더니 봉왕이 홀로 온 줄 알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집에서 잘 나오지 않는 군주들은 봉왕의 실물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순간 그들은 봉왕의 준수한 용모에 깜짝 놀랐다.
경포 차림을 한 그는 키가 더욱 훤칠해 보였고 얼굴도 그림처럼 정교했다. 온몸으로 내뿜는 귀티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존경심이 들었다.
소녀들은 몰래 한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나중에 누가 봉왕비가 될까? 그 사람은 얼마나 운이 좋을까?’
고귀한 신분은 물론이고, 봉왕의 준수한 외모와 우아한 분위기에 소녀들은 마음이 설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