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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65)화 (166/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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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경백은 한씨 가문의 서자로 중시를 받지 못했고 기댈 수 있는 가족 세력도 없었다.

게다가 한씨 가문과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복수하려면 호국 공주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신의 안전한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역시 호국 공주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의 지금 신분도 호국 공주의 측부이니 그의 운명은 호국 공주부와 단단하게 묶여 있는 셈이었다.

어산서원은 목국에서 인재를 배양하는 곳이었다. 새 귀족의 팔구 할은 모두 어산서원 출신이었다. 한경백은 어산서원의 사보로 다음 기 과거에서 뛰어난 두각을 보인 제자들은 모두 그를 ‘스승님’으로 불러야 했다.

그리고 그와 직접적인 스승과 제자 사이를 맺을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나중에 야홍릉에게 크게 쓰일 사람들이기도 했다.

“한경백은 서자인데다 애비의 측부이니 처음 어산서원으로 들어갔을 때는 무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인들은 자부감이 있는 사람들이라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존경하기도 하지요.”

용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한경백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것입니다. 그가 학자들의 인정을 받는다면 그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편견도 사라질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 깜짝 놀랐다.

‘용수가 생각이 깊어 내 계획을 꿰뚫어 본 것인가? 아니면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 파악한 것인가?’

“애비가 사내로 태어났다면 반드시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제왕이 되셨을 것입니다.”

용수는 진심으로 아부를 떨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인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기에 어산서원에 손을 대셨고 종묘사직을 안정시키는 데 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기에 마장을 손에 넣으셨습니다. 애비의 탁월한 안목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시는 것입니까?”

용수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틀린 말을 한 것입니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은데 들어보시겠습니까?”

용수는 목을 가다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경백이 사보로 있으니 앞으로 그에게 수많은 제자가 생기겠지요. 애비가 정말 황위에 오른다면 한경백 역시 날개가 단단해졌을 터이니 바로 조정에 투입되어 애비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야홍릉은 심드렁하게 대꾸한 뒤, 물었다.

“그래서?”

“목국은 예로부터 후궁은 정무에 개입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지 않습니까?”

용수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측부 신분인 한경백이 조정에 투입되기는 적합하지 않은 듯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혹시 그 사람이 신경 쓰이는 것이냐?”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내가 후궁을 잔뜩 들여도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다른 사람이라면 신경 쓰이지 않겠지만.”

용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경백은 한옥금과 품행만 다를 뿐, 다른 점들이 너무 비슷하지 않습니까? 특히 얼굴 말입니다. 보고만 있어도 질투가 난다는 말입니다.”

질투가 난다는 말을 직설적으로 내뱉는 그의 말에 야홍릉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이런 감정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볼품없이 초라해진 사람에게 질투할 게 뭐가 있다고. 그러나 그렇게 신경이 쓰인다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꾸나.”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직은 한경백의 측부 신분이 필요하다.”

용수는 그녀의 태도가 누그러진 것을 발견하고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급할 건 없습니다. 한경백은 지금 배경도, 뭐도 없지 않습니까? 애비의 측부라는 신분마저 사라진다면 세가의 공자들은 그를 더욱 무시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일을 하는 데 불편함도 많겠지요.”

‘말은 예쁘게 잘하네.’

야홍릉은 시선을 매가 전해준 정보로 돌렸다.

“야정연의 행동은 예상과 좀 다르구나.”

이 정보는 신은전 대교습이 보낸 거라 믿을 만한 것이었다.

정보에는 한옥금의 최근 동향을 간단하게 몇 마디 적은 뒤, 4황자 야정연에 대한 얘기를 길게 했다. 야정연은 야소숙이 동제의 황제와 왕래한 증거를 손에 넣은 뒤, 가만히 있지 않고 이 증거를 야모침에게 조용히 노출했다.

용수는 차갑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꾀에 넘어간 셈이지요.”

야정연은 야모침을 끌어들여 황위 싸움을 셋의 싸움으로 만들었다.

그는 야소숙과 단독으로 싸우고 싶지 않아 야모침이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랐으나 야모침의 불같은 성격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야모침이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싸우라고 하지요. 심하게 싸울수록 좋지 않습니까? 그들이 큰 손해를 본 뒤, 애비가 돌아가서 상황을 수습하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용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국의 황제는 왜 지금까지 태자를 책봉하지 않은 겁니까?”

용수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아들들이 태자 자리를 두고 죽일 듯이 싸우는 것을 즐기는 겁니까?”

“아니야.”

야홍릉은 고개를 저었다.

“목국의 역사상 태자가 순조롭게 황위에 오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용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단지 그것뿐입니까?”

목국에는 태자를 먼저 책봉한 선례가 없었다.

이는 그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목국의 역대 태자들은 병으로 죽거나 사고로 죽거나, 또는 황제감이 못 되어 폐위된 적이 있었다.

‘체하는 게 두려워 음식을 못 먹는 셈이 아닌가? 태자를 세워야 다른 황자들이 포기를 할 게 아닌가? 다른 마음을 품더라도 대놓고 나쁜 짓은 못 하겠지. 그런데 이렇게 하는 건 일부러 다른 황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 같은데.’

황자들간의 싸움이 치열해질수록 조정과 세가 역시 권력싸움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종묘사직의 안정에 좋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다른 뾰족한 방법이 있느냐?”

야홍릉이 말했다.

“넌 오늘 바쁘지 않더냐?”

용수는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그동안 바삐 보내서 애비와 시간도 제대로 보내지 못했습니다.”

“용수, 난 성을 나가고 싶다.”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성을 나가고 싶다고?’

용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답답하십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저었다.

“곤륜산 꼭대기로 가는 길이 어떤지 한번 보고 싶구나.”

“…….”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한참 뒤, 용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애비께서 보고 싶으시다면 제가 모시고 가지요. 곤륜산에 가서 좀 걸어도 되고요. 그런데 모레가 중추절인데 중추절을 지나고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풍경을 보러 가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용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른 것은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꿈은 꿈일 뿐, 사실이 아니니까요.”

‘꿈은 꿈일 뿐이라…… 사실이 아니라고?’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길이 얼마나 긴지 보고 싶었다.

사람이 얼마나 큰 의지를 가져야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비굴한 방식으로 그 긴 길을 갈 수 있는지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다.

저녁 무렵.

햇살이 호수에 쏟아지자 금빛이 반짝거렸다. 물보라와 함께 반짝이는 금빛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절경이 따로 없었다.

* * *

중추절은 모두가 다 같이 모이는 명절이었다.

관례대로 황제는 이날 저녁 황족 연회를 열 것이다. 황자와 혈연이 있는 황족 적계만 모아 밥을 먹는 자리였다.

정전에는 탁자가 놓고 황제와 친왕, 황자, 군왕과 세자들이 모여앉아 얘기를 나누고 여인들은 편전에 모이는 연회였다. 예전에는 황후가 손님들을 접대했었다.

그러나 헌원 황제와 함께 나이 든 황후도 쉰이 넘은 다음부터 체력이 달려 후궁의 일에 신경을 끄고 싶었다. 그녀는 대부분 일을 상대적으로 젊고 능력 있는 숙비(淑妃)에게 넘겨주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숙비도 젊은 나이는 아니었다. 궁에 들어온 지 이십 년이 넘었으니 마흔이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데다 잘 가꾼 탓에 서른이 갓 넘은 듯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후궁의 대부분 일을 맡아 하고 있음에도 황후에게 항상 공손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황후가 이제는 일을 보지 않아도 그녀는 전혀 무례하게 굴지 않았다.

황제는 후궁 비빈이 예쁨을 좀 받는다고 윗사람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숙비는 똑똑한 여인이었다. 나이가 많은 그녀는 나이 어린 비빈들처럼 황제에게 사랑받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황제는 대다수 정력을 정무에 쏟아 새로운 사람들을 들일 생각이 크게 없었다.

숙비는 어린 소녀들처럼 황제의 예쁨받지 못한다면 정직하게 살아서 지금의 부귀영화를 유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여전히 꿍꿍이를 꾸미며 질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날이 밝기도 전에 숙비는 곱게 치장하고 황후의 궁으로 갔다. 반 시진 가까이 기다려서야 황후는 일어나 나왔다. 반 시진 동안 숙비는 재촉하지도, 궁인을 보내 보고하지도 않고 조용하게 기다렸을 뿐이었다.

황후는 일어난 뒤, 세수와 양치를 마치고 측근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내전에서 나왔다.

숙비는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오늘 밤 연회에 대해서 신첩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어 황후마마의 생각을 들어보려고 찾아왔습니다.”

황후는 의자에 앉으며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일이 무엇인가?”

“봉왕 전하에 관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황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봉왕이 왜?”

“봉왕이 돌아오실 때 손님을 데려오셨다고 하는데 어여쁜 미소년이라고 합니다.”

숙비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봉왕부에서 보름 동안 있었는데 아직 나온 적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 밤, 그더러 봉왕과 함께 궁에 들어오라고 할지, 아니면 홀로 봉왕부에 남으라고 할지 몰라 여쭈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도 다 모이는 자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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