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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61)화 (16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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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화 여인이 담겨있는 그림

‘잘못 들은 건가?’

시녀들은 깜짝 놀랐다.

‘능 공자가 봉왕 전하더러 꺼지라고 한 건가?’

용수는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네, 지금 바로 꺼지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대전 밖으로 나갔다.

야홍릉은 조용히 아름다운 침대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자신이 왜 한숨을 쉬는지 알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다루어지는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적응되지 않기도 했다.

또 마음속으로 피어오르는 감정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능, 능 공자…….”

정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일어나 씻으시요? 아니면 좀 더 주무실 건가요?”

야홍릉은 입가를 실룩거렸다. 정려의 조심스러운 말투를 느낀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일어날 것이다.”

정려는 그 말을 듣고 대답했다.

“네.”

말을 마친 그녀는 옅은 보라색 문발을 젖히고 금색 갈고리로 문발을 침대 뒤에 고정했다.

이때, 검은색 머리를 폭포처럼 드리운 여인이 침대에서 일어나 앉자 정려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느, 느, 능 공자…….”

혀가 굳은 것처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정려는 멍한 얼굴로 야홍릉을 바라보더니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봉긋 솟은 가슴의 위치를 보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느…… 느, 능, 능… 낭자?”

‘도대체 공자야? 낭자야?’

그러나 눈앞의 광경이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봉왕 전하의 남첩이라고 소문난 능 공자는 여인이었다.

야홍릉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하얀 두 발이 바닥에 닿자 옆에 서 있던 시녀가 바로 무릎을 꿇고 양말을 신겨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발을 받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귀한 발이 차가운 바닥에 닿아 감기에 들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야홍릉은 그들의 조심스러운 행동을 말없이 주시하다 미간을 찌푸렸다. 갑작스럽게 고귀한 존재가 된 것 같아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이럴 것까지는 없다.”

야홍릉은 발을 빼내어 부드러운 탄자 위에 섰다.

“너희들이 보다시피 난 여인이다. 그러니 앞으로 너희 전하가 남첩을 들였다고 생각하지 말거라. 또 봉왕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죽임을 당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

정려는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능 낭자를 다시 훑어보았다.

낮에 남장했을 때에는 머리를 높게 틀어 올리고 몸에 꼭 맞는 장포를 입어서 차가운 귀공자 같았지만, 하얀색 침의를 입고 머리를 내리니 부드러운 분위기가 더해져 여인 같았다. 가슴을 조이는 천도 푼 상태라 눈이 먼 사람도 그녀가 여인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우나 싸늘한 여인.

정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저도 모르게 실망감이 들었다.

‘나 왜 이러지? 정말 전하가 단수이길 바라는 건가?’

다른 시녀들도 놀란 표정을 짓더니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인이면 됐어. 남첩만 아니면 된 거지.’

그들은 능 공자가 여인이라는 비밀을 얘기하지는 않겠으나 적어도 목숨을 잃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다른 것은 능 공자와 봉왕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시녀들은 감히 다른 질문을 하지 못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용수가 돌아왔다.

야홍릉은 화청에 앉아 호수에서 물고기가 노니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애비.”

용수는 화청으로 들어와 야홍릉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저녁 식사는 하셨습니까?”

정려가 대답했다.

“전하께 아룁니다, 공자께서는 아직 식사하시지 않았습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거라. 화청에서 들겠다.”

지시를 내린 용수는 야홍릉의 옆에 앉았다.

“난 애비와 같이 먹겠다.”

야홍릉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용수를 바라보았다.

“궁의 연회에 가는 게 아니냐?”

“연회의 목적이 식사인 것도 아닌데요.”

용수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봉왕인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밥만 먹겠습니까?”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요기를 하고 가려고요.”

용수는 야홍릉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애비, 이곳에 있는 게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저었다.

“불편할 건 없다.”

남성국과 목국은 그저 나라만 다를 뿐이었다.

그녀가 목국에 있을 때, 전쟁터와 군영을 제외하고 공주부에 있을 때도 항상 혼자였다. 그녀는 조용히 뭔가를 생각하기도 하고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기도 했다.

한옥금을 좋아할 때도 그녀는 혼자서 누리는 조용한 분위기가 좋았다.

한옥금을 떠올리자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목국을 떠난 지도 시간이 꽤 되었다. 목국의 수많은 소식은 그녀가 받아볼 수 없었다. 거리가 멀어 영위가 소식을 가져오려고 해도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길에서만 긴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애비, 무슨 생각을 하신 겁니까?”

용수는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미간을 문질렀다.

“고민이 있다면 저에게 말씀하십시오. 이렇게 미간을 찌푸리지 마시고요.”

야홍릉은 그를 흘겨보더니 생각에 잠겼다.

“목국 신은전에서는 매로 소식을 전하냐?”

용수는 그 말을 듣더니 화청에 있던 시녀들을 내보내고 야홍릉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건 아닙니다. 매를 사육하는 게 쉽지 않아 목국 신은전과 남성국 자양전의 매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리가 멀거나 긴급한 사건이 있을 때는 매를 사용합니다.”

말을 마친 그는 야홍릉의 손을 입술로 가져가 입을 맞추었다.

“애비도 매로 서신을 보내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야, 그저 물어본 것뿐이다.”

용수는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애비께서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꼭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야홍릉은 그를 바라보았다.

“신은전과 자양전에는 매가 적으나 제사전에는 적지 않습니다.”

용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에게 서신을 전한 흰색 매도 제사전의 것입니다. 매 중에서도 왕으로 불리는 해동청(海東靑)이지요. 성격이 도도하고 난폭하나 비행 속도가 빨라 서신을 전하는 데는 아주 좋습니다.”

말을 멈춘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애비께서 필요하시다면 녀석들은 모두 애비의 것이지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수는 툭하면 각종 방식으로 고백하고 또 그녀에게 자꾸 선물했다.

야홍릉은 지금 같은 상황에 그의 호의를 공짜로 받지 않겠다며 도도한 척해봐도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따라서 남성국으로 온 것이 이미 그의 마음을 받아주겠다고 한 게 아닐까?’

야홍릉은 난간에 기대 호수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려가 시녀들과 함께 들어와 산해진미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식사를 하라고 말한 뒤에야 야홍릉은 정신을 차렸다.

조용히 식사를 마치자 하늘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다.

용수는 궁으로 들어가 봐야 했다. 떠나기 전, 그는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애비, 별다른 일이 없다면 침전으로 돌아가 쉬십시오. 옆의 서각에는 책이 많으니 관심이 있다면 들어가 보셔도 됩니다.”

“서각은 외부인의 통행이 금지된 곳이다.”

야홍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용수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썹에 입을 맞추었다.

“애비만 원하신다면 이 봉왕부 전체가 애비의 것인데 애비가 들어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용수는 야홍릉이 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진 것을 보고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서서히 마음을 녹이는 방법은 아주 효과적인 것 같았다.

이 방법은 여인들에게…… 아니, 세상 사람들에게 모두 효과가 좋았다. 아무리 차갑고 단호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의 사랑과 보호를 받는 느낌이 싫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이처럼 존중과 믿음으로 쌓아 올린 호감은 그녀에게 편하고 따듯한 느낌만 가져다주지, 골칫거리를 안겨 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부드러워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두 번의 인생을 겪은 용수는 이 사랑을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래서 그의 이번 사랑은 좋은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용수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 그녀를 잃지 않았다면 강경한 성격의 그는 절대 이렇게 완벽하게 야홍릉을 대할 수 없을 것이고 자신을 낮추며 그녀를 되살리려고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야홍릉의 차가운 사람이라서 난폭하고 강경하게 다루거나 도자기처럼 조심스럽게 다루는 방식이 다 적합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강경한 태도로 대한다면 그녀는 더욱 강한 태도로 나올 것이고 결국 좋지 못하게 끝날 것이다.

용수는 그녀의 앞에서 부드럽고 온화하게 굴면서 그녀의 마음을 열려고 했다.

야홍릉도 이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거절할 수 없었다.

헌원용수의 다정함이 그녀의 차가운 마음을 서서히 녹여 그녀는 더 이상 차가운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널따란 서각으로 들어가자 짙은 책 향기가 확 풍겨왔다. 벽에 붙여 놓은 책장을 보니 각종 귀한 책들이 잔뜩 꽂혀 있었다.

야홍릉은 빙 둘러보았다. 가장 위 줄은 병서였다.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진을 치는 법, 기문둔갑 같은 책들이 가득했다. 두 번째 줄은 왕과 제후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대한 책이 많았다. 그리고 강호에서 사라진 무공 비법, 의학 서적, 인문 지리, 기이한 이야기 등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 책상이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책상 위에 그림 한 폭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호기심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보려는 것인지, 야홍릉은 손을 뻗어 그림을 펼쳐 보았다. 순간, 그녀의 시선이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이 그림은 오래전에 그린 것인 듯했는데 아주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림의 장소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먼지바람이 흩날리는 전쟁터였다.

피처럼 빨간 노을 아래에서 천군만마는 그저 배경일 뿐이었다. 그림 중앙에는 빨간 노을을 등진 채, 검은색 옷을 입은 여인이 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싸늘한 눈매에 담긴 살기는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잘 드러났다.

바람이 불어서인지 이마의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그녀의 얼굴은 담담하고 차갑기만 했다.

바로 스물한 살 때의 야홍릉이었다.

전생에 헌원용수가 마지막으로 전쟁터에서 본 그녀의 모습을 기록해 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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