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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60)화 (16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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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마른 하늘의 날벼락

“능 공자, 왜 제 말을 안 듣는 거예요?”

야홍릉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봉비비가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 정말 능 공자를 위해서 이러는 거라고요. 오늘의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 정말 후회할 거예요. 지금 이렇게 봉왕 전하를 따른다면 당분간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겠으나 앞으로는 어떡하려고 그래요? 만약…….”

“능 공자의 앞날을 낭자가 걱정할 건 없지 않소?”

용수는 병풍에 기댄 채, 탑에 앉아 수다스럽게 말을 늘어놓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봉 낭자, 아주 한가한가 보지?”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대와 아만은 고개를 돌리고 왕포를 입은 채, 병풍에 기대선 젊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에 훤칠한 몸.

남자는 아름다웠으나 두 여인에게는 사신처럼 무섭게 보였다.

털썩!

두 시녀는 힘이 풀려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렸다.

아만은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아대는 쓰러질 것처럼 몸을 벌벌 떨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죽을지 생각해 보았다.

‘능지처참당할까? 아니면 몽둥이에 맞아 죽을까?’

봉비비는 두 측근 시녀의 기분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그도 봉왕의 남첩이 아닌지 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남자의 왕포와 금실로 수를 놓은 허리띠를 본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놀란 표정은 빠르게 사라졌고 멍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외전(外殿)과 내전(內殿)의 사람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왜 누구도 봉왕이 왔다고 말하지 않은 거야? 봉왕부의 하인들은 일을 너무 못하는 거 아냐?!’

“봉, 봉왕…….”

그녀는 침을 꼴깍 삼켰다. 용수의 멋진 얼굴에 놀라기도 했고 또 화가 났는지 알 수 없는 그의 표정에 겁을 먹고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저,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용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은 야홍릉의 싸늘한 모습과 아주 닮아 있었다.

“그럼 내가 환청을 들었다는 건가?”

봉비비가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런가 봐요…….”

“정려.”

용수는 봉비비와 쓸데없는 실랑이를 할 생각이 없었다.

“밖으로 내던져.”

정려는 지시를 받았다.

“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봉비비의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봉 낭자, 실례하게 되었습니다.”

“앗, 지금 뭐 하는 것이냐?!”

봉비비는 버둥거리며 몸부림을 쳤다.

“이거 놔라. 얼른 놓거라!”

정려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봉왕의 지시를 따랐다. 그녀는 봉씨 가문의 소저를 들고서 밖으로 걸어갔다. 봉비비가 몸부림치면서 지르는 소리도 점점 작아졌다.

“너희 둘, 안 꺼져?”

용수는 눈을 내리깔고 멍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시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왕부에서 점심 식사라도 하려는 것이냐?”

이 말을 들은 아만은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아대의 팔을 잡고 빠른 속도로 나갔다.

곧 그들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점심 식사? 최후의 한 끼도 아니고. 우리를 죽이지만 않는다면 사흘 동안 굶어도 돼!’

대전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용수는 시선을 들고 말없이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심드렁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희도 능 공자가 내 남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싸늘한 목소리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봉비비를 밖에 내던지고 돌아온 정려는 대전 문턱을 넘자마자 이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 무릎을 털썩 꿇었다.

“아, 아닙니다! 능 공자는 고결하고 도도한데 어찌 나, 남첩 노릇을 하겠습니까?”

‘다시는 능 공자와 전하와 관계에 대해 함부로 생각하지 않을 거야.’

다른 시녀는 그의 질문에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이런 화제는 너무나 민감하고 위험했다.

대답을 조금만 잘못한다면 바로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응, 능 공자는 내 남첩이 아니지.”

용수는 차분한 얼굴로 걸어오며 말했다.

“그 반대니까.”

‘반대라고? 이, 이게 무슨 말이야?’

정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여전히 꼼짝하지 못했다.

“반대라는 게…… 무슨 뜻인지…….”

“내가 능 공자의 남첩이라는 말이다.”

그 말에 털썩 소리와 함께 한 시녀가 기절했다.

털썩, 털썩.

그리고 또 두 명의 시녀가 쓰러졌다.

털썩, 털썩.

대전 안팎에서 이 말을 들은 시녀들은 하나같이 눈을 까뒤집고 쓰러졌다.

여덟 명 모두가 헌원용수의 말을 듣자마자 그대로 쓰러졌다.

정려도 기절하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보, 봉, 봉왕 전하가…… 지금 뭐라고 하신 거지? 능 공자의 남첩은 자신이라고? 하늘이시여, 얼른 벼락을 내리셔서 날 죽여주세요. 이 말이 소문으로 퍼진다면, 아니, 퍼지지 않고 듣기만 해도 죽을죄가 아닌가? 전하께서는 기분이 좋지 않아 우리를 모두 죽이시려는 건가?’

정려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만하거라.”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쌀쌀맞은 눈빛으로 준수한 얼굴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장난 좀 그만하지? 이들을 왜 놀라게 해서는…….”

용수는 걸어와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 말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전 원래 전하의 노리개였지요.”

털썩!

정려도 결국 버티지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대전 안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야홍릉은 언짢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네가 한 짓을 좀 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용수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자의 혼인은 조정 전체와 연루된 큰일이라서 언행에 각별히 조심해야 했다.

말을 할 때나, 행동할 때에 모두 태자다운 체통을 지켜야 했다.

품행이 단정하고 예법을 따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요구였다.

절대 약점을 잡히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었다. 저택에 남첩을 들이는 것은 물론이고 첩실을 들여도 그 첩실의 가문이 깨끗해야 했다.

황족 귀족들 중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러나 남첩을 들인 것은 외부에 꽁꽁 숨겨야 할 비밀이었다. 절대 하인들이 밖에서 떠벌리게 놔두면 안 되는 큰일이기도 했다. 하인들은 주인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하지 않고 도리어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랐다.

아는 게 많을수록 빨리 죽기 때문이었다.

이 이치를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봉왕이 남첩을 들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태자가 다른 사람의 남첩이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런 일은 태자에게 무례를 범하나, 언어적인 도발을 하나, 심지어 황비가 다른 사내와 바람을 피운 일보다 훨씬 심각했다.

황실의 수치로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그들은 봉왕이 장난으로 한 말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런 농담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심장은 강하지 않았다.

이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만하거라.”

용수는 시선을 정려에게 돌렸다.

“정말 이렇게 무능하다면 널 늑대에게 먹이로 주겠다.”

말이 끝나자마자 정려가 벌떡 일어났다.

“전 무능하지 않습니다. 전하, 절 늑대 밥으로 주지 마세요.”

용수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야홍릉에게 시선을 돌렸다.

“애비, 피곤하지 않습니까?”

야홍릉이 물었다.

“그건 왜 물어보는 것이냐?”

“애비와 함께 잠을 자려고 그럽니다.”

이 말을 들은 정려는 또 기절할 뻔했다.

“저들을 모두 깨운 뒤, 물러나거라.”

용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려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제가 저들을 다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용수는 야홍릉을 안아서 내전의 넓고 푹신한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는 팔을 벌려 야홍릉을 품 안에 가두었다.

“애비, 잡시다.”

“…….”

얇다란 문발을 사이 두고 병풍 밖에 서 있던 정려도 할 말을 잃었다.

* * *

승상부의 봉비비가 봉왕부로 갔다가 내쫓긴 일이 또다시 황성 세가에 파다하게 퍼졌다.

조용히 소식을 기다리던 귀족 여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봉왕이 승상부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건가?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단왕에게 밉보이더니 이번에는 승상부라고? 황성의 모든 세가 권신들과 사이가 다 틀어져서야 그만둘 건가? 겨우 남첩 한 명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악물었다.

“요물 같은 남첩!”

그들은 봉비비가 봉왕부의 능 공자 기분을 건드려 봉왕이 화를 냈다고 생각했다.

그들도 봉비비가 능 공자를 빼내려다가 봉왕에게 쫓겨났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이 일이 소문 난다면 태자로서의 네 명성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거다.”

침대에 누운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투는 싸늘하기만 했다.

“황성은 발칵 뒤집힐 거고.”

“그러라고 하지요, 뭐.”

용수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야홍릉의 목덜미에 파묻고 입을 맞추었다.

“애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야홍릉은 신경 쓸 생각이 없었다.

용수가 봉비비를 내던졌을 때면 뒤처리를 할 자신이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신경 쓸 것은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요물’이라는 누명을 쓰고 싶지 않았다.

둘은 침전에서 잠을 자느라 밖에서 떠도는 소문에는 신경 쓰지 못했다.

날이 저물어서야 푹 자고 깨난 야홍릉은 그동안 먼 길을 오느라 누적된 피로가 싹 가신 것을 발견했다.

용수는 일어나서 세수를 했다.

정려는 당직을 서는 네 시녀와 함께 들어와 물을 따르고 용수의 머리를 빗겨주는 등 시중을 들었다.

아침에 일어난 일로 시녀들은 마음을 가다듬긴 했으나 여전히 겁먹은 상태였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말하고 움직이며 봉왕과 능 공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용수는 세수를 마치고 옷을 입은 뒤, 담담하게 말했다.

“난 이만 나갈 테니 너희들은 능 공자를 잘 모시거라. 누구라도 능 공자의 기분을 잡치게 한다면 바로 저택에서 내쫓아도 좋다. 만약 누군가 악의적으로 도발을 한다면 다리를 분질러도 된다.”

말을 마친 그는 정려를 바라보며 말했다.

“들었느냐?”

정려는 공손하게 지시를 받았다.

“네, 알겠습니다.”

시녀들은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 그들은 봉왕이 왜 능 공자를 이토록 애지중지하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한 침대에서 잠을 자는데 그런 사이가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누가 누구의 남첩인지는…… 더 생각할 용기가 없었다.

“제사전에 갔다가 바로 오겠습니다.”

용수는 침대 옆에 한쪽 다리를 꿇고 야홍릉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시녀들의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야홍릉에게 입을 맞추었다.

“저택에서 절 기다리십시오. 감히 누군가 애비의 기분을 잡치게 한다면 얼마든지 죽여도 됩니다. 책임은 제가 질 테니까요.”

야홍릉은 귀찮은 얼굴로 대답했다.

“꺼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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