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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59)화 (1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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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오해하셨네요

야홍릉은 탑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임 어멈의 말을 듣고 심드렁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몇 살이냐?”

임 어멈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열다섯 살입니다.”

“석월 군주와는 사이가 어떠냐?”

임 어멈이 대답했다.

“귀족 소저들은 겉보기엔 모두 사이가 좋습니다. 하지만 사적으로는 어떠한지 저도 잘 모릅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라고 하여라.”

이미 찾아왔는데 내쫓을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용수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는 게 많을 것이다. 야홍릉은 심심하던 차에 용수를 도와 조정 세가의 상황을 파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네.”

임 어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능 공자가 만남을 거절할까 두려웠다.

당장 아침에 석월 군주를 내쫓았는데 승상의 딸까지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 하루 사이에 조정 대신의 여식 두 명과 척을 지는 게 아닌가?

봉왕이 단왕이나 승상보다 신분이 높다고는 하나 너무 많은 사람과 사이가 틀어지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지금 온 낭자는 성격이 어떠냐?”

정려는 시선을 들고 능 공자를 바라보았다.

능 공자가 자신에게 한 질문이라는 것을 확신한 그녀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나 승상은 정직한 대신이고 가풍도 엄격하여 폐하의 신임을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집에서 난 자식이니 엇나가지만 않았다면 봉 낭자도 나쁘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야홍릉은 저도 모르게 정려를 다시 바라보았다.

귀족 소저를 느긋한 말투로 그런 집에서 난 자식이니 엇나가지만 않는다면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평가하는 것을 봐서 정려는 세심한 사람이었다.

덜렁거리는 겉모습과 달리 신중하고 진중한 소녀가 분명했다.

야홍릉은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봉비비가 임 어멈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왔다.

“공자, 봉 낭자가 도착하셨습니다.”

봉비비는 임 어멈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창가에 앉아 있는 소년을 본 그녀는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름다운 공자다.’

경국지색의 외모에 차가운 분위기, 마른 몸매를 가진 소년은 그림에서 나온 사람 같기도 하고 높이 솟은 설산 꼭대기의 차가운 설련 같기도 했다.

‘이런 공자가 정말 남첩일까?’

“봉 낭자, 앉으시지요.”

목소리는 차가웠으나 듣기 좋았다. 그의 얼굴처럼 편한 목소리였다.

봉비비는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임 어멈은 이미 나간 뒤였다.

능 공자는 방금 그녀에게 말을 건 것이었다.

“저, 저는 봉비비라고 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야홍릉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문득 자신이 상대방의 이름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공자, 성은 어떻게 되시나요?”

“능씨입니다.”

“능씨……, 아, 능 공자시군요.”

봉비비는 정신을 차리고 야홍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혹시 봉왕 전하의 일방적인 강요로 이렇게 지내시는 겁니까?”

야홍릉은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요?”

“능 공자와 봉왕의 사이 말입니다.”

봉비비가 입을 열었다.

“밖에서는 능 공자가 봉왕의 남첩이라고 하던데, 스스로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죠?”

말이 끝나자 대전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했다.

정려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봉 낭자, 말씀 가려서 하세요.”

‘남첩은 무슨?’

그녀도 이렇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다.

‘능 공자의 체면의 뭐가 되겠어?’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손가락만 내려다보았다.

“사내가 왜 남의 밑에서 이런 삶을 사는 건가요?”

봉비비는 정려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야홍릉의 맞은편 탑에 앉았다.

“제가 공자를 구해줄게요.”

이 말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두 시녀는 안색이 변한 채로 소리를 질렀다.

“소저!”

‘우리 소저 괜찮은 거 맞지? 이곳은 태자인 봉왕 전하의 저택인데 이렇게 제멋대로 굴어도 되겠어? 봉왕 전하가 화를 내시면 어쩌려고?’

야홍릉은 담담한 시선으로 봉비비를 바라보았다.

열다섯 살 된 소녀는 작은 얼굴에 커다란 눈을 가진 예쁜 소녀였다.

그녀의 하얀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러나 야홍릉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동정과 기대가 담겨 있었다.

야홍릉이 심드렁한 말투로 물었다.

“어떻게 구할 겁니까?”

“……제 정인이 되셔도 되고요.”

봉비비는 머뭇거리다 바로 해명했다.

“물론 진짜가 아니라 명분만 그렇게 만드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전 공자에게 다른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이곳을 탈출시키려는 핑계를 생각해낸 거예요!”

“소저!”

측근 시녀는 소리를 질렀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아대(阿黛), 아무 말도 하지 마.”

봉비비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내가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잖아? 자꾸 말을 끊지 마. 능 공자가 놀라시면 어떡하려고 그래?”

아대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능 공자가 놀란다고? 능 공자는 침착하기만 하는데요!. 놀라서 죽을 사람은 나와 아만(阿蠻)이라고! 이런 소저를 모시다가는 대인과 마님께 맞아 죽거나 소저의 언행에 놀라서 심장병으로 죽거나 둘 중 하나일 거야.’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말없이 잠자코 서 있는 아만을 보았다.

‘그래, 아만도 놀라서 죽지는 않겠지. 놀란 사람은 나밖에 없나 봐.’

아대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소저와 함께 봉왕부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阿蠻… 아니지, 소저가 봉왕부로 오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는데. 소저가 전하의 남첩을 데리고 도망치려는 걸 봉왕 전하가 아시게 된다면 아주아주 화를 내시겠지…….’

봉왕이 화낼 생각을 하자 아대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단왕도 예우하지 않는 봉왕이 시녀인 그녀는 더욱 손쉽게 죽일 것이 아닌가?

야홍릉은 말없이 잠자코 있었다. 봉 낭자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복잡하기만 했다.

물론,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야홍릉뿐만이 아니었다.

정려는 바보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봉비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봉비비가 트집을 잡으러 온 줄로만 알고 있었다.

정려에게서 봉씨 가문의 가풍이 좋다고 들었지만 어린 소녀도 남의 꾐에 넘어가 어리석은 짓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봉 낭자가 설마 바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능 공자, 걱정하지 마세요.”

봉비비는 야홍릉의 표정을 보더니 그녀가 뭔가를 걱정한다고 생각해 다급히 달래 주었다.

“제 아버지는 승상이셔서 권력이 아주 강해요. 봉왕께서 황위에 오른다고 해도 아버지의 힘이 필요할 거예요…… 음, 그건 아니라도 당분간은 봉왕도 제 아버지에게 어찌하지 못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능 공자를 탈출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능 공자가 무사히 지낼 수…….”

정려는 한시름을 놓고 고개를 들고서 동정 어린 시선으로 봉비비 옆에 서 있는 아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묵묵히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 탁자에서 차 두 잔을 따라 가져왔다.

그리고 한 잔은 능 공자의 앞에, 다른 한 잔은 봉비비의 앞에 놓았다.

방금 정려가 자리를 비우지 못한 것은 봉비비가 트집을 잡으러 왔을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멍청할 정도로 단순한 소녀였다.

그러니 안심하고 차를 따르러 간 것이었다.

정려는 찻잔을 내려놓고 대전 안에서 말없이 서 있는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봉 낭자가 능 공자에게 조금이라도 무례를 범한다면 가장 먼저 내던져질 것이야.’

야홍릉은 말이 없었다.

“능 공자.”

봉비비는 노파심에 또 한 번 재촉했다.

그녀는 타락한 능 공자를 구하고 싶어 안달 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내는 큰일을 해야지요. 능력이 없어도 노력하여 남자의 자부감과 존엄을 지켜야죠. 이렇게 다른 남자의 정인으로 사는 건 정말 좋은 선택이 아니에요. 앞으로 큰일을 하게 된다면 지금의 일이 굴욕적으로 느껴지실 거예요. 안 그런가요?”

아대는 봉비비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아만에게 눈치를 주는 게 다였다. 그러나 아만은 그녀의 눈빛을 읽지 못한 건지 목석처럼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와 목석의 다른 점이라면 그녀는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대는 화가 나 그녀의 목을 조이고 싶었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못 들은 것처럼 하다니? 소저가 이러는 것을 두고 보기만 하겠다는 거야?’

“능 공자…….”

대전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야홍릉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세웠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는 용수의 발걸음 소리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능묵이 어영위로 있을 때, 신분이 신분인 만큼 조용히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억을 되찾은 뒤로 그는 일부러 발소리를 죽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이어져 와 버릇이 되었을 텐데도 그는 야홍릉의 옆으로 다가올 때만 되면 일반인처럼 걸었다.

일부러 그녀에게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듯했다.

다만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그의 발걸음 소리를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

“능 공자, 제 제안에 대해 잘 생각해 보세요.”

봉비비는 계속해서 설득하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늘어놓았다.

“오늘 능 공자를 처음 뵈었는데도 이상하게 옛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전 능 공자가 이렇게 압박을 받으며 지내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능 공자는 평범한 사람 같지 않은데 공자만 정신을 차리고 일어선다면…….”

대전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봉비비의 말을 들은 용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꼭 방법을 생각해서 능 공자를 이 고통 속에서 구원할 거예요. 그리고 큰 대가를 치러서라고 공자가 봉왕의 손아귀에서…….”

야홍릉은 입을 실룩거리다 끝내 말했다.

“봉 낭자.”

봉비비는 하던 말을 멈추고 능 공자를 바라보았다.

“공자, 드디어 정하신 거예요?”

“아니요.”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먼저 봉비비의 호의에 감사를 표한 뒤 말을 이었다.

“오해하셨나 보네요. 전 봉왕의 남첩이 아닙니다.”

야홍릉은 봉비비의 열정 어린 설득을 듣고 그녀가 쓸데없는 걱정을 내려놓기를 바라는 마음에 한 말이었다.

‘봉비비는 악의가 없이 좋은 마음으로 한 말이 아닌가? 물론 정신이 좀 나빠 보이지만…… 남성국의 소녀들은 다 이렇게 단순하고 당돌한가? 아니면 상상력이 뛰어난 건가? 아니면 정려와 봉비비만 이런데 마침 나와 마주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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