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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57)화 (158/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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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많은 대화를 해야죠

“저분이…….”

석월은 멍한 얼굴로 용수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부왕, 저분이… 저분이 봉왕 오라버니예요?”

단왕은 이상함을 감지하고 고개를 돌려 석월을 바라보았다.

“예모야?”

석월 군주는 이름이 예모(霓玥)이고 석월은 봉호였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봉왕부의 대문을 바라보더니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전 봉왕 오라버니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

그 말을 들은 단왕은 깜짝 놀랐다.

“너희는 남매다!”

“아버지, 잊으셨어요? 봉왕 오라버니는 성이 헌원씨가 아니에요.”

헌원예모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용씨예요. 오라버니의 어머니는 제 고모시고요. 그래서 저와 오라버니는 사촌 남매이기에 혼인할 수 있어요.”

단왕은 침묵하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금은 헌원 씨이지 않느냐? 같은 성을 가진 남매는 혼인할 수 없단다. 게다가 너희는 황족이지 않더냐?”

“몰라요, 전 봉왕 오라버니가 좋아요.”

단왕이 입을 열려고 하는데 대문 안에서 젊은 남자가 나오더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전하께 알립니다. 두 분이 지금 떠나지 않으신다면 형부의 감옥에 보내겠다고 봉왕 전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에 단왕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봉왕부를 갈아엎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 * *

용수는 동쪽 화원의 화청에서 야홍릉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화청의 의자에 기대앉아 다리를 꼬고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처럼 조용한 모습이었다.

정려는 그녀의 옆에 서 있었고 다른 네 시녀는 화청의 네 귀퉁이에 서 있었다.

탁자에는 따뜻한 차와 신선한 과일 두 접시, 갓 구운 과자가 놓여 있었다.

왕포(王袍)로 갈아입은 용수가 화청에 들어서자 네 시녀는 말없이 무릎을 꿇었다. 정려는 곁눈질로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확인한 뒤, 바로 무릎을 꿇었다.

용수가 손을 가볍게 젓자 정려는 시녀 넷을 데리고 화청을 떠났다.

“애비.”

용수는 의자에 앉으며 야홍릉의 옆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이곳의 풍경이 마음에 드십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왕포를 입어 더욱 고귀해 보이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옷이 꽤 괜찮구나.”

“애비의 마음에 드십니까?”

용수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고는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첫날이라 하인들이 저를 알아보지 못할까 싶어서 입은 것입니다. 이 옷을 입으면 다들 제 신분을 알 것이니 번거로운 일을 덜었지요. 애비의 마음에 든다니 앞으로 매일 이렇게 입겠습니다.”

야홍릉은 그 말을 듣고 침묵에 잠겼다.

“네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모습도 괜찮은데 앞으로 벌거벗고 다니는 것은 어떠냐?”

‘벌거벗고 다닌다고?’

용수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바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애비는 제가 벌거벗고 있는 모습이 좋으셨군요.”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하지요.”

그는 전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애비가 원하기만 한다면 전 벌거벗고 황성을 뛰어다녀도 됩니다.”

야홍릉은 또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벗을까요? 아니면 내일 아침부터 벗고 다닐까요?”

용수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야홍릉은 그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비?”

야홍릉은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지금 벗어라.”

그녀는 용수가 정말 그렇게 뻔뻔스러운지 떠볼 생각이었다.

“네.”

용수는 또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더니 일어서서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애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바로 애비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야홍릉은 말문이 막혔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었다.

정려와 네 시녀가 나간 뒤 화청에는 그들 둘밖에 없었다. 암위가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긴 하나 이런 순간에는 시선을 돌릴 것이다.

누가 감히 옷을 벗은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겠는가?

야홍릉은 용수의 머리가 정상이 아닌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난간에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싸늘한 시선으로 용수를 바라보았다.

용수는 행동을 멈추고 말없이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옷을 벗기 싫어져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문득 계속 그녀와 아웅다웅하다가는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옷매무시를 정돈한 그는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순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애비, 이건 장난을 친 것이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비가 저의 벗은 몸을 좋아한다고 해도 저는 사람들 앞에서 벗지는 않을 것입니다. 밤에 침전에서 애비에게만 보여줄 것입니다.”

용수는 손을 뻗어 야홍릉의 허리를 옆으로 끌어안았다.

“애비, 아직 이곳의 풍경이 마음에 드는지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쁘지 않다.”

“그럼 여기에 좀 오랫동안 머무십시오.”

용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몇 달간 여러 곳을 돌아다니느라 많이 지치셨을 텐데 이곳에서 푹 쉬십시오. 목국의 일은 제가 지켜보겠습니다.”

야홍릉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날 꽁꽁 숨기려는 것이냐?”

용수는 입꼬리를 올렸다.

“만약 가능하다면…….”

“대문도 나가지 말아야 하는 것이냐?”

용수는 멍하니 있다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것은 없습니다.”

“이제 막 돌아왔으니 아직 조정 문무백관의 마음을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지금 세가 귀족들이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지도 말이다.”

야홍릉은 그를 바라보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알았다고 해도 십 년이 지나지 않았느냐?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 않았느냐? 너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꿈에서 본 것들은 전생의 일이었다.

황족의 황자들은 헌원용수의 존재를 받아들였고 다른 야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제사전의 높은 지위 때문일 수도 있고 용수가 너무 뛰어나 그들이 감히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해서일 수도 있었다. 전생의 헌원용수는 순조롭게 제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 생에 조정을 십 년이나 떠나 있었다.

십 년의 세월은 아주 긴 시간이었다. 그 기간에 많은 일이 생겼을 수도 있고 또 많은 변수가 나타났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중해야 했다.

“애비.”

용수는 그녀의 얼굴에 얼굴을 가져다 대며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제가 떠난 시간은 길지만 그 동안 남성국 조정의 동향을 계속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기억을 잃었던 것은 사실이나 기억을 잃기 전에 제 사람들을 붙여 두었습니다. 지금 그들을 불러와 물어본다면 며칠 안에 조정의 모든 변화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제사전은 항상 태자를 지지해 왔다. 묵백은 그동안 용수의 뜻대로 움직였기에 용수가 십 년 동안 남성국을 떠나 있었다 해도 남성국 조정이 그의 통제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야홍릉은 담담하게 말했다.

“패자답긴 하군.”

“애비, 과찬이십니다.”

“여기에 있는 동안 넌 내가 조용히 지내면서 시끄러운 일을 만들지 않기를 바라s,냐, 아니면…….”

용수는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애비가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애비의 일 중에 시끄러운 일은 없습니다.”

“난 지금 진지하게 얘기하는 것이다.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말거라.”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용수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말씀하시지요.”

“네가 걱정하는 게 있어서 조용히 움직이고 싶다면 그렇게 따를 것이다. 그러나 네가 자신이 넘쳐 걱정할 것이 없다면 나의 존재는 네가 조정 대신의 입장을 빨리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용수는 그녀의 말뜻을 생각해 본 뒤, 환하게 웃었다.

“애비, 지금 저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야홍릉은 또 미간을 찌푸렸다.

용수는 그녀의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진지하게 얘기하자면 걱정하지 마시고 애비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 그 말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이 말의 뜻은 아주 분명했다.

그가 잘난 척하는 것도 아니고, 예의상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모든 것을 통제할 자신이 있었다.

십 년 동안 떠나 있어도 이것은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남성국의 황좌는 헌원용수의 것이다.

앞으로 이 황좌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헌원용수일 것이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한 여인이 능수전에서 날 보고 시비를 걸기에 정려더러 그 여인을 밖으로 내던지라고 했다.”

“잘하셨습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했다.

“널 봉왕 오라버니라고 하던데.”

용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단왕의 딸인 듯한데, 전 알지도 못합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누구를 얘기하는지 어떻게 안 것이냐?”

용수가 대답했다.

“제가 돌아왔을 때, 단왕이 사람들을 데리고 씩씩거리며 쳐들어오려는 것을 보았습니다. 딸이 봉왕부에서 서러움을 겪었다나 뭐라나 하면서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리고?’

용수가 대답했다.

“그리고 제가 그들더러 썩 꺼지라고 했습니다.”

야홍릉은 침묵했다.

그녀는 말없이 그를 한참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니 기분이 좋은 듯했다.

“우리가 가끔씩은 비슷할 때가 있구나.”

사람더러 썩 꺼지라고 하는 것 말이다.

“당연하지요.”

용수는 그녀의 허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안 그러면 제가 어떻게 지고지순하게 애비만 바라보겠습니까?”

‘지고지순이라…….’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그를 불렀다.

“능묵.”

“네?”

야홍릉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널 용수라고 불러야겠구나. 이런 생각은 해본 적 없느냐? 나중에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나한테서 네 예상과 다른 모습을 볼 수도 있겠지. 그때가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

‘내가 예상하던 모습?’

용수는 침묵하다가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애비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넌 나를 전쟁터에서만 보았지 않더냐? 나와 대화 한 번 해본 적도 없으면서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판단한 것이냐? 우리가 성격이 맞지 않는 경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느냐?”

야홍릉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없습니다. 그럴 기회도 없었고요.”

용수가 대답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애비와 대화를 많이 해볼 생각입니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저는 깊이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애비의 아름다운 얼굴을 좋아하고 멋진 자태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강한 실력도요.”

용수는 아부를 떨면서 기대 어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문제는 저번에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애비, 혹시 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불안해지실까 봐 그러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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