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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55)화 (156/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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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그 여인은 누구냐

야홍릉과 정려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계단 아래쪽의 회랑에 분홍색 궁장을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화려한 옷차림에 화장까지 곱게 한 그녀는 시녀들과 함께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는 아름다웠으나 이상하게 잔뜩 심통이 난 표정이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야홍릉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소녀는 눈을 반짝이더니 적의로 가득한 표정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정려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러는 그쪽은 누구십니까?”

“무엄하다!”

소녀의 뒤에서 녹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분은 현재 3전하의 따님이신 석월(惜月) 군주시다. 얼른 무릎을 꿇지 않고 뭘 하는 것이냐?”

‘석월 군주?’

정려는 3전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녀의 신분으로 신분이 고귀한 전하들을 만나기 쉽지 않았다.

시녀가 말한 3전하는 황제의 아들인 3황자였다.

‘그렇다면 이 소녀는 남성국 황제의 손녀라는 건데…….’

“화무(花舞), 입 다물어.”

석월은 멍한 표정으로 싸늘한 얼굴의 소년을 바라보며 시녀를 꾸짖었다. 그녀의 시선은 야홍릉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이, 이 공자는…….”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린 채,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려는 흠칫 놀라더니 태도가 순식간에 바뀐 석월을 노려보았다.

석월의 멍한 표정이 능 공자를 처음 본 그녀의 표정과 똑같다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야홍릉은 석월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려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만요.”

석월은 정신을 차렸는지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야홍릉의 앞까지 뛰어왔다.

“당신이…… 오늘 돌아온 봉왕 오라버니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우아하게 예를 올렸다.

“석월이 봉왕 오라버니를 뵙습니다.”

“전 봉왕이 아닙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린 채, 석월을 바라보았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사람을 잘못 봤다고?’

석월은 표정이 살짝 변했다.

“봉왕이 아니라고요?”

“네.”

소녀가 따져 물었다.

“그런데 왜 봉왕의 궁전에 제멋대로 쳐들어온 건데요?”

“군주, 능 공자는 쳐들어온 게 아니라…….”

정려가 입을 열었다.

“봉왕 전하께서 저더러 능 공자를 이쪽으로 모시라고 하셨…….”

“넌 또 뭐야? 시녀 주제에 감히 끼어들어?”

석월이 차가운 눈빛으로 꾸짖었다.

‘무슨 말투가 이래?’

정려는 화를 억누르며 최대한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전 그저 봉왕 전하의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 군주라고 하셨는데 봉왕 전하께서는 군주가 이곳에 오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

“내가 어디로 가든 그건 내 마음이야. 내 행방을 너 같은 시녀에게 보고라도 해야 해?”

석월은 화가 치밀어 소리를 버럭 질렀다.

“화무, 뺨을 때려라!”

‘뺨을 때리라고?’

정려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화무라고 하는 시녀가 ‘네’하고 대답하더니 손을 들고 그녀의 따귀를 치려는 게 아닌가?

정려는 무의식적으로 화무의 손목을 확 잡았다.

“뭐 하는 거야?”

화무는 경악했다.

그녀는 정려가 반항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잡힌 손목에서 통증이 느껴지자 그녀는 버둥거렸다.

“천한 년, 지금 뭐 하는 것이냐? 간이 부었구나. 이거 놓지 못해?”

정려는 그녀를 풀어주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너와 난 신분이 같은데 내가 천한 년이면 넌 뭐야?”

그녀는 무공을 수련한 사람이라 손힘이 강했다.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화무의 새하얀 손목에 손자국이 벌겋게 났다.

정려의 말을 들은 화무는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감히 날 모욕한 거냐?”

정려는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먼저 날 욕했잖아?”

“네가 뭔데? 내가 말 좀 하면 안 돼? 난 군주의 측근 시녀……!”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만하거라!”

야홍릉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썩 꺼져.”

짧은 세 글자에 공기가 얼어붙은 듯했다.

화무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썩 꺼지라니?’

석월의 표정도 굳어졌다.

“뭐, 뭐라고요?”

야홍릉은 그들과 실랑이를 더 할 생각이 없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돌아서서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차가운 뒷모습에 사람들은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정려는 정신을 차리고 따라 들어가며 지시를 내렸다.

“여봐라, 공자께 차를 올리거라.”

석월과 화무는 대전 문밖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겁을 먹은 게 아니라 경악한 것이다.

‘신분도 알 수 없는 둘이 이렇게 당당하게 봉왕 전하의 침전에 들어가다니. 그것도 이렇게 거만한 자세로?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당장 서지 못해!”

석월은 정신을 차리고 따라서 문턱을 넘었다.

그녀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안색까지 퍼레졌다.

“이곳은 봉왕 오라버니의 궁전이야. 누가 너희더러 이곳에 마음대로 들어오라고 했어? 날 보고도 무릎을 꿇기는커녕 예의 없이 말대답이나 하고 말이야. 정말 간이 부었구나!”

말을 마친 그녀는 야홍릉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내가 명한다. 지금 바로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지 않으면 할아버지께 말씀드려 너희의 구족을 멸할 것이다!”

정려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석월의 모습에 표정이 굳었다.

“아니, 사람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거예요?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봉왕 전하께서 능 공자를 모시고 여기서 쉬라고 하셨다고요. 묵백 대제사께서 직접 능 공자를 이곳까지 모셔왔는데. 정 믿지 못하시겠으면 여기서 난리를 칠 게 아니라 묵백 대제사께 여쭤보세요!”

‘난리를 친다고?’

석월의 표정이 대뜸 변하더니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난리를 친다고 했느냐?”

“네, 맞아요.”

정려는 싸늘한 얼굴로 대꾸했다.

“공자께서 쉬셔야 하니 죄송한데 좀 나가주세요.”

석월은 이를 악물고 악을 썼다.

“너, 무엄하구나! 지금 바로…….”

“정려.”

야홍릉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여인들을 내던지거라.”

그 말을 들은 정려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공자님.”

* * *

한편, 근정전에서는 치열한 무력 비무가 끝이 났다. 헌원 황제는 숨을 헐떡이며 책상에 엎드렸다.

측근 총관 강해(姜海)는 조심스럽게 그의 등을 다독이며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리고 차를 따라 황제에게 건네주었다.

“폐하.”

헌원 황제는 헐떡이는 숨을 가라앉힌 뒤에야 그의 손에서 찻잔을 받아 들고 가볍게 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서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건강이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용수는 책상 앞에 서서 혈색이 도는 황제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싸늘하기만 했다.

“저를 속이신 겁니까?”

일흔이 가까운 헌원 황제는 안색이 아주 좋았다.

훤칠하고 마른 몸매에 차가운 얼굴에서는 오랫동안 제왕자리를 지키면서 쌓아온 위엄이 느껴졌다.

의자에 곧게 앉아 있는 그는 전혀 기운이 없어 보이지 않았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는 산처럼 쌓인 상주서에서 하나를 뽑아 말없이 읽었다.

그는 빠른 속도로 쌓여 있는 상주서를 읽었다.

용수의 말을 듣고도 그는 고개를 들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밖에 나가 무릎을 꿇고 있거라.”

용수는 눈썹을 치켜세웠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이냐?”

“들었습니다.”

용수가 대답했다. 그는 옆의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지시에 따를 수 없습니다.”

‘뭐라고?’

헌원 황제는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앞에서 무례를 범하는 손자를 바라보았다.

“감히 성지를 어기겠다는 것이냐?”

용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사내는 함부로 무릎을 꿇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제 무릎은 비쌉니다.”

헌원 황제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내는 함부로 무릎을 꿇지 않는다고?’

그는 수십 년간 황제의 자리에 있었지만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태자였을 때도 부황 앞에서 ‘사내는 함부로 무릎을 꿇지 않는다, 내 무릎은 비싸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허…… 이거 참…….’

헌원 황제는 화가 나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강해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옆에 서 있었다. 식은땀을 닦고 차를 건네주는 것을 제외하면 그는 둘의 대화에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다.

“돌아올 줄도 아는구나. 난 네가 성씨까지 잊은 줄 알았다.”

헌원 황제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빨리 돌아올 생각은 없었습니다.”

용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편찮으시다는 말에 마음이 급해 날아오다시피 했습니다.”

헌원 황제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거짓말을 아주 태연하게 하는구나.’

용수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

헌원 황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용수의 태도에 당황했다.

그는 의아한 얼굴로 용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윤곽을 보니 십 년 전의 그 아이가 틀림없었다. 물론 감히 남성국의 태자 행세를 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방금 비무에서도 그는 전력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용수의 실력이 전보다 더 강해진 것을 발견했다. 용수가 나이 든 그를 배려해 살살하지 않았다면 그는 오늘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용수는 떠날 때, 나이는 어렸으나 온몸으로 차가운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십 년 동안 보지 못했더니 왜 이렇게 달라진 거지? 먼저 사과할 줄도 알고.’

근정전의 공기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십 년 동안 준비한 결과는 어떠하냐?”

“뭘 준비했다는 말씀입니까?”

용수가 담담하게 물었다.

“모르는 척하지 말거라.”

헌원 황제는 표정이 굳어졌다.

“십 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냐?”

용수는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네가 돌아왔으니 난 이만 퇴위해도 되겠지?”

헌원 황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상의하는 말투가 아닌 통보였다.

“팔월 초엿새가 좋은 날이더구나. 네가 황위에 오르면 바로 간택하여…….”

“할아버지.”

용수는 느긋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

“전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헌원 황제는 흠칫 놀랐다.

“뭐라고?”

“전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평생 그녀 한 명만 사랑할 것이고 다른 여인을 맞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용수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앞으로 저의 황후나 비, 아내나 첩실의 자리, 어디든 제 옆에는 그녀 한 명밖에 없을 것입니다.”

헌원 황제는 침묵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용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예전처럼 차분하기만 했다.

“그 여인은 누구냐?”

“아주 대단한 여인입니다. 천하의 황후가 되기에 손색이 없는 여인이지요.”

헌원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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