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당신들은 누굽니까?
모르는 얼굴 둘 중에 그들의 태자가 있는 게 분명했다.
‘얼굴선이 분명하고 키가 더 훤칠한 사람이 봉왕 전하이신 것 같아. 나이를 봐도 적당하고. 태자께서 남성국을 떠나실 때 열 살이었는데 이미 십 년이 지났으니 스무 살 정도 되셨을 테니. 그렇다면 이목구비가 예쁘고 열예닐곱 살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공자는 누구지?’
“하얀색 장포를 입은 사람이 봉왕 전하이실 거야.”
높은 누가 위에서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 남자가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온몸을 감싸는 고귀함이 말해주잖아. 저분이 봉왕이 아니라면 누가 봉왕이겠어?”
“눈썰미가 있군.”
난간에 기대앉은 보라색 옷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그는 손에 하얀색 술잔을 든 채, 아래쪽을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가 크니 제왕의 분위기가 제법 풍기는군. 평범한 사람은 아니야.”
서 있던 남자는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돌렸다.
“전하께서는 봉황 전하의 어릴 때 모습을 기억하고 계시죠?”
“십 년 동안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야.”
회왕(懷王)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웃지 않았다.
“그 아이가 맞아.”
그 아이는 남성국에 오자마자 조정과 백성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 아이는 황제와 대제사가 직접 데리러 가고 남성국에 도착하자마자 태자로 책봉되었다.
조정의 사람들은 단호한 황제의 결정에 당황했다. 이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귀족 세가들은 모두 지지하는 황자가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아이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들은 황제를 찾아가 잘 생각해 보기를 간청하기도 했다.
당시 황제는 신하들의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그들더러 스스로 헌원용수가 제왕이 될 자격이 있는지 판단하라고 했다.
다음 날, 그 아이가 조정에 나타났다. 조각한 것 같은 아름다운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는 자신을 훑어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한마디했다.
“문은 나라를 다스릴 수 있고 무는 나라를 지킬 수 있습니다. 저한테 불만이 있는 자는 언제든지 덤비십시오.”
나이 든 신하들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패기가 넘치는 용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나이 든 신하들은 오랫동안 벼슬자리에 몸을 담그고 있었기에 속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젊은 신하들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이렇게 거만한 사람이 제왕의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용수는 사실 쓸데없는 말을 하여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을 뿐이었다.
이 말에 갓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온 귀족 공자들은 연이어 나서서 언쟁을 벌였다.
열 살 된 용수는 기가 죽지도 않고, 겁을 먹지도 않은 채, 담담하고 차분하게 자신에게 문제를 거는 귀족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도리어 가끔씩 날카로운 질문을 하여 과거 급제한 사람의 말문이 막히게 하기도 했다.
고성이 오가지는 않으나 치열한 문학 지식의 겨룸이 끝났다.
사람들은 용수의 학문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깜짝 놀랐다.
조정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은 수차례 용수의 질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용수는 나이가 어리나 기세로는 전혀 뒤지지 않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아이가 대전에 들어와서 언쟁이 끝나기까지 차분하고 담담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목소리도 전혀 커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침착한 자세에 두려움을 느꼈다.
아이에게서 오랫동안 집권한 자의 위압감이 풍기자 대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느낌은 아주 이상했다. 그런데 왜 그런 위압감이 풍기는지는 아무도 명확히 알지 못했다.
조정에는 문관과 귀족들을 제외하고도 군영의 무장 역시 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용수는 스스로 ‘문은 나라를 다스릴 수 있고 무는 나라를 지킬 수 있다’라고 했으니 무공 실력도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게 연무장에서 내로라하는 무장들이 모두 용수에게 패배한 뒤, 조정의 문관과 무장들은 말을 한마디도 못 했다.
문무 모두 뛰어난 이 아이가 아주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실력을 본 적이 없었다.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 중에서도 그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사람들은 반응이 확 달라졌다.
문관과 무장, 각 귀족 세가들은 모두 하루 사이에 용수를 태자로 받아들였다.
성인이 된 몇몇 황자들은 속으로 언짢았으나 상황을 파악할 줄 알았다.
대신들이 그렇게 빨리 받아들인 이유는 헌원용수가 아주 뛰어난 데다 황제와 제사전의 전력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가와 귀족들도 그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이가 어린 태자 앞에서 그들은 모두 평등하고 그 누구도 특별한 우세를 차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열 살 된 봉왕 전하가 이제 막 빛을 발하기 시작해 앞으로는 더욱 눈부실 일만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실력으로 남성국의 신하와 백성들을 탄복시킨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감쪽같이 사라져서 제사전을 제외한 곳에서는 그의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십 년 전의 일을 떠올린 회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직접 묵백과 헌원창이 봉왕 전하를 모시고 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그는 봉왕이 이미 죽었을 거라고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봉왕은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고귀하고 침착했다.
멀리서 보았을 뿐인데도 온몸에서 풍기는 제왕의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옆에 있는 소년은 누굴까요?”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시선을 용수와 나란히 길을 가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에 돌렸다.
“나이가 많지 않은 것 같은데 분위기가 강하군요.”
회왕도 시선을 야홍릉에게 돌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9황자의 흑의 기예병이 직접 가서 봉왕 전하를 모셔왔다…….”
남자는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물었다.
“전하, 봉왕 전하에 대한 9황자는 어떤 태도인 것 같습니까?”
‘어떤 태도?’
회왕은 말없이 술을 마신 뒤,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십 년 동안 한 우물을 팠어. 흑의 기예병의 존재 자체가 봉왕 전하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함인데 무슨 태도일 것 같으냐?”
그 말을 들은 남자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9황자는 봉왕의 사람이라는 말씀입니까?”
9황자 헌원창은 군영에 들어간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출신이 낮아 아직도 왕으로 책봉되지 못했다. 그의 나이에 왕으로 책봉되지 못한 경우는 조정에서도 드문 사례였다.
오천 명의 기예병은 황궁의 방향으로 걸어가며 그들의 시야에서 천천히 사라졌다.
회왕은 시선을 거두고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이 전하의 복귀에 놀란 황자가 여럿 될 거야. 앞으로 응경도 떠들썩해지겠구먼.”
남자의 눈빛이 더 어두워졌다.
신이 선택한 제왕이라는 태자에 감히 손댈 수 있는 황자는 없었다.
그러나 사실 황자들은 태자가 밖에서 죽어버렸기를 바랐다. 무슨 이유로 죽었든, 그저 돌아오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늘은 그들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십 년 뒤, 태자는 무사히 돌아왔다.
오랫동안 평온했던 남성국은 태자의 복귀로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평화로운 적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
* * *
봉왕은 헌원창과 함께 궁으로 들어갔다.
오천 명의 기예병들은 두 장군이 연무장으로 데려갔고 야홍릉은 묵백을 따라 봉왕부에 들어갔다. 정려는 야홍릉의 뒤를 바짝 따라서 왕부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봉왕의 침전이고 옆방은 서각입니다.”
묵백은 커다란 정원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능 공자, 먼저 좀 쉬십시오. 봉왕이 돌아오면 거처를 다시 마련해 드릴 겁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고서 편액의 글자를 바라보았다.
능수전(綾修殿).
그녀는 마음이 복잡했다.
“봉왕 전하의 침전 이름이 왜 이렇게 이상하지?”
정려도 이 점을 발견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용등龍騰), 봉명(鳳鳴), 능소(淩霄)처럼 멋진 이름이 얼마나 많은데?”
그 말을 들은 묵백이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전하께 직접 물어보지 그러냐?”
정려는 표정이 대뜸 변하더니 바로 입을 다물었다.
‘전하께 직접 물어보라고? 난 젊은 나이에 죽고 싶지 않아.’
대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양쪽에는 시녀들이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야홍릉도 주변의 환경을 조용히 둘러보았다.
왕부는 아주 컸고 식물도 많았다. 곳곳이 밝고 환했으며 정자, 누각, 다리, 인조 산, 호수 등 없는 것이 없었다. 왕부는 아름답고 조용하나 전혀 화려하지 않았다.
용수가 떠난 지 십 년이 지났지만 왕부는 여전히 주인이 떠났을 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돌아올 주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저택의 하인들도 매일같이 왕부를 성심껏 가꾸었다.
고요한 공기 중에서도 고귀함이 느껴졌다.
“전 제사전에 가보아야겠습니다.”
묵백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능 공자, 먼저 왕부에서 둘러보시길 바랍니다. 봉왕이 곧 돌아오실 것입니다. 참, 왕부의 화원에는 각종 비싼 꽃들이 많으니 능 공자의 마음에도 들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말을 덧붙였다.
“능수전의 시녀들은 모두 궁의 내관 총관이 고르고 골라 보낸 궁녀로 아주 야무지고 영리합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저들에게 지시를 내리시면 될 것입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시선을 거둔 뒤, 돌계단을 올랐다.
정려는 몰래 혀를 홀랑 내밀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이 능 공자가 성질이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묵백 대제사를 대한 태도도 심드렁한데 도대체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일까?’
그동안 함께 먼 길을 걸으면서 그녀는 봉왕 전하와 이 공자의 사이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도 같이 먹고 목욕도 같이하며 때로는 잠도 함께 잤다.
정려는 이 아름다운 공자가 봉왕 전하의 남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공자는 얼굴만 아름다울 뿐, 성격이 부드럽거나 순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남첩으로서 갖춰야 할 특이한 점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를 대하는 봉왕 전하가 더 부드러운 태도였다. 정려는 둘이 도대체 무슨 사이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민감하여 그녀는 아무리 궁금해도 먼저 물어볼 수 없었다.
그들이 대전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적의에 찬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너희는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