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궁상을 떨다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다가 조심스럽게 야홍릉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사죄하기 시작했다.
“난 다른 마음을 품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부디 잘 헤아려 주십시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여인들은 애비의 발가락에도 못 미칩니다.”
능묵은 그녀의 이마와 코에 입을 맞춘 뒤, 그녀의 몸 위에 엎드렸다.
“전 평생 애비 한 사람만 사랑하겠습니다.”
야홍릉은 그를 밀치며 말했다.
“아직 목욕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에 목욕해도 됩니다.”
능묵은 말을 마친 뒤, 그녀의 귀에 입을 맞추었다.
“그럼 남편인 제가 애비를 도와 목욕을 하지요.”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까지 이럴 것이냐?”
순간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시녀들이 오가는 발걸음 소리를 듣더니 외부인 앞에서 아무 말이나 하다가 야홍릉의 화를 돋울까 걱정되어 야홍릉을 탑 위로 끌어올리며 말했다.
“밥 먹으러 가시죠.”
야홍릉은 그를 거들떠보지 않고 일어서서 세수하러 갔다.
정려는 시녀들과 함께 음식을 탁자 위에 준비해 두었다.
그녀가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봉왕이 걸어 나오며 손을 휘젓는 게 보였다.
“다 내려가 보아라.”
정려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시녀들과 함께 공손한 자세로 물러났다.
능묵은 풍성한 상차림을 보다가 문득 목국 공주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야홍릉을 바라보며 한탄 섞인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공주부에서 애비가 저더러 처음 앉아서 밥을 먹으라고 할 때가 생각납니다. 불과 몇 달 전의 일인데 몇 년이 지난 것 같습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녀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잃은 영위는 항상 불안해했다. 따뜻한 음식은 먹은 뒤에는 통증을 견딜 수 없는 위경련을 일으켰다. 대교습이 능묵의 신분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해도 신은전에 있는 동안, 능묵은 다른 영위들보다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툭하면 무릎을 꿇고 위가 좋지 않은 것, 그리고 항상 대들보다 침전의 구석에 몸을 숨기며 밤에도 잠을 옅게 자는 것만 봐도 그의 고된 신은전 생활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부귀영화와 존엄을 모두 내던졌다.
야홍릉 마음속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능묵은 손을 야홍릉의 허리에 올려놓고 그녀 머리에 턱을 올려놓았다.
“애비는 차가운 사람이지만 한낱 영위의 생사를 걱정하고 직접 그를 침대에 눕힌 뒤, 의원을 부르시는 따뜻한 사람입니다. 기억을 잃어 감정이 사라진 차가운 영위는 그때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주인님이 너무나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불안하다는 마음밖에요. 언젠가 이 따스함이 사라지면 얼마나 힘들까 하고요.”
그는 낮은 목소리로 웃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또 이런 부드러움을 기대했습니다.”
야홍릉은 한참 침묵을 지킨 뒤,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궁상떨고 있을 테냐? 식사는 안 할 생각이더냐?”
그 말에 능묵은 애틋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웃은 뒤, 말했다.
“드시죠.”
말을 마친 그는 야홍릉의 손을 잡고 식탁 옆에 앉았다.
그는 야홍릉이 싸늘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그와 함께 감성에 젖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무심코 한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줄 때가 있는 법이다.
능묵은 만약 그가 기억을 되찾지 못하고 여전히 어영위의 신분으로 살아가더라도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분이 낮으니 감히 티는 내지 못했을 것이다.
조용하게 식사를 마친 뒤, 능묵은 직접 야홍릉의 목욕 시중을 들었다.
밖의 일은 묵백과 헌원창이 알아서 하게 맡긴 뒤, 그는 야홍릉과 함께 잠을 청했다.
이런 행위에 정려가 또 어떻게 상상의 나래를 펼칠지 그는 관심이 없었다.
정려는 겉보기엔 눈치 없고 조심성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영리하고 할 말, 못 할 말을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정려를 야홍릉의 옆에 두었다는 것은 그가 정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들은 하룻밤을 묵은 뒤, 저녁 무렵에 길을 떠나게 되었다. 낮과 다른 점이라면 마차에서 말로 이동 수단을 바꾼 것이었다.
청색 옷을 입은 야홍릉은 깔끔하게 말에 오른 뒤, 허리를 쭉 폈다. 그리고 익숙하게 말고삐를 움켜쥐고 말을 이끄는 모습에 헌원창도 시선이 갔다.
보름이 지나서야 돌아가는 길이 평온해졌다. 강해 보이는 병사들이 옆을 지키고 있으니 아무리 간 큰 사람이라도 감히 다가와 시비를 걸지 못했다. 그렇게 그들은 칠월 말에 무사히 남성국에 도착했다. 날씨는 너무 덥지 않았는데 아침저녁으로 시원하고 점심에만 여름다운 무더위를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남성국을 신비롭고 강한 나라로 알고 있었다.
제사전이 존재로 그들은 신을 섬기며 평화를 추구했다. 군왕은 엄하고 자애로운 통치를 병행했기에 백성들의 삶은 안전하고 부유했다. 또 문무가 모두 발전한데다 국고가 부유하여 남성국을 건드리는 나라는 없었다. 심지어 다른 나라의 첩자들도 남성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에 세상 사람들이 남성국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러나 사실 남성국도 그저 나라일 뿐이었다.
군왕은 사람이며, 백성들 또한 일반인이었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신비롭고 고결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다른 나라보다 좀 더 강할 뿐이고 백성들이 좀 더 부유할 뿐이었다.
평화로운 원인은……
남성국 사람들이 존경하고 성심껏 모시는 제사전에는 규정이 있었다. 남성국에서는 정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제왕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신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신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신하와 백성의 인정을 받지 못하며 병사들의 인정도 받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남성국에 오랫동안 내전이 없었던 원인이었다.
그러나 제사전은 사람의 인성까지 제약할 수는 없었다. 명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욕망까지 없앨 수 없었다.
만약 남성국을 신이 사는 곳처럼 걱정 없고 행복하기만 한 곳이라고 상상한다면.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웅장한 제경의 성문이 눈앞에 펼쳐졌다. 황성을 모두 감싸고 있는 성벽은 호원처럼 늠름한 자세로 수백 년 동안 이 땅을 단단히 지켜왔다.
헌원용수는 성문 앞에 서서 커다란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그리운 것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도 맞았다. 예전의 기억이 아득하게 느껴지며 이번 생의 기억과 겹쳐서 떠올랐다.
“오랜만에 오는 건데 마음이 이상하지 않아?”
묵백이 시선을 돌리고 헌원용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우리가 이 시간에 도착해서 다행이야. 백성들이 아직 대부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 안 그러면 지나갈 자리가 없게 몰려들었을 거야.”
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아직 어슴푸레했다. 새벽이 지나면 황성은 다시 깨어나 떠들썩한 하루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용수는 평온한 시선으로 성벽을 힐끗 보더니 야홍릉에게 시선을 돌렸다.
“애비, 힘들지 않습니까?”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애비’의 호칭에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이런 곳에서까지 이렇게 부르다니……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생각이지?’
용수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황성으로 들어간 뒤에는 각별히 조심할 것이니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뒤에 있던 헌원창과 병사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들은 남성국으로 오는 동안 계속 이런 모습을 보았기에 진작 익숙해졌다. 그리고 ‘애비’라는 자에 대해서도 헌원창처럼 눈치 빠른 사람은 일찍부터 뭔가를 눈치챘지만 그는 용수의 사생활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어떤 일은 속으로 알고 있으면 되었다. 굳이 동네방네 떠들 필요가 없었다.
흑의 기예병들은 모두 진정한 사내이지 수다스러운 아줌마가 아니었다. 그들은 태자의 사생활을 밖에 떠벌릴 리 없었다. 오히려 태자가 그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것을 자신들에 대한 믿음과 인정으로 받아들였다.
군신 사이의 믿음과 충성은 굳이 말로 할 필요 없이 작은 일에서 보이는 법이었다.
성문이 열리자 어림군이 양쪽에 서서 그를 맞이했다.
헌원용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입성한다.”
기예병들은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내주었다.
응경(雍京) 외곽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태자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크게 퍼지지 않은 데다 일반 백성들은 소식에 훤하지 않아서 길거리가 썰렁하기만 했다.
그래서 대군이 성으로 들어가기에는 아주 좋은 상태였다. 간혹 일찍 일하러 나선 백성도 있었지만 말발굽 소리에 신속히 양옆으로 물러서 대군이 지나갈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귀족 세가들이 모여 있는 신무문(神武門)에 들어서자 상황은 달라졌다.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길 양옆의 주루, 찻집, 의관(醫館), 여인숙 등 자리가 있는 곳이라면 사람이 꽉 찼다.
창가 옆의 자리는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자리가 없는 사람은 건물의 대들보 위에, 지붕 위에 서 있었다. 그 광경은 아주 북적거렸다.
십 년이나 소식이 없었던 태자가 오늘 돌아온다는 소식을 귀족 세가에서는 각종 경로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얼마 뒤면 대세가의 운명을 결정 지을 태자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자가 남성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만큼 큰일이었다.
태자가 어떤지 미리 보고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 혹시 모를 위험 요소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정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은 신하들이 마음속으로 저울질하고 있을 때, 귀족 소저들은 태자의 얼굴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황실 가문과 세가의 정치적 혼인은 관례이기 때문이다.
황후와 네 명의 비 모두 귀족 가문에서 나올 것이다. 품급이 낮은 재인(才人), 미인(美人) 같은 사람들은 가문에 대한 요구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미모와 재주를 겸비한 세가 소저들은 당연히 미래의 부군이 될지도 모르는 용수가 보고 싶었다.
궁에서 수천 명의 금군을 파견해 길을 지켰다. 길 양쪽에는 금군이 쭉 늘어서 있었는데 열 걸음에 한 명씩 서 있는 광경은 제법 웅장했다.
미세한 말발굽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선두에 선 흑의 기예병이 웅장한 기세로 먼저 도착했다. 떠들썩하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밀물처럼 몰려오는 흑의 기예병 뒤에서 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말을 탄 젊은 남자들은 모두 잘생긴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눈 호강을 하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귀족들은 대다수 9황자 헌원창을 알고 있었다. 우아하고 귀티 나는 묵백 대제사 역시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는 긴 시간 동안 봉왕을 돕느라 남성국을 떠나 있었다.
그러나 묵백과 헌원창을 제외하고도 아주 잘생긴 공자 두 명이 더 있었다. 사람들은 용수와 야홍릉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누가 봉왕 전하인지 추측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