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아름다우시네요
“좀 조용히 하거라.”
야홍릉은 그를 흘겨보며 싸늘하게 그러나 화가 난 흔적은 없었다.
“태자답지 못하게 뭐 하는 짓이냐?”
능묵은 입을 삐죽 내밀고 야홍릉의 다리 옆에 앉아 그녀의 허벅지와 종아리를 주무르다 어깨를 주무르며 눈치 보기 바빴다.
그가 태자답지 못하다고 했는가?
외부인의 앞에서는 태자답게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일부러 태자로 보이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는 부드럽고 다정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애비가 하는 말은 다 맞으니 그는 야홍릉의 말을 들을 생각이었다.
말을 타고 있던 헌원창은 아까 보았던 용수의 무시무시한 실력과 그를 감싼 날카로운 분위기가 떠올라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태자답게 보이려고 애쓸 필요는 없었다.
그의 실력을 직접 본 사람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고 아직 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도 언젠가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밤이 어두워졌다. 말발굽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마차 안에는 야명주가 있어 야홍릉은 조용히 책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날이 밝으면 우리도 말을 타고 가자꾸나.”
그녀는 연약한 아가씨가 아니었다.
마차로 가만 속도가 늦어질 뿐만 아니라 답답하기도 했다.
“네, 알겠습니다.”
능묵은 고개를 끄덕이고 순종적인 자세로 말했다.
“애비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야홍릉은 그를 힐끗 보더니 물었다.
“나가서 이야기해 보지 않겠느냐?”
‘얘기를 하라고?’
능묵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누구와 이야기하라는 말씀입니까?”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
능묵은 그제야 야홍릉의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 애비의 곁을 지켜야지, 그와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습니다.”
야홍릉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감동받은 얼굴이 아니었다.
감동은 진작 다 받았다. 그 어떤 말도 그날에 본 꿈보다 강렬한 충격을 안길 수 없었다. 말에 담긴 힘은 꿈보다 약해 그녀를 놀라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은 어떤 일에 익숙해지다가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일을 받아들이는 법이다.
야홍릉만 해도 그랬다. 능묵의 기억이 돌아오고 그 꿈을 꾼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의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느꼈다.
동제에서 봉씨 가문, 봉씨 가문에서 남성국으로 가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줄곧 능묵에게 끌려간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보다 이 며칠 동안 그녀가 느낀 감정적 변화는 특히 컸다.
교활한 능묵은 각종 방법을 이용해 그녀의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그녀를 정상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녀는 지금 귀찮을 때는 짜증을 내고 그가 아름다운 얼굴로 유혹할 때는 설레기도 했다. 그가 입을 맞출 때에도 썩 싫지가 않았다.
그리고 수많은 버릇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애비.”
능묵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의미심장한 느낌이 들어 있었다.
“책을 읽고 계시는 겁니까? 아니면 다른 데 정신이 팔린 겁니까?”
능묵이 순진한 얼굴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전 애비가 심심할까 걱정되어 얘기를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얘기를 나누겠다고?’
그녀는 능묵에게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성국에 어기면 안 되는 규정은 없느냐?”
그녀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양가 규수들이 지켜야 하는 삼종사덕 같은 것은 됐고 중요한 금기 사항 같은 것이 있다면 말해 보아라.”
나라마다 풍습이 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예의범절 같은 것은 비슷하여 특별히 주의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원래도 작은 일에 집착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남성국은 신을 믿는 나라이기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금기 사항이거나 규정이 있을 수 있었다.
다른 나라에 갔으니 그곳의 예의범절과 규정에 따라야 하는 법이다. 야홍릉은 이런 것을 소홀히 넘기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옆에 있는 사람은 남성국의 태자였다. 그를 봐서라도 그녀는 타협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남성국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남성국에서 며칠 있은 뒤, 기천성의 마장으로 갈지, 아니면 다른 곳에 갈지 생각을 해보았다.
“특별한 금기 사항은 없습니다.”
능묵은 생각을 해보다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제사전에서는 절대 황제가 될 사람이 사내를 좋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야홍릉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화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애비, 화 푸십시오. 농담을 한 것입니다.”
능묵은 앞으로 다가가며 그녀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애비가 사내도 아니고, 금기 사항을 어길 일은 없습니다.”
야홍릉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그의 말에 면박을 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내든, 여인이든 다 좋다며?”
능묵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맞습니다. 애비가 사내든, 여인이든 다 좋습니다. 애비가 정말 사내라면 제가 황제를 안 하면 될 것 아닙니까?”
제사전은 황제가 아닌 사람까지 관리하지는 못할 것이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전 애비의 노리개가 되어 애비가 절 먹여 살리도록 할 것입니다.”
능묵은 그녀의 다리에 머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야홍릉이 황제가 되면 목국 전체가 그녀의 것인데 노리개 한 명 못 먹여 살리겠는가?
야홍릉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럼 단수의 사랑을 진하게 해볼까?”
“어? 좋을 것 같습니다. 역시 애비십니다.”
능묵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야홍릉은 발을 들어 그를 걷어차며 말했다.
“썩 꺼져라.”
능묵은 웃으며 그녀의 몸에 엎드린 채, 일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야홍릉은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 문득 전생에 그가 고통에 울부짖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몇 번이나 피를 토하며 울부짖었다. 마치 살아가야 하는 희망을 모조리 잃은 것처럼……
그런데 지금 그 사람이 밝은 얼굴로 그의 앞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우아한 얼굴에는 환한 빛이 감돌았으며 시선에는 기쁨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서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꼬아 보았다.
* * *
날이 밝기 전에 차가 임주(臨州)에 도착했다. 그곳은 외딴 외곽 별궁이라 사람이 적어서 기예병 무리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큰 소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각국의 첩자들이 많은 곳이기도 했다.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많은 병사가 나타났으니 각 나라의 조정에서는 놀랄 만했다.
그리고 다들 신비로운 남성국의 태자에게 강렬한 호기심을 드러낼 것이다.
물론 이건 모두 나중에 벌어질 일이기에 능묵과 야홍릉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별궁은 아주 커서 오천 명의 병사들을 들이기에 넉넉했다. 헌원창은 흑의 병사들의 거처를 마련해 준 뒤, 보고하러 왔다. 이때, 용수와 묵백의 대화가 들려왔다.
“정려(丁黎)가 이곳에 있습니까?”
묵백은 의자에 기대어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불러주십시오.”
묵백이 시선을 들며 물었다.
“그녀는 왜?”
용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내리깐 채, 차를 마셨다.
태연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는 그에게서 무시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마차 안에서 비굴하게 굴던 남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가 말을 하지 않자 묵백도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돌려 지시를 내렸다.
“정려에게 왔다 가라고 하거라.”
주청에 있던 시녀는 무릎을 굽힌 뒤, 바로 말을 전하러 나갔다.
이때, 헌원창이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색 옷을 입은 그는 산처럼 단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황숙, 수고하셨습니다.”
용수가 시선을 들고 담담하게 말했다.
“흑의 기예병들이 아주 훌륭하더군요.”
헌원창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황송합니다.”
그가 군영으로 들어간 첫해에 묵백이 말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태자에게 쓰일 강한 군사를 훈련시키라고 한 것은 용수의 뜻이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헌원창은 그의 말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의심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군영에 들어가는 것이 궁이나 왕부에 평생 갇혀 지내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었다.
군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진정한 사내들이기에 음모 술수가 많지 않았다.
그는 이제서야 비로소 묵백의 말을 믿었다.
정려는 하인이자 이곳의 집사 시녀였다. 그녀는 무공이 좀 강하고 신분이 일반 시녀보다 높은 것을 제외하면 별로 특별한 게 없었다.
태자가 그녀의 이름을 직접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헌원창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과묵하긴 하지만 절대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헌원용수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그는 헌원용수에게서 수많은 모습을 보았다.
직접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마차 안에 남장한 여인과 헌원용수 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로 위엄이 넘치는 헌원용수가 주인 앞에 선 애완동물처럼 애교를 부렸다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첫인상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곤 한다.
그러나 그 첫인상이 잘못된 경우도 더러 있었다.
어제 점심에 헌원용수가 어영위들과 대결하는 모습을 헌원창은 직접 보지 못했지만 부하에게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헌원용수가 홀로 자양전 출신의 영위 수십 명을 상대해 이겼다고 했다.
자양전 대교습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창피하여 스스로 혀를 깨물 것이다.
‘그럼 헌원용수는 남성국을 떠난 십 년 동안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지?’
어젯밤 그가 진법을 친 것은 헌원용수의 실력을 떠보려는 의도가 있었다. 만약 태자의 실력이 너무 약하거나 또는 무공만 강할 뿐, 다른 능력이 없다면 그는 그저 영위 정도만 굴복시킬 수 있을 뿐이지 흑의 기예병들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헌원창과 흑의 기예병들이 태자의 지시에 따른다고 해도 흔쾌히 충성을 바칠 정도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헌원용수는 진법을 잘 다룰 줄 알 뿐만 아니라 앞이 안 보이는 안개 속에서도 그를 제압했다. 이는 실력이 뛰어나다는 말로 표현하기 부족한 정도였다.
진법을 잘 다룬다는 것은 병사들을 이끌고 진법을 잘 칠 수도 있다는 말이었고 전쟁을 잘 거느릴 수 있다는 말이었다. 무공 실력도 강하고 병사들을 이끌 수 있으며 병법에도 강한 태자라면 충분히 훌륭한 황제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묵백 대제사.”
문밖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검은색 무복(武服)을 입은 소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상석에 앉아 있는 청년을 보더니 놀란 얼굴로 감탄했다.
“아름다우시네요!”
묵백은 입가를 실룩이다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례를 범하지 말거라. 이분은 봉왕 전하이시다.”
‘봉왕 전하라고?’
소녀는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