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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50)화 (15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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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일부러 그런게 아닙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헌원용수는 눈을 감고 미세한 소리를 분간했다.

순간, 그의 귀가 움찔하더니 몸을 날려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야홍릉은 여전히 창가에 조용히 서 있었다.

방안은 불빛으로 환했으나 창밖은 어둠이 짙게 내려 불안한 기운이 들었다.

그녀는 찻잔을 움켜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길고 가는 손가락이 보였다.

몇 달이나 전쟁터와 군영에 가지 않아 손바닥의 굳은살도 많이 흐려졌다. 얼핏 보면 곱게 자란 아가씨의 손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무더운 여름날 밤에 한기를 느꼈던 것이다.

구궁팔괘진(九宮八卦陣)은 그녀도 연구한 적이 있으나 사람마다 진법에 대한 깨달음이 달라 만들어낸 진법의 살상력도 달랐다.

헌원창은 이 진법을 칠 줄 알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깨닫고 능수능란하게 다루었다. 게다가 진을 친 그의 부하들도 뛰어난 장군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만들어낸 진법은 아주 무시무시했다.

전쟁터에 진법을 칠 때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지만 이곳에서 진법을 친 것은 헌원용수를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야홍릉은 숨을 들이쉬었다.

‘괜찮겠지?’

만약 이것이 그가 헌원창을 굴복시키는 데 꼭 필요한 관문이라면 그녀는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헌원창도 태자를 사지로 몰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지 않겠는가?

창밖에 드리운 시커먼 안개를 보면서 야홍릉은 조금씩 걱정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찻잔을 입에 가져가 식어서 쓰게 느껴지는 차를 마셨다.

바로 이때, 그녀는 구름 사이로 미풍이 불어오더니 한 사람의 윤곽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하얀색 장포를 입은 묵백은 회랑의 기둥에 기댄 채, 느긋한 자세로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개가 걷히자 불빛이 점차 또렷하게 보였다. 정원 안은 다시 환한 상태로 돌아왔다.

검은 옷차림의 장군들이 이인 일조로 나뉘어 여덟 개 문의 방향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진법이 쳐진 중앙에서 잘생긴 얼굴의 훤칠한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살기가 흐르는 차가운 눈빛으로 비수를 든 채, 헌원창의 목을 겨누었다.

그는 소리 없이 순식간에 헌원창의 목숨을 손에 쥐었던 것이다.

팽팽하던 분위기가 또 조금씩 풀어졌다.

헌원창은 눈을 내리깔고 비수를 겨누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에 있는 그 손은 가늘고 길며 뼈마디가 분명한 손이었다.

이 손은 사람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생사까지도 결정 지을 수 있는 손이었다.

순간 헌원창의 눈을 덮고 있던 차가운 기운이 싹 사라졌다. 남자는 칼에 목이 베일까 두려워하지도 않고 망설임 없이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신 헌원창, 전하를 뵙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열여섯 명의 장군들도 날카로운 분위기를 거두고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봉왕 전하를 뵙습니다.”

야홍릉은 찻잔을 움켜쥐었던 손을 서서히 풀었다. 그리고 티가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용수는 비수를 거둔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헌원창 포함 열일곱 명이었는데 하나같이 몸집이 건장하고 기세가 강한 것이 오랫동안 군영에서 훈련받은 장군다웠다.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자세에서도 군인의 자부심과 공손함이 함께 비쳤다. 그들은 용수가 태자라서 무릎을 꿇은 것도 있지만 실력이 강한 자에 대한 진심 어린 감탄과 존경도 담겨 있었다.

용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수를 칼집에 넣었다. 차가운 그의 얼굴에는 태자에게서는 나타나지 말아야 할 음산한 기운이 넘쳤다.

시간이 조금씩 지나자 분위기도 풀어졌다.

바닥에 꿇어앉은 열일곱 명은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용수가 입을 열지 않는 한, 그들은 절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용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헌원창을 힐끗 본 뒤,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방을 들어서는 순간, 용수의 표정이 바로 부드럽게 변했다.

방금까지의 차가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야홍릉과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애비.”

야홍릉은 돌아서서 다가오더니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너도 기문둔갑에 능한가?”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싸늘한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애비, 긴장하셨군요.”

질문이 아닌 확신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은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를 걱정하셨나 봅니다.”

야홍릉은 부인하려고 했으니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능묵이 먼저 말했다.

“애비, 아니라고 하지 마십시오. 자꾸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은 좋은 버릇이 아닙니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능묵은 걸어가 그녀의 얇은 허리를 감싸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애비가 옆에 있기에 전 절대 위험한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생에 홀로 살아 있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느껴 보았기에 이번 생에는 애비 뿐만 아니라 저 또한 쉽게 세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이냐?”

야홍릉은 그를 떠밀며 차갑게 핀잔을 주었다.

“난 너와 평생 살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 말을 들은 능묵은 서운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저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더 좋은 남자를 찾을 필요가 없지.”

야홍릉은 주전자를 들고 차를 따른 뒤, 가볍게 마시고 나서 말했다.

“난 나중에 세상의 미소년을 후궁에 잔뜩 들여 실컷 총애할 것이다. 그들은 실력이 뛰어날 필요도 없고 지나치게 똑똑할 필요도 없이 그저 잘생기고 유순하며 말만 잘 들으면 된다.”

능묵은 찻잔을 든 야홍릉의 손을 덥석 잡고 차를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야홍릉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와 애비는 같은 찻잔으로 차를 마셨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으며 애비는 저를 가법으로 다스리기도 했습니다. 이래도 손뼉이 마주친 게 아닙니까?”

야홍릉이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법으로?”

능묵은 손바닥을 활짝 펴 보이며 낮게 말했다.

“계척 말입니다.”

“…….”

‘계척의 일을 몇 번이나 우려먹을 건데?’

그녀가 만약 그때 그가 글을 모르는 게 아니라 기억을 잃은 것임을 알았다면 절대 손바닥을 때려가며 글을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부터 계척으로 손바닥을 때리는 게 가법이 되었지?’

“아무튼 저는 애비와 평생 함께할 겁니다.”

능묵은 팔을 내밀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그는 야홍릉이 또 거절할까 두려워 팔에 힘을 좀 주었다. 그리고 야홍릉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은 채, 끊임없이 비볐다.

“후궁을 들여도 되고 미소년을 들여도 되나 주인님이 잘생기고 말 잘 듣는 소년을 원하신다면 딱 저인 것 같습니다.”

‘딱 자신이라고? 잘생기고 말을 잘 들어?’

야홍릉은 저도 모르게 점심에 능묵이 혼자서 흑의 영위들을 제압한 일과 방금 구궁진법에서 비수로 헌원창의 목을 겨눈 광경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능묵이 잘생긴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나 유순하고 말을 잘 듣는다고 하기에는……

물론 능묵은 그녀의 앞에서만큼은 아주 유순하고 말을 잘 들었다.

그러나……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그를 반박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만하거라.”

그녀는 그의 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밖에서 보고 있는 눈이 많다.”

‘그러니 태자로서의 권위와 체면을 좀 지키면 안 되나?’

능묵은 손을 풀고 눈을 내리깐 채, 야홍릉의 얼굴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애비, 방금 절 걱정하신 거죠?”

화제는 돌고 돌아 또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는 반드시 대답을 듣고 싶은 눈치였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걱정한 적 없다.”

능묵은 미간을 찌푸렸다.

“거짓말.”

“믿거나 말거나.”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자꾸 이런 무의미한 질문에 시간을 낭비한다면 나도 얼마든지 상대해 주겠다.”

능묵은 침묵을 지키다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애비는 제가 이길 것을 알고 계셨기에 걱정을 안 하신 거죠?”

야홍릉은 그가 자꾸만 같은 질문을 하자 귀찮아서 짜증을 냈다.

“그만하라 했다?”

“……네.”

능묵의 목소리가 한결 낮아졌다.

“남편이 잘못했습니다. 애비는 화 푸십시오.”

야홍릉은 퍼레진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자꾸만 이러면 너 혼자 돌아가거라. 난 가지 않겠…….”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눈앞의 빛이 가려지며 입술이 무언가에 덮였다.

그녀는 더 이상 한 글자도 더 말할 수 없었다.

밖에 서 있던 묵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고집스러운 사촌동생을 어떡하면 좋다는 말인가?’

이미 어두워진 하늘과 아직도 정원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헌원창을 본 묵백은 환한 방안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능묵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떠나지? 오늘 밤에 갈 것 아니면 정원에 있는 사람을 모두 돌려보내고 실컷 즐기든가.”

이 말에 원래 싸늘하던 야홍릉의 시선은 서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차가워졌다. 능묵은 흠칫 놀리며 급히 뒤로 물러섰다.

“애비, 저도 모르게…….”

묵백이 코웃음을 쳤다.

능묵은 묵백을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시선을 야홍릉에게 돌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애비, 지금 길을 떠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능묵은 두 손을 내밀어 야홍릉의 앞에 펼쳤다.

“만약 애비가 기분이 좋지 않다면 마음대로 벌하여 주십시오.”

야홍릉은 그의 말에 대꾸하기 귀찮아 아예 밖으로 나갔다.

“애비.”

능묵은 급히 그녀를 따라갔다. 그가 방문을 나서는 순간, 묵백의 입에 걸린 조롱 어린 미소가 보였지만 그는 지금 그런 것을 신경 쓸 새가 없어 그냥 지나쳤다.

“저녁 식사를 하고 떠나는 건…….”

“조용히 해.”

능묵은 바로 입을 다물고 제자리에 서 있다 헌원창을 돌아보며 말했다.

“길을 떠나라.”

말을 마친 그는 야홍릉이 떠난 방향으로 뛰어갔다.

이천 명의 기예병은 앞에서 걷고 남은 삼천 명은 마차의 양옆과 뒤에 나누어 마차를 꼼꼼히 둘러쌌다.

앞의 마차에는 능묵과 야홍릉이 타고 있고 묵백은 뒤의 마차에 타고 있었다. 이 두 마차를 타고 있는 사람은 모두 병사들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 중요했다.

헌원창은 마차의 왼쪽에서 길을 걷고 있었다. 청력이 뛰어난 그는 앞의 마차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봉왕 전하는 계속해서 사과하고 있었다.

“애비, 화를 푸십시오.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는 정말 저도 모르게 입을 맞추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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