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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49)화 (1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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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웅장한 기세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것이냐?”

야홍릉은 침대에 기대앉아 준수한 청년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며 물었다.

상상에 잠겨 있던 능묵은 바로 표정을 바꾸고 고개를 들어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애비, 이젠 쉬실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쉴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는 야홍릉의 잠잘 시간까지 빼앗고 싶지 않았다. 말을 마친 그는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안고 함께 누웠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은 채, 한껏 냄새를 맡았다.

“애비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좋습니다.”

야홍릉은 그의 손을 내치며 말했다.

“밖에서 자거라.”

능묵은 당황했다.

“애비?”

“남녀가 유별하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밤에 길을 떠나기 전에 여장으로 바꿀 테니 너도 태자의 신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말거라.”

능묵은 실망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 제가 싫어지신 겁니까?”

그의 태세 전환은 아주 빨랐다.

야홍릉을 부르는 호칭도 순식간에 바뀌었는데 다른 사람이 들을까 전혀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야홍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신분을 잊어버리지 말거라.”

“제 신분은 바로 주인님의 어영위이자 노리개입니다.”

능묵은 시선을 내리깐 채,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께서 내키지 않으신다면 남성국으로 가지 말고 목국 공주부로 돌아갑시다. 먼저 목국의 황자들을 해치워서 주인님을 황위에 올린 뒤, 다시 얘기해도 됩니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태자가 이렇게 고집스러워도 되나?’

“주인님은 왜 여장을 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능묵은 시선을 들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물었다.

“지금처럼 친밀한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단수로 보일까 그러시는 겁니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인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 거라면 제가 가까이 다가가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그러면 어찌 다른 사람이 오해할까 걱정하시겠습니까?”

그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다시 여장하려는 것은 불필요한 오해를 받기 싫어서였다.

남성국으로 들어간 뒤, 십 년 만에 돌아온 태자의 모든 행동은 분명 수많은 사람의 관심사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멋대로 구는 그가 말을 잘 들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오해가 생기기 전에 오해 생길 가능성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애비, 여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능묵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십 년 만에 돌아온 태자가 여인을 데리고 왔다면 애비는 순식간에 남성국 사람들의 주목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애비에게 좋지 않을 듯합니다.”

황권이 세워진 뒤로 태자의 혼사는 신하들이 가장 신경 쓰는 일이 되었다.

태자가 아리따운 여인과 함께 돌아온다면 남성국 귀족들의 시선은 그녀에게 쏠릴 것이다.

능묵은 어차피 할 일이 많아서 두려울 게 없었지만 그는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게 싫었다.

야홍릉이 시선을 들고 입을 열려고 하는데 능묵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주인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능묵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잘생긴 얼굴에서는 멋스러움이 풍겼다.

“저도 눈치는 있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절대 함부로 행동하지 않겠습니다.”

야홍릉은 그를 믿기로 했다.

“주인님, 주무십시오.”

능묵은 또다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누웠다.

“저녁에 길을 떠나려면 많이 힘드실 겁니다. 주인님, 푹 쉬십시오.”

묵백이 밖에서 정보를 주고받고 남은 날의 일정을 짜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능묵은 방안에서 야홍릉을 끌어안고 마음 편히 푹 잤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둘은 잠에서 깨어났다.

야홍릉이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익숙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흠칫 놀랐다.

말발굽 소리와 흐트러짐 없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니 훈련을 제대로 받은 기예병들인 것 같았다.

능묵은 침착한 얼굴로 야홍릉의 옷차림을 정돈해 준 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나가서 보고 들어오겠습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가에 서서 등불로 환한 밖을 바라보았다. 정예 기예병들이 먼 곳에서 뛰어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인적이 드물고 외딴곳에 별원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 소리에 주변의 백성들은 겁을 먹었을 것이다.

능묵은 방에서 나간 뒤, 회랑에서 걸어오던 묵백과 마주쳤다.

시선이 마주치자 묵백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9황자 헌원창(軒轅滄)의 기예병들이다. 네가 굴복시키기만 한다면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될 것이다.”

헌원창은 남성국 9황자로 무희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올해 스물여섯 살인 그는 황족이긴 하나 신분이 높지 않았다.

능묵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헌원창이 군영이 들어간 것도 그가 전생에 계획한 일이었다. 묵백은 그를 대신해 계획을 실행에 옮겼을 뿐이었다.

굴복시킨다고 하는 것은……

“그는 천성적인 장군감이야.”

묵백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으나 그의 말투에는 한숨이 담겨 있었다.

“출신이 좋지 않은 게 유일한 흠이지. 네가 떠난 해에 폐하께 간청을 올려 태자에게 강한 기예병을 훈련시켜야겠다고 말했어. 그리고 헌원창은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출신이 낮은 헌원창은 평소에도 과목하고 조용하며 인내심이 강했다. 열여섯 살 전까지 그는 공기처럼 존재감 없이 살아왔으나 묵백의 제안으로 황제는 그를 군영으로 보내 병사들을 훈련시키게 했다.

그는 십 년을 하루 같이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그는 헌원용수 때문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용수도 전에 남제에서 구 년 동안 비슷한 대우를 받은 적이 있었다.

비슷한 일을 겪은 둘을 붙여 놓는다면 그가 용수를 배신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흑의 기예병은 몇 명입니까?”

용수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등불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택 밖에서 한 사람이 말에서 뛰어내린 뒤,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온 것입니까?”

“흑의 기예병은 십만 정도이고 헌원창은 오천 명을 데리고 왔을 거다.”

묵백은 대답한 뒤,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태자를 뵙는 자리인데 떠들썩한 게 좋지 않으냐?”

그 말을 들은 용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제가 동제에서 떠난 뒤에 바로 소식을 보낸 것입니까?”

묵백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동제에 발을 들이는 순간 바로 소식을 남성국에 전했다. 안 그러면 헌원창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도착했겠느냐?”

용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발걸음소리가 가까워지면서 일행이 별원에 들어섰다.

야홍릉은 찻잔을 든 채, 창가에 서서 정원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선두에 선 남자는 스물예닐곱 살 되어 보였는데 차가운 외모에 건장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검은색 장포에서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검은색 양털 신발을 신고 검은색 피풍의를 두른 그는 허리에 비단으로 된 검은색 천을 매 단단해 보이는 허리선을 드러냈다.

헌원창.

창가에 서 있던 야홍릉은 묵백이 한 말을 낱낱이 들었다. 실물을 본 그녀는 묵백이 왜 그를 ‘천성적인 장군감’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천성적으로 뭔가와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기회를 잡지 못해 그 재능을 썩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과 어울리는 영역에서 빛을 발하는 사람도 있었다.

전생에 천하를 통일한 헌원용수처럼, 출신이 좋지 않으나 능력이 출중한 9황자 헌원창처럼 말이다.

그의 뒤에는 똑같은 차림의 병사 열몇 명이 서 있었다. 하나같이 강하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뿌렸다.

회랑 앞으로 걸어간 헌원창은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병사들이 전혀 흐트러짐 없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강한 장군 휘하에 약한 병사가 없다는 말이 맞았다.

헌원창은 시선을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묵백의 옆에 서 있는 준수한 얼굴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날카로운 빛이 가득했고 온몸으로 군영에서 키워온 엄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일반인이라면 그에게서 뿜어 나오는 한기에 무릎을 털썩 꿇었을 것이다.

그러나 용수는 일반인이 아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이런 위압적인 눈빛과 마주칠 수 있었다.

헌원창이 헌원용수를 훑어볼 때, 헌원용수도 헌원창을 바라보았다. 족보를 따지자면 헌원창은 그의 외삼촌이었다. 그러나 헌원씨를 수여 받은 뒤, 태자는 헌원 황실의 직계가 되어 그를 외삼촌이 아닌 황숙이라 불렀다.

전생에 그는 이 황숙에 대한 인상이 아주 깊었다. 같은 냉대를 받은 이유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헌원창도 그처럼 차분하고 쉽게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세상과 담을 쌓고서 열심히 병서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그와 헌원용수는 다른 점이 있었다.

헌원용수는 아홉 살에 그를 냉대했던 곳을 떠났다. 아홉 살은 어린 나이라 냉대를 받았다고 해도 궁인이 용돈을 깎는 것에서 그칠 뿐, 일부러 그를 괴롭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헌원창은 열여섯 살에 군영으로 들어갔다. 그전까지 그는 황자들 사이에서 온갖 괴롭힘을 당했었다. 귀족 세가의 공자와 소저들도 그를 무시하며 하찮게 여기기 일쑤였다.

황족 출신이라고 해도.

어머니의 출신이 비천한 황자는 세가의 서자들과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러나 9황자는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라 오랫동안 외롭게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는 책을 읽고 무공을 연마하며 병법을 연구했다.

그러다 묵백이 그에게 기회를 주자 순식간에 남성국에서 병원을 움켜쥔 흑의 기예병 대장군이 되었다. 그는 하루아침에 신분과 지위가 확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뽐내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향락을 누리며 자란 황형들 중 그보다 강한 마음을 가진 자가 없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헌원창이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정적을 깨고 말했다.

“진을 쳐라!”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흑의 병사들은 순식간에 움직였다. 속도가 너무 빨라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았다. 검은색 그림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만 보일 뿐이었다.

널따란 정원에 검은색 안개가 드리운 듯한 느낌이 풍겼다. 등불이 꺼지자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야홍릉은 실눈을 뜨고 저도 모르게 찻잔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기문둔갑(奇門遁甲)의 상고 구궁진법이었다.

그녀는 헌원창이 이것을 할 줄 알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하늘이 순식간에 새카맣게 어두워지고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낮게 가라앉은 구름 사이로 번개가 번쩍이며 대지를 가를 것 같은 금빛을 뿜어냈다.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에 당황할 만했으나 용수는 뒷짐을 진 채, 회랑 앞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시커먼 안개가 드리운 정원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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