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남편이 잘못했습니다
강경한 수단을 사용하자니 내키지 않았고 부드럽고 달콤한 말로 응징하려니 야홍릉은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수많은 수법에 눈뜨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능묵은 사과하기, 애교 부르기, 벌을 내려달라 청하기, 아양 떨기, 그리고 수시로 그녀에게 입을 맞추는 등 수많은 수법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했다.
조용하고 과묵한 어영위의 시절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어쩌면 알면 안 되는 사실을 너무 일찍 파악한 게 아닐까.
야홍릉은 그런 생각을 문득 했다.
봉씨 저택을 떠나 남성국으로 향하는 길.
그녀는 능묵이 얼마나 교활한 사람인지, 얼마나 그녀를 잘 유혹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수시로 무방비상태인 그녀에게 잘생긴 얼굴을 최대로 이용하며 각종 매력을 발산했다. 남성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려고 작정한 듯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야홍릉이 널따란 마차에 앉아 있는데 하얀색 장포 차림인 청년이 푹신한 양탄자 위에 무릎을 꿇고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맑고 새까만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은 것처럼 촉촉했고 곱게 휜 눈이 그의 잘생긴 얼굴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었다.
하얀색 옷은 그가 한결 고귀하게 보이게 했다. 청년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야홍릉의 머리카락을 집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애비여…….”
순간, 야홍릉은 온몸에 전율이 짜릿하게 일었다.
그녀는 능묵을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싸늘하게 말했다.
“기루에 가서 좀 있다 오는 건 어떠냐?”
‘기루?’
능묵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기루에는 왜 가라는 것입니까? 전 그렇게 어지러운 곳에는 잘 가지 않습…….”
야홍릉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기루에 가서 시중드는 법을 좀 배워오는 게 좋겠구나.”
그 말을 들은 능묵은 말이 없더니 풀이 죽은 듯, 눈을 내리깔았다.
예쁜 눈이 순식간에 수심에 잠겼다.
그 모습이 꼭 마치 버림받은 동물처럼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순간 야홍릉은 좀 후회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나 싶어 당황했다.
그러나 위로 올라간 청년의 입꼬리를 본 순간,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그를 걷어찼다.
“……꺼져!”
능묵은 마차 안에서 기어 일어나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은 뒤, 부드럽게 말했다.
“애비, 남편이 잘못했습니다.”
그 말에 마차 안은 또다시 정적에 잠겼다.
능묵도 자신이 이 말을 입 밖에 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야홍릉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야홍릉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자 바로 말을 바꾸었다.
“주인님, 화내지 마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주인님…….”
“입 다물거라.”
야홍릉이 싸늘하게 말했다.
능묵은 할 말을 잃고 눈을 내리깐 채, 반성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야홍릉은 더 이상 그를 거들떠보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잠을 청했다.
마차가 널찍한 길에서 평온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끔씩 미풍이 창문발 사이의 틈으로 불어 들어와 시원했다.
능묵은 조용히 있다가 시선을 들고 가까이에 있는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또 입을 맞추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너무 급하면 되레 일을 망치는 법이다. 방금 전, 그가 선을 넘은 탓에 그녀는 이미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비록 ‘애비’라는 호칭을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선을 더 이상 넘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정말 화를 낸다면 여태까지 한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차 안은 조용했다. 능묵은 자리를 옮겨 탑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신의 이런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야홍릉의 다리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얌전한 노리개의 신분으로 돌아왔다.
야홍릉은 잠들지 않았다.
그저 능글맞은 능묵을 상대하기 싫었다. 심지어 너무 일찍 진실을 파헤친 게 아닌가 후회했다. 예전의 과묵하고 말 잘 듣던 어영위는 얼마나 귀여웠던가?
그는 절대 선을 넘지도, 툭하면 그녀를 유혹하지도 않았다.
실눈을 뜨자 그의 조용하고 공손한 자세가 보였다. 그의 옆모습은 아주 아름다웠는데 고대 그림에서 걸어 나온 귀공자 같았다.
야홍릉은 속으로 묵묵히 생각했다.
‘이 녀석은 툭하면 외모로 날 꼬신단 말이지.’
봉씨 가문의 일도 해결되었고 기천성에도 가지 않을 예정이었다. 능묵이 봉회근과 마장의 일로 얘기를 마쳤으니 그녀가 걱정할 것은 더 없었다. 지금은 남성국으로 돌아가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서 그들은 아침 일찍 마차에 올라탄 것이었다.
헌원 황제가 병들었다는 소식은 절대 허투루 넘길 일이 아니었다. 야홍릉은 그에 대해 잘 모르지만 능묵에게 그 황제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녀는 능묵이 앞으로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사는 게 싫었다. 그래서 능묵을 따라 이렇게 남성국으로 가는 게 경우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고집으로 따지면 그녀는 능묵의 상대가 아니었다.
점심 즈음.
마차는 조용한 별원의 밖에 멈춰섰다. 능묵은 시선을 들어 자고 있는 야홍릉을 바라보다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애비.”
야홍릉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능묵은 눈을 내리깔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공손함을 담은 채, 다시 불렀다.
“주인님.”
야홍릉은 사실 잠들지 않았다. 그러나 ‘애비’라는 호칭을 듣자 저도 모르게 화가 나 그의 말에 대꾸할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그가 또 ‘주인님’이라고 호칭을 바꾸자 그녀는 또 망설였다.
남성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녀는 그가 호칭을 바꾸기를 바랐다. 한 나라의 태자가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아니라 굳이 ‘애비’라고 부르는 거지?’
“주인…….”
“조용히 하거라.”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의 이 모습을 남성국 사람들이 보면 얼마나 놀랄지 생각해 보았느냐?”
그 말을 들은 능묵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전 단지…….”
“난 지금 네 얘기를 듣고 싶지 않다. 그러니 조용히 있거라.”
야홍릉은 일어서서 문발을 젖힌 뒤, 밖으로 걸어갔다.
‘조용히 있으라고?’
능묵은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 별원의 대문에 들어섰다.
도중에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별원의 대문에 들어서는 순간, 귀를 찌르는 바람 소리와 함께 널찍하고 조용했던 정원 안에 수십 명의 흑의인이 나타났다.
그들은 양옆에, 지붕 위에, 나무 아래에, 담장 위에 빼곡히 서서 야홍릉과 능묵을 둘러쌌다.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시커먼 흑의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둘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차갑고 음침한 시선에서 능묵이 잘 알고 있는 느낌이 풍겼다.
그가 신은전에서 훈련을 받을 때, 매일 마주치던 사람들의 눈빛도 이러했다.
음산하고 차갑고 죽음의 기운을 담은 듯한 눈빛.
야홍릉은 말없이 서서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능묵은 앞으로 성큼 나서며 그녀와 나란히 섰다. 그녀를 대할 때의 온화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칼처럼 날카로운 분위기만 남았다.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는 무더운 여름인데도 공기 중에는 한기가 감돌았다.
시간이 흐르자 능묵을 바라보는 흑의인의 눈빛에 경계가 한층 더 어렸다.
이상한 자세로 지붕 위에 엎드려 있던 흑의인이 호각을 불었다.
공격하라는 지시 같았다.
흑의인들은 순식간에 그들에게 다가왔다.
야홍릉은 차가운 얼굴로 검집에서 검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능묵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잠시만요.”
야홍릉은 눈썹을 꿈틀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옆에 있던 능묵이 검은색 번개가 되어 날아가더니 바람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정상에 이른 무인들끼리 싸울 때만 나는 소리였다.
그녀의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결계가 쳐진 것처럼 그녀에게 아무런 위험도 닥치지 않았다. 야홍릉은 이제서야 신은전 최정상 어영위의 대단한 실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기나긴 혹독한 훈련을 거쳐 어영위가 된 그의 실력은 일반적인 무인과 비교할 수 없었다.
최정상 무인들끼리의 대결은 속도로 싸웠다.
그래서 시간도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의 싸움은 이미 끝나 있었다.
능묵은 다시 조용하게 야홍릉의 옆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떠난 적 없는 듯했다.
그는 전과 변한 게 없었지만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흑의인의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고 입가에 핏기가 묻어 있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어두웠다.
“자양전(紫陽殿)의 천자호(天字號) 영위냐?”
능묵이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의 말투에는 왕의 위엄이 담겨 있었다.
“난 남성국 태자 헌원용수다.”
그는 짧게 두 마디만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흑의인들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무릎을 꿇은 뒤, 고개를 조아리며 큰절을 올렸다.
“저는 자양전 천자호 영위 봉매(鳳魅)입니다. 전하께서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야홍릉은 그제야 능묵이 그들을 죽이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들의 인원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능묵은 별원에 들어설 때부터 이 영위들이 남성국 황족이 보낸 자신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남성국을 떠난 지 십 년 되는 그는 강한 실력과 수완으로 이 수하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줘 그들이 진심으로 그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단순히 태자라는 신분으로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전생에 세상을 정복한 적이 있고 이번 생에는 신은전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친 그는 무공 경지로나 제왕의 수완으로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세상 모든 이들 중에서 그의 상대가 될 사람은 없었다.
야홍릉은 그제야 눈앞에 있는 청년이 더 이상 그녀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어영위가 아니라, 아양을 떠는 노리개가 아니라 남성국에 들어선 순간부터는 진정한 제왕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아직 황제로 등극하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한 제왕이었다.
남성국의 사람들은 모두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성국 자양전 봉(鳳) 자 돌림 영위들은 모두 태자의 개인 영위입니다.”
능묵은 고개를 돌리고 야홍릉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주인…….”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능묵은 눈을 내리깔고 싱긋 웃더니 말했다.
“애비.”
야홍릉은 이렇게 많은 영위 앞에서 그의 말을 반박할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그가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건 태자의 체면과 위엄에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었다.
그녀가 만약 ‘애비’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면 뻔뻔스러운 능묵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주인님’이라고 부를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