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침묵으로 일관하다
남성국을 떠난 지 십 년이 되었으니 돌아가 볼 때가 되었다.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에 든 편지를 한참 노려보았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몸이 항상 좋으셨습니다.”
“오랫동안 걱정을 하셨을 텐데 아무리 건강해도 상했을 것이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연세도 있으시니 말이다.”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는 돌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옆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를 홀로 두고 떠나는 게 걱정이 되었다.
전생의 이 시기에 그는 대부분 시간을 남성국에서 보냈다. 가끔씩 남성국을 떠날 때도 있었으나 종종 서신을 보낸 덕에 헌원 황제는 그가 밖에서 하는 일을 모두 알고 있어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생에는 열 살 때 남성국을 떠난 뒤로 기억을 회복하기 전까지 모든 소식은 묵백이 전해주었다. 남성국 신하들이 그의 소식을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도 제사전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십 년 동안이나 보지 못하자 헌원 황제와 남성국 백성들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야홍릉은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돌아가거라. 나도 얼마든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안 됩니다. 안심할 수 없습니다.”
전생에 뼈저린 교훈을 새긴 그는 겁이 많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는 매일 열두 시진 동안 야홍릉의 옆에 붙어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야홍릉이 이번 생에는 쉽게 다른 사람에게 당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전생에는 좋아하는 사람의 손에 죽은 것이기에 이번 생에는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한시름을 놓을 수 없었다.
만일의 경우도 있지 않겠는가?
그는 나중에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헌원용수, 네가 헌원씨라는 것을 잊지 마라. 남성국이야말로 네 책임이야.”
“하지만 주인님은 제 사랑입니다.”
능묵은 시선을 들고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만약 책임과 사랑 사이에 하나만 택할 수 있다면 전 사랑을 선택하고 책임을 버릴 것입니다.”
남성국에 유능한 사람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가 없어도 충분히 잘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야홍릉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능묵도 침묵에 잠겼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잠시 뒤, 능묵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이 저와 함께 남성국으로 가지 않는 이상, 저도 남성국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야홍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지금 날 협박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능묵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아 입가에 가져갔다.
“이건 제 부탁입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주인님, 허락해 주십시오.”
능묵은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노리개로 변한 것 같았다.
“마장의 일은 제가 봉회근과 얘기를 해볼 것입니다. 우리 먼저 남성국으로 가시지요…… 남성국이 어떤 곳인지 구경도 하고 말입니다. 전 직접 신께 기회를 한 번 더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능묵은 그녀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전 주인님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무기가 뭐냐고 묻는다면 그건 사람 마음일 것이다.
그는 거부할 수 없는 부드러움으로 다가와 마음속 가장 연약한 부분을 공략해 그녀의 단단한 마음의 벽을 조금씩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한번 사랑의 바다에 빠지게 만들었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널따란 의자에 기대앉았다. 순간 그녀는 능묵의 앞에서는 어느샌가 매정하게 굴지 못하고 마음이 한없이 무너진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능묵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심지어 거절할 생각도 없었다.
‘내가…… 넘어간 건가?’
“난 다시는 진심 따위를 믿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짧은 시간 동안 그 말을 이렇게 뒤엎게 되는구나.”
야홍릉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차가운 목소리엔 옅은 한숨이 담겨 있었다.
“헌원용수, 넌 정말 교활하고 얄미운 인간이구나.”
능묵은 그녀의 말에 담긴 부드러움을 알아차리고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바로 잘못을 인정했다.
“맞습니다, 저는 교활하고 얄미워서 벌을 받아야 합니다.”
저녁 무렵.
능묵은 봉회근과 얘기를 하러 나간 사이 야홍릉은 홀로 방에 남아 책을 읽었다. 그러나 책 내용에 집중이 되지 않아 그녀는 미간을 문지르며 책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춘란이 건네주는 차를 마시며 남성국의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꿈에서 보니 남성국은 다른 나라들보다 화기애애하고 평화로운 편이었다. 남성국의 사람들이 신을 믿고 따르는 이유도 있었고 황제가 현명하며 백성들이 제사전과 황제를 존경하는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 남성국에서는 내란이 일어나는 경우가 극히 적었다. 물론 황제가 나라를 잘 다스려서 백성들이 부유하게 잘사는 것이 평화의 주요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익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무조건 평온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제경의 각 대세가 사이에서도, 조정의 문무백관 사이에서도, 황족의 친왕 공주, 심지어 귀족 가문의 안방에서도 암투는 항상 존재했다.
게다가 이번 생에 헌원용수는 남성국을 떠난 지 무려 십 년이나 되었다. 삼천 일이 넘는 시간 동안 헌원 황제의 아들들은 정말 한 치의 사심도 없이 조용히 그를 기다리기만 했을까?
남성국이 아무리 평화로워도 그들이 야심을 전혀 품지 않았을 거란 보장이 없다.
그러니, 헌원용수는 이번에 남성국으로 돌아가면 태자의 지위를 다시 다져야 할 뿐만 아니라 낯설어진 조정의 상황도 파악해야 하고 전생에 그의 것이었던 정예 군사도 다시 훈련시켜야 했다. 그리고 평화로운 겉모습에 숨겨진 치열한 암투에 직면해야 할 것이다.
야홍릉은 나이가 많은 헌원 황제가 떠올랐다.
능묵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전생에 헌원용수가 천하를 정복할 때, 헌원 황제는 건강했다. 그러나 이번 생에는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말았다. 전생에는 남성국이 강했고 헌원용수 또한 황위에 등극하기 전부터 천하에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던 헌원 황제는 건강에도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그를 도와 조정 정무를 봐줄 헌원용수도 곁에 있지 않던가.
그러나 이번 생은 아니었다. 헌원용수는 일찍부터 남성국을 떠나 십 년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정무로 바쁜데다 걱정이 많았던 헌원 황제는 몸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헌원용수가 돌아가면 황제가 퇴위를 선언할 수도 있었다.
야홍릉은 다른 사람의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남성국의 일은 헌원용수의 일이기도 하고 그녀와도 연관이 되기에 그녀는 머지않은 미래에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획을 세워야 나중에 정말 그런 일에 마주쳤을 때, 대응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어둠이 깃들자 능묵이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야홍릉이 의자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라더니 걸어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님,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야홍릉은 정신을 차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능묵의 말을 듣는 순간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
“호칭을 바꾸어라. 남성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날 이렇게 부른다면 네 신하와 백성들이 놀라지 않겠느냐?”
‘내 신하와 백성들이 놀란다고?’
능묵은 누가 놀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고 물었다.
“주인님은 어떻게 고치는 게 좋을 것 같습니까?”
‘어떻게 고치냐고?’
야홍릉은 의아했다.
“이름을 부르면 되지 않느냐?”
‘이름을 부르라고? 홍릉?’
능묵은 입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몇 번 불러보았으나 고개를 저었다.
“직접적으로 이름을 부르는 건 안 좋을 것 같습니다. 너무 예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예의가 없는 것 같다고?’
야홍릉은 이상한 표정으로 잠깐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이 이상 더 예의를 차릴 건 없다.”
그의 신분은 그 누구에게도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전 적응이 되지 않습니다.”
능묵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도 곧 스무 살이 되니 돌아가면 할아버지께서 분명 태자비를 간택하고 혼인을 서두르실 겁니다. 주인님께서 대신 좀 막아주실 수 있습니까?”
‘태자비를 간택한다고?’
야홍릉은 침묵했다.
그녀가 간과하고 있었던 일이 있었으니, 바로 헌원용수의 혼사 문제였다.
곧 황위에 오를 태자에게 후궁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남성국 세가들은 이미 그가 돌아간 뒤에 자신의 딸을 후궁의 자리에 꽂아 넣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을 것이다.
찻잔을 조용히 입가에 가져간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가볍게 마셨다.
“나더러 어떻게 막아달라는 것이냐?”
“주인님이 바로 제가 좋아하는 여인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미 혼인했느니 제 아내라고 소개할 거고요.”
능묵이 미리 생각해 둔 것을 얘기했다.
“저는 주인님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부를 수는 없으니…… 애비(愛妃, 아내를 부르는 애칭)라고 부르는 게 어떨 것 같습니까?”
그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았다.
“주인님, 애비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능묵은 까만 눈동자로 그녀의 싸늘한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허락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침묵이 흘렀다.
야홍릉은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를 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싸늘하여 능묵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녀는 한참 뒤에야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애비?”
능묵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순수한 눈빛으로 말했다.
“주인님께서 불편하시다면 못 들은 거로 하십시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듣고 말았다.
실컷 불러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불쌍한 표정을 짓는 모습에 야홍릉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일어나 안방으로 향했다.
“목욕 시중을 들 준비를 하여라.”
능묵도 일어서서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생각에 잠겼다.
‘허락하신 건가? 아니면 아닌 건가?’
목욕을 마친 야홍릉은 일찍 자려고 했다.
그러나 능묵이 푹신한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그녀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얘기를 꺼낼 줄이야.
“주인님, 오늘 밤 저한테 벌을 내리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야홍릉은 표정이 굳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내리깔고 있는 능묵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듯, 순수한 얼굴이었다.
살짝 벌어진 하얀색 침의 사이로 예쁜 목덜미와 쇄골이 보였다.
그는 온몸으로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야홍릉은 성미가 차갑고 능력이 강해 그 어떤 도발이나 무례함, 사악함과 음모로 가득한 사람은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강경한 수완을 보고 나면 그녀의 잔인함에 혀를 내두르고는 더 이상 그녀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눈앞에 있는 교활하고 영악하며, 또 부드럽고 순진해 보이는 노리개에게는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