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돌아가야겠구나
능묵은 비단탑에 기대 있다가 능묵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얘기는 끝냈느냐?”
능묵은 그녀의 옆으로 걸어간 뒤, 손을 야홍릉의 어깨에 올려놓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네.”
사실 얘기할 것도 없었다.
그저 협력하는 절차와 앞으로 그들이 지켜야 할 점을 얘기했을 뿐,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도 진심으로 협력할 생각이 없었다.
야홍릉이 실눈을 뜨고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모침의 꼬리가 너무 길었어. 그들이 직접 찾아오다니. 죽이지 않기도 미안해지는구나.”
이 말을 들은 능묵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맞습니다. 이렇게 직접 찾아왔는데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지요.”
이런 떨거지들을 얼른 해결해야 인륜지대사를 정할 게 아닌가?
“야소숙과 야정연이 먼저 서로 물어뜯게 놔두지요.”
능묵이 한담하는 말투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2황자를 상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능묵은 그녀의 빨간 입술을 바라보다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촉감에 떨어지기 아쉬웠지만, 그녀가 화를 낼까 곧 일어섰다. 그리고 시선을 내리깐 채, 야홍릉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했다.
“저들이 우리를 단수라고 오해하고 있는데 또 이러는 것이냐?”
야홍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그렇게 보이고 싶은 것이냐?”
‘난 아직 남장 차림인데 좀 신경 쓰면 안 되나?’
“그렇게 보이고 싶습니다.”
능묵은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단수면 단수지요. 전 주인님이라면 성별도 상관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야홍릉은 이상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 말은 내가 사내여도 그렇게 했을 거라는 말이냐?”
능묵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내가 사내였다면 넌 전쟁터에서 날 보고도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의 말에 공감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전쟁터에 장군이 그렇게 많은데 왜 그들에게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은 것이냐?”
능묵은 좀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덩치 크고 거칠게 생긴 사내들에게 설렐 남자가 어디 있습니까?”
‘내 취향은 정상적이거든요?’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그러니 결국은 내 얼굴을 보고 설렜다는 거군.”
능묵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전쟁터의 수많은 무장 중 실력이 강한 사람이 그녀 한 명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첫눈에 반한 건 그녀의 멋진 자세 말고도 어여쁜 얼굴, 그리고 여인이라는 점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못생겼거나 뚱뚱했다면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도, 병법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의 시선을 끌지 못했을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능묵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건 이유가 있는 게 당연하지. 아무 이유 없이 좋아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야홍릉은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
아름다운 외모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중요한 요소였다. 외모에 끌린 다음에야 그 사람의 영혼을 알아볼 흥미가 생길 것이다.
능묵은 침묵했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세상의 이치에 훤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는 괜히 대단한 사랑을 한 것처럼 말한 것이 민망해졌다.
무릎을 구부리고 그녀의 옆에 앉은 능묵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입가에 가져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주인님은 지혜로우시고 현명하시니 제가 부끄럽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달콤한 말은 치명적인 독약과 같다는 말을 믿느냐?”
능묵은 당황했다.
그는 야홍릉이 속상한 과거사를 떠올린 줄 알고 쓰라린 마음으로 눈을 내리깐 채,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전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한 말은 독약이 아니라 상처를 치료하는 약물입니다. 그리고 전 주인님에게만 이럽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물었다.
“그래서 나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던 것이냐?”
“다 좋습니다.”
능묵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아름다운 외모도 좋습니다. 제가 그 얼굴에 반했으니까요.”
그리고 그녀의 멋진 자세와 차갑고 날카로운 분위기, 대군을 지휘할 때의 강력한 기세도 좋았다.
그녀의 모든 점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녀를 볼 때마다 그는 야홍릉을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깊어졌다. 그러다 결국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다.
“주인님은 제가 이러는 게 좋습니까?”
능묵은 시선을 들고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만약 제가 말을 많이 하는 게 싫으시다면 앞으로 적게 하겠습니다. 만약 주인님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을 좋아하신다면 제가 바꿔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이 좋다.”
야홍릉이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바꿀 필요 없다.”
‘지금이 좋다고?’
능묵은 침묵하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지금의 제가 좋다는 말씀입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
능묵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한참 바라보다 비단결 같은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살짝 집으며 말했다.
“아까 그 고씨 말이다, 야모침의 사람 같던데.”
갑자기 화제가 바뀌자 능묵은 당황한 얼굴로 침묵을 지킨 뒤, 대답했다.
“네, 그런 듯했습니다.”
“오늘 그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난 봉씨 가문의 원래 협력하는 사람들과 어떤 이유로 협력을 끊어야 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고우안이 오늘 나 대신 그 골칫거리들을 해결해 주었지 뭐냐.”
그들이 무슨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야홍릉의 일이 쉽게 풀린 것은 사실이었다.
“주인님,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능묵이 입을 열었다.
“무슨 제안이냐?”
능묵이 평온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봉씨 가문은 이젠 주인님을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며 심지어 같은 식구로 인정합니다. 그들은 이미 섭정왕의 일로 주인님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인님만 그들을 믿으신다면 마장을 계속 그들에게 맡기시는 게 어떻습니까? 봉씨 가문의 집사들은 말 사육 경험이 풍부하고 잡다한 과정에 대해서도 잘 아니 주인님께서 직접 하시기보다 시간과 정력을 훨씬 절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홍릉은 침묵했다.
“그리고 저와 묵백이 있으니 봉씨 가문에서도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할 것입니다.”
능묵은 시선을 돌려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야홍릉의 손을 잡아당겨 입을 맞추었다.
“봉회근은 주인님이 동제의 공주이고 황제가 주인님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기에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야홍릉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모침이 이 일에 개입한 이상, 앞으로 마주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심한 능묵은 각종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한두 번은 그냥 넘길 수 있다고 해도 마주치는 기회가 많아지다 보면 주인님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저희는 이 일을 봉회근에게 맡기면 좋은 것 같습니다.”
야홍릉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능묵.”
능묵이 시선을 들고 물었다.
“네?”
“……아니면 용수라고 불러야 하나?”
야홍릉은 눈을 내리깐 채,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네가 모든 일을 다 이렇게 정리해 주다 보면 정말 언젠가 내가 온실 속의 화초가 될까 두렵구나.”
능묵은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전 주인님이 절 능묵이라고 불러주시는 게 좋습니다. 이것은 주인님이 하사하신 이름이라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까요.”
말을 마친 그는 또 미간을 찌푸렸다.
“전 이름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절 헌원능묵이라 불러주십시오.”
야홍릉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헌원능묵…….”
청년은 다시 한번 말을 반복했다. 낮게 네 글자를 반복하는 그의 목소리는 아주 듣기 좋았다.
“아주 좋은 것 같은데 주인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내 생각은 어떠냐고?’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린 채,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남성국의 사람들이 너 때문에 아주 화가 날 것 같은데.”
능묵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 지금 주인님이 얘기하실 때 점점 사람답게 변하시고 계시다는 걸 아십니까?”
‘사람답다고?’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난 예전에도 신은 아니었다.”
신이 아닌 것은 맞았다.
능묵은 고개를 끄덕이고 인정했다.
“주인님은 신보다 설산 꼭대기에 핀 꽃 같습니다. 너무나 고귀하여 바라볼 수밖에 없는 꽃말입니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입에 발린 말을 이렇게 잘하면서 무뚝뚝하기는?’
“주인님께서 방금 이러다 언젠가 온실 속의 화초가 될 것 같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능묵은 한숨을 내쉬고 온몸을 야홍릉의 다리에 기댄 뒤, 말했다.
“남자는 여인을 좋아하게 되면 저도 모르게 아껴주고 싶고 하늘의 별도 따주고 싶어집니다…… 전 이미 최대한 자제하고 있으나 자꾸 주인님의 골칫거리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애완동물처럼 애교를 부리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누가 누구를 아껴주는지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능묵은 최근 들어 점점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것도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력하게 완급 조절을 잘하여 그녀는 거절할 이유조차 찾지 못한 채, 그와의 관계가 확정되어 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조금씩 그녀의 곁에서 자리를 찾아가고 또 더 직설적인 고백으로 그녀의 대답을 이끌어 냈다.
창밖에서 따스한 햇살이 들어와 둘을 비추었다.
* * *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야홍릉은 능묵의 다리를 베고 잠이 들었다.
봉회근은 그녀를 찾으러 왔다가 자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떠났다. 창밖에서 새가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려서야 야홍릉은 천천히 눈을 뜨고 담담하게 물었다.
“……매인가?”
능묵은 대답한 뒤, 창문을 열고 팔을 뻗었다.
귀티 나게 예쁜 하얀색 매가 그의 팔에 올라타더니 날카로운 부리로 그의 팔을 콕콕 찍었다. 창문을 늦게 연 그의 행동을 꾸짖는 듯했다.
능묵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매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매는 목을 움츠리고 애교를 부리듯 부리로 그의 옷을 쪼았다.
야홍릉은 일어서서 옆의 의자에 앉은 뒤, 턱을 괸 채, 이 이상한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능묵이 하얀색 매의 발아래서 서신을 꺼낸 뒤에도 그녀의 시선은 매의 새하얀 발에 고정되었다.
능묵은 서신을 펼쳐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야홍릉은 고개를 들고 날카로운 얼굴로 능묵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할아버지께서 편찮으시답니다.”
능묵은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새하얀 매는 날개를 푸드덕거리더니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푸른 하늘에서 번개같이 사라졌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돌아가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