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시간은 충분해
사공신이 정자에 도달했을 땐 이미 침착한 표정으로 진정한 뒤였다.
그러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고 야홍릉을 바라보는 표정에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우안과 눈을 마주친 뒤, 시선을 돌리고 탁자 옆에 앉았다.
고우안도 따라서 사공신의 맞은편에 앉았다.
야홍릉은 정자의 난간에 기댄 채,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차가운 시선과 표정은 사람들에게 감히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정자 안은 한참 동안 정적이 지속되었다.
“능 공자의 신분을 여쭈어도 될까요?”
고우안은 자신의 입장을 한껏 낮추고 있었다.
그들이 일부러 경계를 풀려고 이러는 것이든, 아니면 야홍릉과 능묵이 한 말에 겁을 먹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용기가 부족하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야홍릉은 정원의 풍경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들이 내 신분이나 출신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답은 결국 하나요.”
고우안은 흠칫 놀랐으나 곧바로 미소를 지었다.
“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오늘 찾아온 것도 사실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능 공자와 거래를 하고자 찾아왔습니다.”
‘거래라고?’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당신들이 원하는 게 마장이라면 이 거래는 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소.”
이 말에 사공신과 고우안은 모두 숨을 죽였다. 그들은 능 공자가 이토록 단호하게 거절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공신은 정자 옆에 서 있는 능묵을 몰래 훔쳐보았다.
둘의 용모와 풍기는 분위기는 가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
신분 또한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단순히 부자가 아니라 귀족 세가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래서 그는 또 생각에 잠겼다.
‘어느 나라의 귀공자가 남색을 좋아하고 이렇게 훤한 대낮에 애정행각을 할 정도로 뻔뻔하단 말인가?’
“네, 저희의 목적은 마장이 맞습니다.”
고우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능 공자의 태도가 이토록 단호하니, 도리어 협상할 생각이 있습니다.”
그는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빼앗으면 안 되는 법이죠. 그러나 저희가 능 공자와 협력 관계가 되면 어떤가요?”
‘협력 관계?’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협력한다는 말이지?”
“저희가 봉씨 가문의 마장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니 해마다 태어난 어린 말들을 저희에게 파시는 게 어떻습니까?”
야홍릉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어린 말을?”
“네, 맞습니다.”
고우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봉씨 가문의 마장은 사육 기술이 뛰어납니다. 저희가 해마다 높은 가격으로 능 공자에게서 어린 말을 사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사공 공자는 협력을 체결한 뒤, 봉씨 가문의 마장이 기천성에서 성주의 보호를 받도록 약속드릴 것입니다. 그러면 그 누구도 감히 능 공자를 귀찮게 하지 못할 것이 아닙니까?”
혹할 만한 조건이었다.
사업에 영향도 가지 않고 돈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사공신과 고우안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야홍릉이 봉씨 가문의 마장을 노린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도 어린 말이 필요해서였다.
그런데 어찌 어린 말을 남에게 팔 수 있다는 말인가?
“봉씨 마장에서는 해마다 태어나는 어린 말이 수만 마리 정도 됩니다. 봉씨 가문과 협력하고 있는 각국 세가들과 얘기를 나눠 보았는데 앞으로는 협력 형식이 바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희 가문에서 모든 어린 말을 다 구입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저희는 능 공자와 가장 친밀한 협력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협박도 담겨 있었다.
다른 가문에서 봉씨 가문과의 협력을 종료할 것이니 어린 말을 사공 가문에 팔지 않는다면 그 어디에도 팔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또 높은 가격에 사겠다며 약속을 하는 등 사정하는 것도 있지 않았다.
‘참 좋은 수법이군.’
야홍릉은 시선을 돌리고 고우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날 귀찮게 구는 사람이 없을 거란 말이오?”
고우안은 야홍릉의 생각이 달라진 줄로 알고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려 능묵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해볼 만합니다.”
능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만약 당신들이 약속을 어긴다면 전 당신들이 성주의 아들로 지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이 말에 사공신과 고우안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들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능묵에게 돌렸다.
‘이 공자는 도대체 누구기에 사공염을 기천성 성주의 자리에서 내쫓는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거지?’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하지요.”
말을 마친 그녀는 일어서며 능묵에게 말했다.
“이 일은 네가 알아서 하거라. 난 이만 돌아가서 쉬어야겠다.”
능묵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야홍릉이 정자를 나서자 사공신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얇은 허리에 닿았다.
‘아직 점심도 되지 않았는데 쉬러 간다니. 어젯밤에 잘 자지 못한 건가?’
그는 또 방금 회랑에서 보았던 광경이 떠올랐다.
능 공자는 아름다운 용모에 차가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분위기는 사내의 정복 욕구를 자극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이 청년도…….’
사공신은 능묵에게 시선을 돌리고 그의 신분을 짐작하기 시작했다.
이 둘은 일반인 같지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평범하지 않은 인물인 듯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느 나라의 귀족이 남색을 좋아한다고 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한편, 능묵은 사공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방금 자신과 야홍릉이 가까이 있던 장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알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는 사공신의 생각을 짐작하기보다 능묵과 야홍릉의 관심사는 어떻게 단순한 사공신을 이용해 야모침을 상대할지를 궁리해야 했다.
수완이나 생각 깊이나, 또는 권력이나 지위를 봐도 사공신과 고우안은 능묵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협상에서도 둘은 얘기에 거의 끼지도 못하고 능묵이 하는 말만 들어야 했다.
물론, 능묵은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사업을 논하는 사람들은 보통 말을 잘하며 길게 하지만 그는 간단하게 몇 마디 하고 끝냈다. 그러나 간결한 몇 마디에 고우안과 사공신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능묵에게 기가 완전히 눌린 것이다.
능묵에게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기세가 느껴졌다.
사공신은 물론이고 능구렁이처럼 말을 잘하는 고우안도 능묵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능묵은 말을 마친 뒤, 시선을 둘에게 던지며 물었다.
“더 할 얘기가 있습니까?”
‘더 할 얘기?’
고우안은 정신을 차린 뒤,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없습니다만…… 여태 공자의 성도 몰랐군요.”
“능씨입니다.”
고우안은 놀라더니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방금 능 공자와 같은 성씨라는 말입니까?”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능묵이 싸늘한 시선으로 물었다.
고우안은 말문이 막혔다.
“……아니, 아닙니다.”
‘능 공자가 둘이라고? 그럼 둘이 형제라는 거야? 그렇다기에는 너무 닮지 않았는데.’
사실 그는 많은 계획을 세우고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한 뒤에 능 공자를 찾으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방금 앞에 있는 능 공자의 몇 마디 말에 모든 허점이 완벽하게 채워져 그는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었다.
상대방이 그가 할 말까지 다 해버리자 고우안은 많이 당황스러웠다.
한참 생각한 그는 겨우 꽤 중요한 질문을 생각해냈다.
“능 공자들께서는 언제 기천성으로 가실 것입니까?”
“아직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용건이 없다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능묵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마친 그는 고우안과 사공신이 입을 열기 전에 일어서서 가버렸다.
정자 안에는 둘만 남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짧은 침묵이 지난 뒤, 사공신이 입을 열었다.
“고 형, 저 둘…….”
“모두 신비한 사람이오.”
고우안은 미간을 찌푸리고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들에게서 이득을 얻어내지 못할 것 같소.”
그의 말을 들은 사공신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이 어떻게 자네와 2황자가 연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지?”
고우안은 시선을 들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공 공자, 언제 비밀이 누출된 것이오?”
사공신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소.”
말을 마친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들은 2황자라고 하지 않고 그저 제경의 황자라고 했소…… 그저 나한테서 뭔가를 알아내려고 떠본 것일 수도 있소.”
“아니오.”
고우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 둘을 보니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오. 분위기가 일반적인 것 같지 않은 것 같던데 절대 그들을 낮잡아 보지 마시오.”
“일반적인 것 같지 않다고?”
사공신은 그의 말을 반복하더니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일반적이진 않지. 어느 단수가 훤한 대낮에 그런 애정행각을 마음대로 벌인다는 말이오?”
‘단수라고?’
고우안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까 그 둘 말이오?”
“그럼 누구겠소?”
사공신은 찻잔을 꽉 쥐고 싸늘하게 말했다. 아까 보여줬던 느긋하고 예의 바르던 모습은 전혀 없었다.
“고 형, 이 둘은 살려두면 안 되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아 황제의 귀에 전해진다면 큰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고우안도 표정이 어두웠으나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도리어 이럴 때일수록 무모하게 움직이면 안 되오. 내가 전하께 보고드린 다음 다시 결정해도 늦지 않소.”
사공신은 생각을 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전하께 말씀드려 이 둘의 신분을 잘 알아보라고 해야겠소.”
황자부에는 첩자와 암위가 많으니 소식에도 빠를 것이다.
“만약 그들이 정말 단수가 맞다면…….”
고우안은 생각에 잠겼다.
“취향에 맞는 미소년 몇 명을 찾아서라도…….”
사공신은 흠칫 놀라며 물었다.
“누구의 취향에 맞게 말이오?”
고우안은 침묵했다.
‘그러게, 누구의 취향에 맞게 골라야 하지?’
방금 그들이 만난 두 공자는 모두 일반인이 아니었다. 그러니 미소년을 붙여 주어 비위를 맞추려고 해도 누구의 취향에 맞게 골라야 하는지 문제였다.
그러나 급할 것은 없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든 사람이라면 약점이 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이 기천성에 들어오면 고우안은 둘의 약점을 파악할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시간은 충분해.’
마장은 기천성에 있었고 그 둘도 기천성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지내다 보면 상대할 방법은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