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협박하는 것이오?
야홍릉은 그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채찍 팔십 대’라고 말하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귀를 잡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능묵이 당황하다가 미소를 짓는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곧 입술에 따뜻한 촉감이 전해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놓고 뒷걸음질쳤다.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능묵은 초조하여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싸늘하고 표정을 알 수 없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그랬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정색하며 다시는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도 속으로는 이런 느낌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미세한 소리가 들리자 야홍릉과 능묵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경악한 얼굴을 한 채 회랑에 서 있는 젊은 남자가 보였다.
보지 못할 것을 본 표정이었다.
공기는 순식간에 정적에 잠겼다.
죽은 듯한 정적이었다.
곧이어 그 남자는 예의 바르게 웃었다. 그러나 웃음소리는 의미심장했다.
“죄송합니다, 전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니 두 분 공자꼐서는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둘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야홍릉은 그제야 상대방이 그녀와 능묵의 행위를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둘을 단수로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든 그 광경을 본다면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야홍릉은 오해를 풀 생각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 상대방을 본 그녀는 담담하고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공 공자?”
남자는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짙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찢어진 눈을 가지고 있는 그는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녹색 비단 장포를 입고 노루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신은 그는 허리에 비싼 옥패까지 두르고 있어 풍류스럽고 비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녀가 상대방을 훑어볼 때 사공신도 그녀를 훑어보고 있었다.
야홍릉은 날카로운 분위기에 온몸에서 여인다운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 흔한 귀걸이를 한 흔적조차 없으니 아무리 아름답게 생겨도 사공신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가 여인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오히려 야홍릉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그녀가 단수인 공자라고 단정 지었다.
“사공 공자는 얼굴이 멀쩡하게 생긴 것에 비해 남을 훔쳐보는 못된 버릇이 있군요.”
능묵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말속에는 조롱의 뜻이 다분했다.
“명문 세가의 교양은 그저 그렇군요.”
그의 말에 사공신은 표정이 굳었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일부러 훔쳐본 게 아닙니다. 공자께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일부러 훔쳐본 게 아니라 뒤뜰 정원에서 한참 기다렸지만 능 공자가 오지 않자 일어서서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마침 이런 민망한 상황을 보게 된 것이었다.
능묵은 그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일부러 그랬다면 절대 이렇게 한두 마디 비꼬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훔쳐봐도 그는 절대 어영위의 눈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영위는 훔쳐보는 사람을 잡으면 반드시 상대방의 손과 발을 잘랐다.
“사공 공자, 나에게 할 말이 있소?”
야홍릉이 담담하게 입을 열고 걸어갔다.
사공신은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연 소년이 능 공자라는 것을 확신한 뒤, 그녀를 따라 정원의 길을 걸었다.
“능 공자가 봉씨 저택의 대공자를 치료한 보수로 터무니없는 가격을 요구했다고 들었습니다.”
먼 곳의 정자에서 청색 옷을 입은 남자가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양옆에는 흰 옷을 입은 아리따운 소녀 두 명이 서 있었다.
야홍릉은 시선을 거두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사실이오. 그러나 난 터무니없는 가격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봉씨 가문 대공자의 목숨은 이 정도보다 더 값지지 않겠소?”
그 말을 들은 사공신은 저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단 한 마디만으로 그는 단수 공자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봉씨 가문의 재산이나 사업이 아주 많은데 왜 쉬운 걸 달라고 하지 않고 하필 마장을 요구하신 겁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적인 일을 사공 공자에게 설명해야 하오?”
그러자 사공신의 준수한 얼굴에 민망한 표정이 어렸다. 그러나 그는 또 싱긋 웃어넘겼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기천성 성주의 적자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자신에게 이런 어조로 말하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순간 그는 화가 치밀었으나 단수 공자가 자신의 신분을 몰라서 이런다고 생각해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능 공자, 봉씨 가문의 마장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야홍릉이 대답했다.
“목국 서남쪽의 기천성에 있소.”
“그럼 기천성의 성주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모르오.”
사공신은 미소를 지었다.
“기천성의 성주가 제 아버지십니다. 저는 기천성 성주의 적자 사공신이고요.”
이 말에 능묵은 비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인간이 기천성 성주의 적자 사공신이라고?’
그들은 진작부터 그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자신의 신분부터 급히 밝히는 거로 보아 아버지의 절반만큼도 똑똑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소? 성주부의 공자셨군.”
야홍릉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사공신은 실눈을 뜬 채, 그녀의 반응에 놀란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물었다.
“봉씨 가문의 마장은 아버지의 관할 범위 안에 있습니다.”
이 시대는 상인의 지위가 낮지 않았다. 물론 각국 귀족이나 관리들과 비교하면 낮은 편이었다. 평민이 관리와 맞서 싸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상인은 국적이 없이 모든 나라를 누비며 장사를 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봉씨 가문의 사업도 세상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사업체가 있는 지방의 법대로 세금을 내야 했다.
봉씨 가문의 마장과 제염, 제철 사업은 기천성에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기천성의 율법대로 성주의 통제를 받았다. 만약 성주의 기분을 건드린다면 상주서를 올릴 필요도 없이 성주가 없애버릴 수도 있었다.
기천성은 황제가 있는 제경과 먼 데다 성주 사공염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장과 제염, 제철 사업은 민감하고 이윤이 많이 나는 사업체였다. 역모와 엮인다면 큰일이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깊다 보니 척 들으면 그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야홍릉도 마찬가지였다.
“봉씨 가문의 가주는 목국의 백성이 아니오.”
야홍릉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서 역모죄에 연루되어도 동제의 황제가 알아서 할 것이지 기천성 성주 나부랭이는 그럴 권리가 없소.”
야홍릉의 말을 들은 사공신은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끄덕였다.
“……능 공자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른 나라의 관리가 상인의 가주를 마음대로 죽일 수 있다면 그 누구도 다른 나라에 사업체를 벌이지 않을 것이다.
관리가 제멋대로 누명을 씌우고 죽이는데 뭘 믿고 장사를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사공신은 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능 공자도 봉씨 가문의 마장과 제염, 제철 사업은 공자의 것이라고 말했는데…… 능 공자는 어느 나라의 사람입니까?”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곧 알게 될 것이오.”
야홍릉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기천성 성주는 봉씨 가문의 가주를 처형할 권리가 없는 것처럼 나에게 권력을 남용할 수도 없소. 그러니 사공 공자는 신분으로 나에게 겁줄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것이오.”
정원의 공기는 아주 좋았다.
향긋한 꽃향기가 미풍과 함께 불어왔다.
그러나 사공 공자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숨을 깊게 들이쉰 그는 언짢은 기분을 내려놓고 미소를 지었다.
“능 공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그저 능 공자가 기천성의 율법이나 마장의 운영 방법을 몰라 나중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되어 찾아와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야홍릉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 실랑이할 생각이 없어 그의 의도를 까발렸다.
“사공 공자, 아직도 날 협박하는군.”
‘문제가 생긴다고? 누가 일부러 시비를 걸지 않는다면 괜한 문제가 생길 일이 뭐가 있겠나?’
“그러나 난 겁이 많은 사람이 아니오.”
그녀의 담담한 말투에는 무시할 수 없는 싸늘함이 담겨 있었다.
“내가 봉씨 가문의 마장을 요구했다는 것은 알아서 경영을 잘할 자신이 있다는 말이오. 만약 누군가 나한테 괜한 시비를 건다면 제대로 싸워볼 생각도 있소.”
그리고 고개를 돌려 사공신을 바라보았다. 야홍릉의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사공 성주에게는 기천성이라는 좋은 땅이 있지만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소. 만약 정말 싸움이 붙는다면 누구의 손실이 더 클 것 같소?”
사공신은 흠칫 놀랐다.
그는 이성적으로 야홍릉의 말에 휘말리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이십오 년 전에 사공염은 황명을 거역할 수 없어 초씨를 아내로 맞이했지. 그리고 이십 년이 넘게 부부로 살고 자식도 두 명 낳았으나 부부 사이는 이미 남이나 다를 것 없고.”
능묵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 같은 적자가 사공 성주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할 것 같습니까? 앞으로 성주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을지 당신도 장담할 수 없겠지요.”
사공신은 표정이 크게 변했다. 그는 능묵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당신이 위성에 온 목적을 사공 성주는 모르고 있다는 것에 내 모든 것을 걸지요.”
능묵은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말했다.
“만약 그가 당신이 사적으로 제경 황자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고 또 황위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사공 공자는 성주의 자리를 이어받을 때까지 살아 있을까요?”
그 말에 사공신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당황한 얼굴로 능묵을 노려보았다.
정원의 공기는 여전히 좋고 시원했다.
그러나 사공신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긴장한 것도 있고 이 말에 불안함을 느낀 것도 있었으나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압박감이 가장 컸다.
그는 능묵이 말을 마친 뒤에도 굳은 얼굴로 한참이나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온몸이 얼어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는 도대체 누구지? 어떻게 내가 제경의 황자와 연락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 거지?’
야홍릉은 사공신을 뒤로 하고 말없이 정원을 지나 정자에 올라갔다. 그리고 정자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청색 옷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사공신보다 몇 살 많아 보이는 그는 글공부를 꽤 한 듯 점잖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야홍릉이 걸어오자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서서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고우안(顧宇安)이 능 공자를 뵙습니다.”
야홍릉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혹시 날 알고 있소?”
“오늘 처음 뵙습니다.”
고우안은 고개를 저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방금 사공 공자와 하시는 얘기를 듣고 능 공자의 신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앉았다.
“오늘 온 것이 단순히 날 협박하기 위한 건 아닌 것 같으니 얘기해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