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특권을 주시기 바랍니다
“봉씨 저택에서 얘기를 나누기 편한 곳이 있소? 뒤뜰은 어떻지?”
야홍릉이 물었다.
봉여희는 당황했다.
‘뒤뜰? 남자 손님을 뒤뜰로 모시는 경우가 어디 있다고?’
봉여희는 목을 가다듬은 뒤, 대답했다.
“능 공자는 봉씨 가문의 귀한 손님이십니다. 봉씨 가문에는 능 공자가 가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형님께서 어젯밤에 능 공자는 앞으로 봉씨 가문의 사람이니 정성껏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인즉 능 낭자가 손님을 모신다면 얼마든지 봉씨 가문의 주청을 사용해도 된다는 말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야홍릉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뒤뜰로 모셔주시오.”
봉여희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뭐지? 꽃구경이라도 하면서 얘기를 나누게?’
그러나 야홍릉은 말을 마치자마자 방으로 홱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봉여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방문을 잠근 뒤, 능묵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기천성은 병력이 강합니다. 사공신이 정말 야모침을 도우려고 한다면 이렇게 먼저 찾아온 것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안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비단 함을 꺼냈다.
이 비단 함을 본 순간, 능묵은 실눈을 뜨며 입을 꽉 다물었다.
“전에 네가 두 번이나 나더러 이걸 네 머릿속에 심으라고 했지. 네가 날 배신하지 않도록 말이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
능묵은 기억을 되찾기 전의 기분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는 낮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음 아프셔서 그러시지 못하실 겁니다.”
그의 신분을 모를 때도 야홍릉은 그에게 이런 수법을 쓰지 않았는데 과거를 알고 난 지금은 더욱 그럴 리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능묵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는 겉보기엔 차가우나 마음은 따뜻하고 너그러운 여인이 좋았다. 그녀는 한 사람을 믿으면 아무 증거가 없어도 쉽게 의심하지 않았다.
능묵은 자신이 신은전에 들어가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신분을 제외하고 다른 신분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면 이렇게 쉽게 그녀의 신임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겉보기엔 사람들을 거부하며 누구에게나 마음을 터놓지 않고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듯했다. 그녀에게서 뭔가를 바라고 잘해주는 사람은 절대 그녀의 진심과 신임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인님.”
야홍릉은 흠칫 놀라며 시선을 그의 얼굴로 돌렸다. 준수한 청년은 얼굴에 충성과 온화함을 가득 담고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야홍릉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렇긴 하지.”
능묵은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곧바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만약 내 기분을 잡치게 한다면 가만두지 않았다.”
그녀는 싸늘한 얼굴로 위협적인 말을 했다.
“계편을 잃어버리지 말거라. 내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그것으로 분풀이를 해야겠으니. 어차피 넌 맞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말이야.”
그 말을 들은 능묵은 더욱 활짝 웃으며 고분고분 대답했다.
“전 그저 주인님에게 맞는 것이 좋을 뿐입니다.”
야홍릉은 홱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나와 함께 사공신을 만나러…….”
그러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몸이 건장한 팔에 갇히더니 이마에서 입맞춤이 느껴졌다.
“급하실 것 없습니다. 그더러 기다리라고 하지요.”
야홍릉은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 뒤, 그녀는 능묵이 점점 선을 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하극상이라도 하는 것이냐?”
“네, 맞습니다.”
능묵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변명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주인님, 화가 나신다면 절 때려 주십시오. 화를 내지 않으시면 전 주인님이 제 행동을 암묵적으로 허락하신 줄로 알 것입니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능묵은 그녀를 꽉 끌어안고 턱을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주인님, 저에게 특권을 주십시오.”
“……무슨 특권?”
“가끔씩 통제를 벗어나도 된다는 특권 말입니다. 가끔씩 저도 모르게 주인님을 끌어안을까 걱정입니다. 주인님을 이렇게 끌어안고 있어야 마음이 편해지고 주인님이 정말 살아 계신다는 게 실감 납니다.”
능묵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야홍릉이 전생에서처럼 그도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죽을까 겁났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간 마음이 찌릿하게 아팠다.
그는 강한 남자였다.
남성국 황태자의 신분이었던 전생이나, 신은전 어영위인 이번 생이나 그의 능력은 의심할 나위 없이 뛰어났다.
그러나 지금 그는 자신의 불안함과 약점을 아무렇지 않게 그녀에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진심 어린 얼굴로 그녀가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호소하고 있었다.
야홍릉은 사랑을 해본 적은 있으나 누군가에게 이렇게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다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차가운 그녀라도 마음이 녹지 않을 수 없었다.
강한 남자들도 여인의 치마폭에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경우가 많은데 외롭게 지낸 그녀는 오죽할까? 이렇게 간절하고 부드러우며 따뜻한 능묵의 공략에 넘어가지 않고 버틸 여인은 몇 명이나 되겠는가?
야홍릉은 감정적으로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쟁터에 있을 때처럼 날카롭지도 않고 평소처럼 생각이나 속셈이 많지도 않았다. 지금 그녀는 그저 그에 대한 믿음이 점점 깊어져만 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옆에 있는 날들이 익숙해졌다.
그 꿈을 꾼 뒤로 그에게 품었던 약간의 의심마저 사라졌다.
그녀는 그저 꿈 때문에 그와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마음을 표현하지 않기만 한다면 능묵이 여전히 예전처럼 그녀에게 충성을 다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계속해서 어영위로 지내고 싶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녀가 잊어버린 게 있었다. 이미 사랑하는 여인을 한 번 잃은 남자는 그 여인이 다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며 마음속으로 큰 불안감과 다시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능묵이 강하고 침착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침착함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간과했다. 짧은 며칠 사이에 그는 또 그녀의 감정적 한계선과 그들 사이에 존재해야 마땅한 선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녀는 또다시 그를 봐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야홍릉은 진실을 알게 된 뒤, 자신에 대한 능묵의 감정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며 애정 표현을 할 때마다 계편을 꺼내 그를 때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징벌 수단을 제외하고 정말로 그가 선을 넘지 못하게 막을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
그러나 생각을 바꾸자 마음속에 수많은 생각이 또 머리를 쳐들었다.
결국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죽지도, 누군가의 음모에도 당하지 않을 것이니 불안해할 것 없다.”
조용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능묵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의 여인은 낭만이라고는 전혀 없는 여인이었다.
그가 불안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지금 불안한 마음을 빌미로 그녀의 마음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른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그녀는 그저 진지하게 음모에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만 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능묵은 잠깐 기다렸으나 그녀가 자신을 밀치지 않자 기분이 좋아졌다.
바로 이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리개로서 네 행위가 선을 넘는구나.”
능묵은 눈을 깜박이며 억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노리개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주인님에게 아양을 떨어 총애를 받는 것입니다.”
야홍릉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그녀는 곧 담담하게 말했다.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았으니 선을 넘은 것이다.”
“네.”
능묵은 순순히 손을 풀며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제가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
야홍릉은 침묵을 지킨 뒤, 말없이 밖으로 걸어갔다.
“밤에 다시 벌을 내리겠다.”
그녀가 이 말을 한 이유는 당장의 난감한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런데 능묵이 그녀를 순순히 내버려 두지 않고 더 달라붙을 줄이야.
그는 다급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밤에 벌을 내린다고요? 이 말에 이상한 생각이 드는…….”
“……넌 밤에 소원을 이루게 될 것이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차가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이상한 생각을 실컷 하도록 허하겠다.”
야홍릉의 말에 능묵은 당황했다.
둘이 방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사공신은 진작 뒤뜰의 정자에 도착했다. 정원은 손님을 접대하기 좋은 곳은 아니었으나 무더운 여름에는 주청보다 정자가 훨씬 시원하고 쾌적했다.
야홍릉은 차분한 얼굴로 정원의 회랑을 걸었고 그녀의 뒤에서 능묵이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밤에 날 어떻게 혼내신다는 거지?’
그는 계편은 절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계편으로 맞으면 바로 피를 보기에 그녀가 계편으로 그를 벌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손바닥을 때리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지금 그는 학생도 아니고 그녀도 스승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무릎을 꿇는 벌을 내리려나?’
능묵은 저도 모르게 남성국에서 들은 정보들이 떠올랐다.
일부 엄격한 아내들은 남편에게 빨래판에 무릎을 꿇는 벌을 내리곤 했다.
이것도 사랑의 표현인 것 같았다.
‘그런데 빨래판을 어디서 구해오지? 봉씨 저택의 시녀를 시켜 가져오라면 되겠네. 시녀들은 다 빨래를 하니 말이야.’
그는 맷집이 강해 빨래판에 무릎을 꿇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또 이런 방식은 부부 사이의 감정을 키울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은 아직 부부와는 거리가 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명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명분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상관없었다.
그는 그녀 자체가 좋았다. 그리고 그가 있는 한, 야홍릉의 옆에 절대 다른 사내가 다가오지 못하게 막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명분이 없어도 있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야홍릉은 능묵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잔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영위가 주인의 곁에서 다른 생각에 잠기면 무슨 죄로 다스려야 하는가?”
능묵은 시선을 들고 바로 잡생각을 떨쳤다. 그리고 순순히 대답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른 생각을 좀 했다고 죽을죄라니?’
“만약 제가 지은 죄가 죽을죄까지는 아니라면 선심을 베풀어 채찍 팔십 대만 때려주십시오. 전 맷집이 강해 괜찮습니다.”
능묵이 말했다.
야홍릉은 침묵했다.
그가 처음 공주부에 들어왔을 때, 야홍릉은 그에게 최대로 채찍을 몇 대 맞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때 그는 최대 팔십 대까지 맞고 쓰러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강한 어영위로 일반인보다 훨씬 강한 인내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팔십 대를 맞고도 쓰러지지 않는 것은 어영위에게도 한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