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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41)화 (14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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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억지스러운 변명

끝까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둘 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밖에서 다니기 편해서 남장을 했소. 미안하오.”

야홍릉이 담담하게 사과했다.

봉령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능 공자도 그저 그리하는 게 편해서 그런 거잖아요. 그리고 저한테 못 할 짓 한 것도 없는데 왜 사과해요?”

그러다 민망한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다 제가 눈치가 없어서 망신을 당했네요.”

둘은 한참 한담을 나누다가 시녀가 준비한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능묵과 봉여희가 돌아왔다.

그들은 한 시진도 되지 않아 돌아온 것이다.

야홍릉은 금란원 서쪽 별실로 자리를 옮겼다. 눈치 빠른 봉령은 다른 것을 더 묻지 않고 그들을 조용히 정원 입구까지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봉여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라버니, 능 낭자와 능묵 공자의 신분을 알고 있어요?”

저번까지 능 낭자는 남장을 하고, 능묵 공자는 용모를 바꾸었다. 이는 신분을 숨기기 위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지금, 능 낭자는 여전히 남장하고 있었지만 능묵은 더 이상 역용액을 쓰지 않았다.

능묵의 진짜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남장한 능 낭자와 함께 서 있어도 둘은 천생연분으로 보였다.

그러나 봉령은 이런 것을 속으로만 생각할 뿐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남녀 관계는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은 주종관계가 아닌가?

능 낭자가 그에게 다른 마음이 없을 수도 있었다.

“조금은 알고 있지만 자세히 아는 건 아니야. 그러나 모르는 것도 좋아. 너무 많이 알면 안 좋을 수도 있거든.”

봉여희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봉령은 놀란 얼굴로 그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봉여희의 말을 알 것도 같고, 또 아리송하기도 했다.

“구씨 가문에 둘이 숨어 있었는데 한 명은 고(顧) 씨이고 다른 한 명은 사공(司空) 씨였습니다. 모두 목국 서남쪽 기천성(冀川城)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야홍릉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능묵을 바라보았다.

“사공 씨라고?”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홍릉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아주 좋군.”

기천성은 목국의 가장 남쪽 변방의 위치에 있었는데 제경과 멀었다. 산과 가까이 붙어 있는 탓에 한동안은 강도가 들끓어 황제의 속을 썩였다.

삼십 년 전, 사공염(司空炎)이 성주의 자리에 오른 뒤, 병사들을 데리고 강도들을 숙청하여 기천성은 조용해졌다.

그러나 기천성은 제경과 멀리 떨어진 데다 사공염은 야심이 크고 오만한 사람이었다.

몇 년 뒤, 백성들은 부유해지고 삶이 안정적으로 되자 다들 성주인 그를 아주 존경하고 따랐다. 이렇게 되자 황제는 기천성이 황권의 통제에서 벗어날까 두려웠다.

제경 초(肖)씨 가문에는 여식이 두 명 있었는데 그중 언니는 황실에 들어가 황비가 되었다. 황제는 생각해 보다 초씨 가문의 열다섯 살밖에 안 되는 여동생 초란(肖蘭)을 기천성의 성주 부인으로 보냈다.

그리고 어느덧 이십오 년이 지났다.

사공염과 초란에게는 적자 한 명이 있었는데 이름은 사공신(司空臣)이었다. 황권에 굴복하며 신하로서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거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적자 사공신을 제외하고 사공염에게는 적녀도 한 명 있었는데 이름하여 사공월(司空月)이었다.

겉으로는 이렇게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 성주는 풍류스럽고 오만했다.

정실을 제외하고도 첩실을 가득 들였으며 서자와 서녀(庶女)가 넘쳐난다고 했다.

아들의 이름만 사공신이라고 지었을 뿐, 황제가 직접 하사한 정실을 존중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은 것이다.

말없이 방으로 들어간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공신이 직접 온 것이냐?”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주부에 자식은 많지만 사공신만은 야모침과 혈연관계가 있는 사촌 형제이니 진심으로 야모침을 위해 움직이겠지요. 야모침도 다른 사람을 쓰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합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가 앞으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능묵이 둘 중 한 명이 사공 씨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그녀는 이 사건의 주모자가 야소숙이 아닌 속을 알 수 없는 야모침일 거라고 예상했다.

목국 서남쪽의 기천성은 봉씨 가문의 마장이 있는 곳이자 목국의 변방이 있는 곳이었다.

제경과 멀리 떨어진 탓에 사공 가문이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황제가 완벽하게 알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지금 야모침은 날개가 단단해져 황위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겉보기엔 조용해도 속으로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기천성의 소식을 숨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무에 바쁜 황제는 수시로 기천성의 동향을 살필 수 없었다. 게다가 황궁에서만 지내는 황제가 소식에 빠르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야모침과 사공신은……

“지리적 위치의 우세를 차지한데다 또 믿을 만한 사람의 도움까지 받을 수 있으니 야모침의 이 수는 참 교묘하군.”

야홍릉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계획은 그럴듯하나 결말이 뻔하겠어.”

능묵은 시선을 들고 창가의 여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 걸어가 여인의 옆에 선 그에게는 맑고 깨끗한 향이 풍겼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야모침의 일은 저한테 맡기세요. 주인님은 그저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야홍릉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청년은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형제끼리 서로 죽이려고 칼을 겨누는 모습은 그다지 보기 좋지 않습니다. 전 주인님이 형제를 해쳤다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게 싫습니다.”

전생에서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사람 중에서 야모침은 주모자가 아니었지만 조력자였다. 이번 생에도 야홍릉이 그의 이익에 해를 끼칠 것 같으면 야모침은 절대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반드시 죽어야 했다.

다만 그를 죽여야 하는 사람은 야홍릉이 아니어야 했다. 그녀가 복수를 하든, 황위에 오르든, 잔인하고 피 튀기는 일은 모두 그가 할 생각이었다.

맑고 구성진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리자 야홍릉은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잠깐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날 온실 속의 화초로 키울 셈이냐?”

“제가 어찌 감히.”

청년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은 뒤, 그녀를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주인님은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닙니다. 저는 온실 속의 화초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그의 손을 노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 그저 주인님의 명성이 더럽혀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능묵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듣기 좋았다.

“주인님이 황위에 오르시게 되면 전 목국의 문무백관이 주인님의 영명함과 현명함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일을 주인님께서 직접 하신다면 남들에게 약점만 잡힐 것입니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합니다. 어떤 일은 남자들이 할 수 있지만 여인이 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백 년 동안 목국의 황실을 지배한 것은 남자였으니 여황제를 반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가 아무리 잘하더라도 앞으로 장애물이 많을 것이다.

고리타분한 늙은 신하들, 눈앞의 이익밖에 모르는 세가들, 여인을 발밑으로 뭉개려는 귀족들은 여인이 황제로 되는 것을 막으려고 별별 짓을 다 벌일 것이다.

유일한 방법은 황권을 물려받을 수 있는 황자가 모조리 사라지는 것이었다.

야씨 황자들은 이런 결말을 맞이해도 쌌다.

그들이 전생에 여동생 야홍릉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너그럽게 품었다면, 형제간의 우애를 조금이라도 헤아려 주었다면 전생의 결말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생에 능묵도 그들에게 똑같이 너그러운 마음을 베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야홍릉에게 나쁜 짓을 한 인간들은 한 명도 살려두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내일 기천성으로 떠나는 것으로…….”

“능 공자.”

봉여희의 목소리가 밖에서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사공 공자라고 하는 분이 중요한 일로 상의드릴 게 있다면서 만나 뵙고 싶답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서 있다 담담하게 말했다.

“제왕은 날카롭고 단호해야 하는 법이다. 내가 죽이고 싶은 사람과 가지고 싶은 물건, 그리고 짊어져야 할 명성은 다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필요는 없다.”

말을 마친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능묵은 고개를 돌리고 깡마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는 복잡한 시선이 드리웠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내리깐 채, 밖으로 나갔다.

그가 예상하던 대답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여인은 자부심이 뼛속 깊이 박힌 사람이고 다른 사람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연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꾸만 그녀를 품에 꽁꽁 가두고 싶었다. 그는 그녀가 서슬 푸른 검을 마주하는 것도, 음모에 맞서는 것도, 심지어 유언비어에 휘말리는 것도 너무나 싫었다.

전생에 그녀를 잃은 고통이 이번 생에는 불안과 후회로 남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는 또 그녀를 잃을까 두려워 방심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를 위해 직접 목국의 강산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을 죽여서 그녀가 순조롭게, 그리고 평온하게 황위에 앉기를 바랐다.

그러나……

시선을 다시 야홍릉에게 돌린 그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공 공자가 누구요?”

야홍릉은 뒷짐을 진 채, 평온한 시선으로 봉여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봉여희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도 모릅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말을 전하는 것이오? 나쁜 사람일까 두렵지도 않소?”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봉씨 가문은 큰 봉변을 겪을 뻔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경계심이 없어서야 어찌하겠는가?

봉여희는 흠칫 놀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능 공자와 잘 아는 사이인 줄 알았습니다.”

사실 이 변명은 억지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사공 공자가 누군지도 알고 있고 그가 왜 능 낭자를 찾아온 건지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능 낭자가 이 사공 공자를 어떻게 상대하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봉씨 가문의 마장과 제철, 제염 사업은 모두 기천성의 사공 가문의 세력 범위 안에 있었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사공 가문에서도 마장을 노리고 있었다. 만약 능 낭자가 그들을 상대할 수 없다면 나중에 기천성에 가서도 괴롭힘을 당하게 될 것이다.

봉형과 봉회근은 어젯밤에 내내 상의를 한 끝에 봉청서와 구씨 가문의 배후 지시자가 사공 가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오직 사공신만 자신의 신분이 들통난 줄도 모르고 봉청서와 구씨 가문의 계획이 망가진 지금, 직접 능 공자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그가 위협을 하든, 이익으로 꼬시든, 봉여희는 능 낭자가 어떻게 상대하는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사실 그는 이번 일에서 능 낭자의 진짜 신분을 파악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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