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우연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능묵은 야홍릉이 후궁을 잔뜩 들인다고 해도 크게 상관이 없었다.
후궁이 많아도 그저 머릿수에 지나지 않을 게 아닌가?
야홍릉은 일어나 앉으며 능묵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얀색 침의가 적당하게 벌어져 있어 그의 새하얀 목덜미와 쇄골이 드러났다.
그는 귀공자차럼 우아하면서도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능묵이 먼저 말을 걸었다.
“주인님.”
야홍릉은 무심코 ‘응’하고 대답했다.
“제가 침대를 덥혀드릴까요?”
야홍릉은 멈칫했다. 그리고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여름이다.”
“먼저 연습하는 것도 좋지요.”
능묵은 눈을 내리깐 채, 침대에 꿇어앉았다.
“그럼 겨울이 되었을 때, 더 잘하지 않겠습니까?”
‘침대를 덥히는 것도 미리 연습할 필요가 있을까?’
야홍릉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 무덤덤하게 말했다.
“지금 날 유혹하려고 그런 모습을 갖춘 것이냐?”
“……주인님, 억울합니다.”
능묵은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순수하기만 했다.
“전 원래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는 원래 이런 외모였다. 그저 원래 가진 외모를 이용해 작은 술수를 부릴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과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노리개라면, 주인을 유혹하는 게 직책이 아니겠는가?
만약 유혹에 성공한다면 그녀도 그에게 조금 마음이 있다는 게 아닐까?
그녀의 성격상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가 그녀의 옆에서 벌거벗고 누워있어도 그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능묵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내심 언제 이 수를 쓸지 속으로 가늠해 보았다.
“이만 자자꾸나.”
야홍릉은 침대에 누우며 담담하게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내일하고.”
능묵은 눈을 깜박였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서 자야 하냐고 물으려다가 다시 말을 삼켰다.
‘나더러 침대에서 내려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같은 침대에서 자도 된다는 말인가?’
능묵은 야홍릉이 수줍어할까 걱정해 묻지 않고 같은 침대에서 자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옆에 누웠다. 한참 기다려 보아도 그녀가 내쫓지 않자 그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드디어 한시름을 놓은 것이다.
“주인님.”
“응.”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정말 주인님이 세상을 호령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능묵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여인의 몸으로 천고일제가 된다면 세상 사람들 모두 깜짝 놀랄 것이고 주인님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황제가 되겠지요. 저는 그런 황제를 보필하는 황부(皇夫)로 기억될 것이고요. 이런 일을 역사 서적에 써넣는다면 황제와 황후의 이야기보다 후손들에게 더 놀라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투에는 흥분이 차 넘쳤다. 평소 차갑고 차분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능묵.”
“네, 주인님.”
“유치하다는 생각이 안 드나?”
“…….”
능묵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주인님은…… 제가 유치하게 느껴지십니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 그가 한 말을 생각해 보았다.
‘천고일제? 후손들에게 놀라운 일?’
그는 마치 아이가 신기한 사물을 보고 신난 것처럼 들떠 있었다.
‘세상이 자기 집인가? 제멋대로 하게? 남성국 백성들의 기분은 생각해 봤나?’
그녀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널 좋아하게 된다면, 난 누가 누구의 부속품인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물론, ‘부속품’이라는 것도 말일뿐, 난 정말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황후는 황제보다 한 등급 낮고 황부도 여황제보다 한 등급 낮았다.
이것은 황권 지상의 규칙이었다.
황위에는 한 사람만 오를 수 있었다.
모든 이들은 황위 아래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아내, 형제자매, 친자식, 장인어른까지 황제를 ‘신’으로 지칭해야 했다.
그래서 야홍릉은 능묵도 이런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의 부속품이 되는 게 싫어할 것 같으니, 있는 힘껏 그녀더러 황제가 되라고 설득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자부심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부심은 남보다 신분이 높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말했듯, 나중에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만약 나중에 둘이 진정한 부부가 된다면, 그땐 어떤 결말을 맞이하든 그녀는 모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말을 당분간 그에게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반면 능묵은 ‘만약 내가 널 좋아하게 된다면’이라는 야홍릉의 말에 설렌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속으로 언젠가 ‘내가 널 좋아하게 되었어’로 바뀌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때, 그는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한참 망설이던 끝에 그는 결국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전생에 왜 한옥금을 좋아하게 되신 겁니까?”
야홍릉은 당황했다. 그녀는 능묵이 이 질문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 야홍릉은 곧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눈이 멀었던 게지.”
능묵은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의 속상한 과거 얘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속상한 과거?”
야홍릉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속상하지 않다. 내가 눈이 멀지 않았다면 어찌 사람 탈을 쓴 늑대를 알아보지 못했겠느냐?”
능묵은 눈을 내리깔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인님의 눈이 먼 것이 아니라 그놈이 너무나 잘 숨긴 것입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끄덕였다.
“잘 숨기긴 했지.”
“주인님은 부드럽고 온화한 남자를 좋아하십니까?”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떤 성미를 가진 남자든 모두 어느 한 면모만 가지는 건 아니다. 단순히 성격만 따져 좋아하는 마음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는 얘기지.”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그중에는 성격이 비슷한 사람도 있고 분위기가 비슷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누가 단순히 성격만으로 한 사람을 좋아하겠는가?
능묵은 침묵했다.
“이만 자자.”
야홍릉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따라 왜 말이 이렇게 많으냐?”
“…….”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미움받은 건가?’
다시 침대에 누운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여전히 설레는 마음에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명분을 얻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 노리개에서 남편이 되는 데까지 시간이 얼마나 들까?’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아주 차가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는 한 사람을 믿게 되면 일부러 거리를 유지하지도, 감정을 가지고 놀지도, 무의미한 시선과 규칙에 얽매이지도 않고 자신의 마음 가는 대로 행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야홍릉은 지금 이미 능묵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가 조금씩 그녀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과 그녀의 옆자리를 지키는 것을 용납하고 있다. 더불어 능묵은 부드럽고 은밀한 방법으로 그녀가 자신의 여인임을 강조하는 것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호감과 신임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능묵은 기분이 좋아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돌아누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매일 아침 햇살을 맞이할 수 있기를, 그리고 밤마다 같이 잠자리에 들 수 있기를 바랐다.
생각만 해도 그는 너무나 행복했다.
다음 날 아침.
야홍릉은 능묵의 따뜻한 시선을 받으며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청년의 준수한 이목구비와 부드러운 시선이었다. 야홍릉은 순간 당황했으나 곧바로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깬 것이냐?”
능묵은 눈을 깜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마 안 되었습니다.”
사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어젯밤은 그들이 처음 한 침대에서 자게 되었으니, 쉬이 잠들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전생에 야홍릉을 거의 만나지 못했고 가까운 거리에서 본 적은 더욱 적었다. 지금 어렵게 기회를 잡았으니 실컷 봐둘 생각이었다.
야홍릉은 침대에서 일어나 담담하게 말했다.
“침대에서 자는 게 불편하면 오늘 밤에는 탑으로 가서 자거라.”
능묵은 침묵을 지키다 바로 내려갔다. 그리고 무릎 한쪽을 꿇은 채, 침대 옆에서 그녀가 신발을 신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러면서 낮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자는 게 불편한 건 아닙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억울한 듯한 느낌이 담겨 있었다.
야홍릉은 시선을 내리깐 채, 그를 힐끗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일어서자 능묵은 손을 뻗어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그녀의 옷을 조심스레 입혀 주었다.
시녀처럼 세심한 손놀림이었다.
야홍릉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잘생긴 그의 얼굴이 유순해 보이기까지 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앞으로의 인생에도 이렇게 자신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친 그녀는 미간을 살짝 풀고 평온하게 말했다.
“오늘 구씨 가문과 봉청서가 누구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는지 알아보아라.”
“구굉 부자는 봉씨 가문의 마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능묵은 어젯밤 지붕 위에서 들은 얘기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럽고 다정하던 소년에서 바로 차갑고 날카로운 어영위로 변했다.
“목국 서남쪽은 위성에서 멀리 떨어진 편이라 구씨 가문에서 반역할 생각이 있는 게 아니라면 마장을 노릴 이유가 없는데 말입니다.”
마장도 수입이 적지 않았지만 마장의 관리와 말 사육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많은 인력과 정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구씨 가문의 능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게 따지면 그들이 돈 때문에 마장을 노린 것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마장보다는 제철과 제염 사업이 돈을 더 많이, 쉽게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반역을 꾸민다고 보기에는……
더 말이 안 되었다. 고작 위성의 지부가 아무리 간이 부어도 그렇게 비현실적인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야홍릉은 잠깐 생각을 해본 뒤, 말했다.
“야소숙에게 별다른 행동은 없었느냐?”
“사람을 보내 지켜보게 하였습니다. 주인님께서는 봉씨 가문의 일이 야소숙의 짓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건 아닐 텐데.’
야홍릉은 돌아서 세수하며 말했다.
“야소숙은 그렇게 멀리 내다보는 능력이 뛰어나지 않아. 그의 현재 소원은 금국과의 전쟁이 얼른 끝나서 제경으로 돌아가 적황자의 자리를 지키는 거겠지. 그리고 한씨 가문을 예전으로 돌리는 게 가장 큰 관심사일 거야. 다른 건 생각할 겨를도 없을 거다.”
능묵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역시 현명한 사람들은 생각하는 게 비슷하다고 하더니. 저 역시 주인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건 우연인가? 아니면 정말 마음이 통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