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총애받는 후궁이 되고 싶다
“헌원 황제도 나이가 많으실 텐데 걱정을 너무 끼쳐드리지는 말거라.”
야홍릉은 찻잔을 들고 가볍게 마셨다.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에 따뜻한 기운이 담겼다.
“남성국은 신을 신봉하는 나라가 아니냐? 백성들이 모두 신을 믿고 따른다고 하더구나. 네가 바로 신이 선택한 태자라고 묵백이 말했으니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마.”
능묵은 눈을 내리깐 채, 고민에 잠겼다. 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싫었다. 황권을 자신의 사랑보다 중요한 위치에 놓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 할아버지와 남성국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되었다.
그녀가 목국을 원한다면 그는 그녀를 목국 황제의 자리까지 올려놓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소원대로 목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 황제가 되어 목국 백성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그녀를 괴롭히거나 속이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능묵은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들고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이 세상을 원하십니까?”
야홍릉은 깜짝 놀랐다.
“목국뿐만 아니라 여섯 나라 모두 포함된 세상 말입니다.”
능묵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남다른 위엄이 담겨 있었다.
“만약 주인님이 원하신다면 전 최선을 다해 주인님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님이 천하의 유일한 제왕이 되어 수천, 수만 명의 사람을 굽어볼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누구도 주인님과 나란히 서지 못하게 말입니다.”
물론 그를 제외하고 말이다.
“잠깐.”
야홍릉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네가 천하를 통일시키고 싶었던 게…… 혹여 나 때문이었더냐?”
능묵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도 그녀를 위해서 그런 것이고 이번 생에도 그녀를 위해 세상을 통일시킬 것이다.
다만 전생에서 그는 그저 그녀를 황후의 자리에 앉히고 싶었는데 이번 생에 그는 그녀를 가장 고귀한 자리에 올리고 싶었다.
황후가 아닌 진정한 제왕의 자리에.
수천 년 동안 처음 나타난 여황제이자 유일한 여황제의 자리에.
야홍릉은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그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유일한 제왕이자 여황제.
얼마나 혹할 만한 말인가?
창밖은 조용하기만 했다. 밝은 불빛이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비추었다. 그녀의 눈에는 요즘 들어 자주 나타나는 설렘과 조금씩 녹는 마음이 보였다.
그녀는 그가 한 말 하나하나 모두 믿었다.
그가 그녀를 보필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그녀는 그의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사랑받는 느낌은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씩 녹이고 있었다.
야홍릉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차가운 돌덩이라도 매일같이 따뜻한 불로 덥힌다면 언젠가 따뜻하게 변하지 않겠어?’
이때,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춘란이 두 시녀를 데리고 따뜻한 음식을 가져왔다. 곧 먹음직한 음식이 식탁을 가득 채웠다.
“먼저 식사하세요. 주방에서 물을 끓이고 있으니 준비되는 대로 목욕물을 올리겠어요.”
춘란은 말을 마친 뒤, 시녀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야홍릉의 성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밥 먹을 때, 시중을 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탁에 마주앉아 능묵과 함께 조용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한참 뒤,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난 그렇게 야심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다. 목국의 황제가 되고 싶은 건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불만 때문이지.”
능묵은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들어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야. 난 그렇게 피곤하게 살고 싶지 않아.”
그녀는 평온한 어조로 담담하게 말했다.
“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항상 날 첫 자리에 둘 필요는 없어.”
여섯 개의 나라를 통일시킨다면 유일한 제왕은 그녀가 아니어야 했다.
그녀는 꿈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전 주인님을 천하의 주인으로 세우고 싶습니다.”
나지막한 능묵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저는 주인님이 세상을 굽어보는 가장 눈부신 여인으로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 모두 주인님을 존경하며…….”
“그리고 꼭두각시 황제 노릇을 하라고?”
야홍릉이 물었다.
그러자 능묵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꼭두각시 황제요?”
‘그럴 리가?’
말이 여기까지 나왔으니 야홍릉도 더 이상 모르는 척하지 않고 그와 툭 터놓고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가 난감한 상황에 놓이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능묵, 난 전생에 가장 믿던 사람들에게 모두 배신을 당했어. 이번 생에 다시 깨어났을 때, 나에게는 한밖에 남지 않았지.”
야홍릉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목국의 황제가 되려고 하는 이유는 내 죽음이 황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야.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것도 그렇고 아버지의 경계를 산 것도 모두 그 자리 때문이 아니냐?”
그래서 가장 완벽한 복수가 그 자리를 손에 넣어 전생에 그녀를 해코지했던 사람들이 그녀의 발밑에서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들이 가장 미울 때, 그녀는 그들을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미 그 증오가 사라졌다. 그녀가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완전히 외면하는 게 가장 큰 복수였다.
‘목국의 황위는 반드시 내 것이 될 거야. 그 상대가 야소숙이든, 야정연이든, 모두 그 자리를 손에 넣지 못할 거야.’
그러나 야홍릉은 한 번도 여섯 나라의 주인이 되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야심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만약 내가 정말 그 자리에 오른다면 영예와 함께 짊어질 책임도 늘어나겠지. 충신을 채용하고 간신을 제거하여 세상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도록 힘써야 하며 또 각 세력이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겠지. 그렇게 되면 수많은 시간과 정력을 조정에 쏟을 건데 그걸 두고 어찌 영예를 누린다고만 할 수 있겠느냐?”
야홍릉의 말투는 평온했으나 이성적이었다. 그녀는 권력이나 부귀영화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난 날 잘 알아. 난 그렇게 위대하지 않아. 그리고 평생 국가 대사에 시간과 정력을 쏟고 싶지도 않고.”
능묵이 대답했다.
“제가 주인님을 보필하겠습니다.”
“그러니 결국 나더러 꼭두각시 황제가 되라는 거지.”
야홍릉은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도 엄살을 부리는 게 아니야. 넌 날 위해 세상을 통일시키고 날 대신해 천하를 다스리겠지. 그러면 그 천하가 누구의 것이냐? 누구의 자리여야 맞는 것이겠느냐? 세상을 통일시킨 것도 너고 나를 다스리는 것도 너라면 당연히 이 천하는 네 것이어야지. 네가 날 좋아한다고 내가 이 영예를 누리게 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아.”
게다가 문무백관과 백성들도 바보가 아니었다. 많은 일은 직접 대면하고 보면 그렇게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만약 환상이 현실로 된다면 대면해야 할 문제점도 나타날 것이다.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고 해도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럴 바엔 왜 굳이 쓸데없는 고생을 하겠는가?
“그 꿈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난 사실이라고 믿기로 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넌 이 세상의 주인이니 그 영광을 누려야 하는 사람도 너지. 날 위해 굳이 자신을 낮추지 말거라.”
“전 제가 스스로를 낮추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능묵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주인님이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도 더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야홍릉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좋고.”
둘은 더 이상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뒤, 능묵은 야홍릉의 목욕 시중을 들며 노리개의 역할에 충실했다.
봉씨 가문 부자는 오늘 밤 할 일이 많을 것이다.
봉청서 역시 그들의 가족이니 그를 어떻게 할지는 다른 사람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었다.
목욕을 마친 능묵은 하얀색 침의를 입고 침대에 꿇어앉아 야홍릉의 어깨를 주물렀다. 하얀색 침의 사이로 드러난 하얀 목과 쇄골이 잘생긴 얼굴과 어우러지며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야홍릉은 엎드리고 있어 이 광경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 풍기는 옅은 향내를 맡자 마음이 편해졌다.
창밖에서 밤바람이 불어오자 침대보가 가볍게 흔들렸다. 향로 안의 연기가 퍼지며 촛불 불빛 속에서 몽실몽실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방 안의 분위기는 조용하고 부드럽기만 했다.
능묵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
“제가 남성국의 황제가 되고 주인님은 목국의 여황제가 된다면 우리 둘은 떨어져 있을 텐데…… 하지만 저는 주인님과 멀리 떨어져 있고 싶지 않습니다. 매일 밤 달을 바라보며 사모의 정을 호소하기 싫어요.”
방 안 공기가 조용해졌다.
야홍릉은 그의 말에 담긴 뜻을 생각해 본 야홍릉은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무 멀리 생각한 것 아니냐?”
“멀지 않습니다.”
능묵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인님이 열여덟 살이 되는 생신에 제가 반드시 주인님을 제왕의 자리에 올릴 겁니다. 그리고…… 인륜지 대사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지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생일은 음력 섣달이고 지금은 칠 월이니 열여덟 생일날까지 일 년 반 남짓하게 남아 있었다.
‘자신이 넘치는군. 그리고 누가 황위에 오른 뒤, 바로 인륜지 대사에 대해 생각한다고 했어?’
“황위에 오른 뒤, 난 간택할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후궁을 잔뜩 들일 것이다.”
이 말에 능묵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야홍릉의 하얀 목덜미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전 가장 총애받는 후궁이 될 것입니다.”
‘가장 총애받는 후궁이라고?’
야홍릉은 멈칫했다.
“권력이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니고?”
정실이야말로 권력이 가장 강할 것이다.
“정실은 너그럽고 모든 것을 품어줘야 하며 제멋대로 총애를 다투어서도 안 되지요. 심지어 질투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능묵이 대답했다.
“전 지금도 노리개이니 정실이고 말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꼭 당당하게 총애를 바랄 수 있는 자리에 있고 싶습니다.”
아무튼 그는 무공이 강하니 누가 정실로 있든 그녀의 총애를 받지 못할 것이다.
누가 야홍릉에게 끼라도 부린다면 바로 죽일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얼굴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었다. 아직까지 목국에는 외모로 그를 이길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싫어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