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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35)화 (136/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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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전 이 신분이 좋습니다

능묵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이 여인은 무공이 뛰어나 전쟁을 잘 치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격도 일반적인 여인들과 달랐다. 도도하고 제멋대로이며 영리하고 똑똑했다.

조금만 긴장을 늦춘다면 그녀에게 말려들 것이다.

능묵은 눈을 내리깔았다. 어떻게 거짓말한 죄를 해명할까 고민하는 듯했다.

한참 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계편이 아직 있습니다. 주인님, 화가 나신다면 절 벌하여 주십시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눈빛이 이상하게 빛났다.

‘벌을 받겠다고?’

“내가 사람 때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냐?”

능묵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다만 제가 잘못을 저질렀으니…….”

“내 원칙을 건드린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니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속이지 말거라.”

능묵은 시선을 들고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인님, 공주부에서 자로 제 손바닥을 때렸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야홍릉은 말없이 있다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왜? 내 폭행에 대해 하소연이라도 하려는 것이냐?”

“아닙니다.”

능묵은 다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전 그저 그때의 느낌이…… 아주 좋았습니다. 당시에는 기억이 없었지만 주인님이 아주 부드러운 분 같았고 주인님을 만난 게 제 인생의 행운으로 느껴졌습니다.”

무뚝뚝하던 사람이 갑자기 달콤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야홍릉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괜한 생각을 했구나. 난 그저 네가 멍청한 것 같아서 글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그래야 앞으로 사용하기 편할 게 아니냐? 네가 그 행위를 부드럽다고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날 만난 건 네 인생의 행운이 아니다. 이건 네가 스스로 계획한 일이지 않으냐? 이런 듣기 좋은 말로 날 현혹시키려고 하지 말아라. 소용없으니.”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녀의 말은 차갑게 들리지만 그는 그녀가 말하는 것이 좋았다.

아니, 그녀의 성격 자체가 좋았다.

전생에서 그녀에게 푹 빠져 있더니 이번 생에도 마찬가지였다.

전생에 그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기회는커녕 그녀와 말 한 번 붙여보지 못했다.

가끔씩 전쟁터로 나가 멀리서 지켜보는 게 다였다. 운이 좋으면 그녀가 병사들에게 명령하는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이 또한 그에게 강한 실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면 그는 그녀를 훔쳐볼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전생에 그녀를 오랫동안 좋아했지만 결국 그녀를 잃고 말았다.

심지어 말도 한 번 못해보고 그녀를 떠나 보냈다. 그래서 이번 생에는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리고 싶고 매일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녀의 옆에 몇 달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차갑고 말투도 싸늘했다.

그러나 그는 기억이 없으면서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좋아했다. 기억이 없었지만 그녀의 기분은 항상 그의 정서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기분이 나쁠까, 그녀가 화를 낼까 두려워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그녀의 엄격하던 모습이 그리웠다.

“전 진심을 얘기한 것이지 주인님을 현혹할 생각이 없습니다.”

능묵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덤덤한 그의 말투에는 다정함이 묻어났다.

“제 마음도 참 복잡합니다. 기억이 돌아오기 전처럼 매일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되지만 또 주인님이 저에게 글을 가르쳐 줄 때가 그립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으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요.”

이 말을 들은 야홍릉은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학대당하는 걸 좋아하느냐?”

그녀는 능묵이 왜 그녀가 글을 가르쳐 줄 때를 그리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르침을 받는 게 좋은 건가? 아니면 손바닥을 맞는 느낌이 좋은 건가?’

능묵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러나 주인님이 때리시는 거라면 달게 맞겠습니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달게 맞아? 취향이 참 특이하네.’

“가서 자거라.”

야홍릉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능묵은 고개를 저었다.

“전 주인님이 하시는 말씀을 더 듣고 싶습니다.”

숨길 수가 없으니 그는 자신의 마음을 더욱 드러낼 생각이었다.

야홍릉의 표정이 더욱 이상하게 변했다.

“무슨 얘기가 듣고 싶더냐?”

“아무거나 다 좋습니다.”

그가 말했다.

“차가운 말씀도 좋고 부드럽게 하시는 말씀도 좋습니다. 주인님이 말씀하시는 거라면 다 좋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눈빛은 후회와 고통으로 물들어 있었다.

“전생에 너무 많은 것을 하지 못했지요. 그때의 일을 떠올릴 때면 제가 참 멍청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번 생에는 주인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에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주인님을 보고 주인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니까요.”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렇게 깊은 마음을 잘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녀도 전생에 한옥금을 좋아한 적이 있었고 그를 위해 갑옷을 입기도 하고 병권을 내놓기도 했지만 헌원용수처럼 진지한 마음은 왠지 낯설었다.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의 말에 감동 받았다.

“앞으로 자신을 낮출 필요 없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왠지 부드러워진 듯했다.

“그리고 날 주인님이라고도 부르지 말고. 이건 너에 대한 모욕이야.”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

“그럼 평생 어영위의 신분으로 내 곁에 있을 생각이라는 거냐?”

능묵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 침착하게 말했다.

“주인님께 필요하다면 전 평생 주인님의 영위입니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면 제가 어영위가 아니더라도 절 내쫓지 않는다고 약조해 주십시오.”

야홍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지금 나에게 조건을 거는 것이냐?”

능묵은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볼 수 있지요. 그러나 결정권은 주인님께 있으니 주인님이 어떤 결정을 하시든 전 그 결정에 따를 겁니다.”

능묵은 선을 살짝살짝 넘으면서도 공손하게 물러설 줄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앞에서 항상 공손한 모습을 고수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사랑을 대하는 태도였다.

예나 지금이나, 아니면 앞으로나 그는 영원히 결정권을 그녀에게 줄 것이고 그는 영원히 그녀의 결정을 따를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과 태도와 생각까지 모두 숨김없이 그녀의 앞에 드러냈다.

야홍릉은 지금의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렇게 진지하고 순수한 진심을 절대 무시하고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짓밟는 방법으로 우월감을 느끼거나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평온한 얼굴로 승낙했다.

“난 널 내쫓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이미 기억을 회복했으니 내 아랫사람이 아닌 나와 평등한 사이로 지냈으면 좋겠구나.”

능묵은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어영위의 신분이 좋습니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고집이 왜 이렇게 세지?’

“그리고 노리개 신분도요.”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 이 특별한 신분이 좋습니다. 당당하게 주인님의 사랑을 구걸할 수 있으니까요.”

야홍릉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능묵이 그렇게 뒤흔들고 간 탓에 야홍릉은 축시(醜時, 새벽 1시~3시)가 될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아침에 날이 밝자마자 깨어난 그녀는 두 시진도 자지 못한 것을 발견했다.

다행히 둘 다 무공이 강한 사람인데다 어제 오후에 야홍릉은 잠을 보충했기에 아침에 일어났을 때, 피곤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능묵은 일어나자마자 야홍릉이 씻는 것을 돕고 또 그녀의 옷을 가져온 뒤, 직접 그녀의 머리를 빗어 주었다.

“남장으로 하지.”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움직이기는 그게 편해.”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밖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계 어멈이 들어오며 공손하게 보고를 올렸다.

“전하, 영형 군주가 사람을 시켜 초대장을 보내왔습니다. 묵 공자께 직접 열어보라고 했습니다.”

‘묵 공자?’

야홍릉은 고개를 돌려 능묵을 바라보았다. 둘이 시선을 마주치자 짧은 정적이 흘렀다.

“태우시게.”

능묵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의 옷을 정리했다. 그는 그 사람이 누군지, 그 사람이 보낸 초대장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전혀 관심 없는 표정이었다.

‘뭐라고?’

계 어멈은 멈칫했다. 순간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준수한 청년을 바라보며 그녀는 다시 한 번 되물었다.

“태우라고요?”

능묵은 무표정한 얼굴로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신을 가져오너라.”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서신을 보낸다고? 영형 군주라는 자는 참 신기한 사람이군.’

“네.”

계 어멈은 걸어가 두 손으로 꽃을 붙인 초대장을 건넸다.

“보내온 사람이 그러는데 영형 군주가 오늘 저택에서 꽃구경 연회를 여니 묵 공자더러 참석해 달라고 한답니다.”

야홍릉은 초대장을 받아 들고 고개를 돌려 능묵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인데?”

그게 아니면 어떻게 그를 꼭 집어서 초대했겠는가?

능묵은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전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야홍릉은 침묵했다.

영형 군주가 누군지 그녀는 대충 알고 있었다.

사흘 전 저녁.

영린이 마련한 연회에서 영가가 능묵의 신분과 이름을 물은 적이 있었다. 영린은 사람들 앞에서 능묵이 평양 공주의 노리개라고 했고 묵백은 그의 이름이 묵수라고 했다.

그래서 영형이 그를 ‘묵 공자’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연회가 끝난 뒤, 영묘언이 직접 그녀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영형이 능묵을 마음에 들어 하고 또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는 말을 했다고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야홍릉은 투덜거리는 영묘언의 말을 크게 담아두지 않았다.

그녀는 ‘돼지 목’이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능묵과 공주부에 도착한 지 하루 만에 영형이 초대장을 보낼 줄이야?

“꽃구경 연회?”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제경의 귀족 소저들은 모두 심심한가 보네? 툭하면 꽃구경 연회를 마련하게.”

며칠 전에 영가가 하자마자 영형이 또 마련한다고 하니 이상했다.

능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런가 봅니다.”

그러나 영형의 아버지는 권력이 없어 그녀는 군주로서 존재감이 강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당당하게 묵 공자를 초대할 수 있은 것은 그의 신분이 노리개인 것을 보고 그를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우월감일 가능성이 컸다.

그게 아니라면 권세가 없는 가문의 군주가 어찌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평양 공주 앞에서 이렇게 무례하게 굴지 못했을 것이다.

야홍릉은 초대장을 탁자에 올려놓은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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