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어디까지 기억하느냐
묵백은 미간을 찌푸리고 온화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용수야, 넌 지금 세상 대사에 관심을 가져야지 자신과 연관이 없는 사람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야.”
“감진은 그분의 측부인데 어떻게 저와 연관이 없는 사람입니까?”
묵백은 입가를 실룩였다.
“네가 말만 하면 감진은 분명 공주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야.”
공주부는 감진을 가둘 수 있는 곳이 못 되었다.
한담을 나눈 끝에 묵백은 능묵을 서재로 초대했다.
능묵의 기억이 회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얘기할 게 많았다. 이미 사람을 꽂아 넣고 계획을 세웠으니 자세한 부분을 조종하고도 다른 계획들도 잘 진행하고 있는지 살펴야 했다.
둘은 서재에서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떠나기 전에 묵백이 말했다.
“네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남성국을 떠나서 그동안 내가 둘러대고 있었다. 시간이 되면 남성국으로 돌아가 폐하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게 어떠냐?”
고결하고 고귀한 대제사는 그 때문에 속세에 깊이 들어온 것도 모자라 거짓말까지 하면서 남성국의 대신들을 속였다.
오랫동안 남성국에 돌아가지 않은 그는 황태자를 보필한다는 핑계를 대지 않았다면 남성국 신하들에게 시달렸을 것이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능묵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때 그들을 무슨 이유로 설득한 것입니까?”
“뭐겠어? 당연히 천하를 손에 넣는다고 했지.”
묵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어린 나이에 큰 포부를 가지고 있으나 무고한 백성들이 전쟁 속에서 허덕이는 것을 볼 수 없어 몰래 계획을 하고 있다고 말했어. 그러다 네가 다시 황태자의 자리에 돌아왔을 때면 세상을 손에 넣었을 거라고.”
황태자가 한 여인을 위해 다른 나라로 가서 영위 노릇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면 신하들이 난리를 칠 것이다.
능묵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대제사는 고결하고 성실함의 대명사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말을 잘하는 강호의 사람 같았다.
묵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서 얼른 돌아가라는 거야. 날 거짓말쟁이로 만들지 말고.”
묵백이 남성국 대신들에게 한 말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터무니없는 거짓말인 것도 아니었다.
용수의 능력과 묵백이 그동안 진행한 계획을 보면 짧은 시간 안에 천하를 통일시키는 것은 불가능해도 대체적인 상황은 통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용수가 돌아가 남성국 신하들에게 적당한 해명을 하면 되었다. 그렇게 한다면 대제사가 황제를 속이고 있다는 누명도 벗을 뿐만 아니라 남성국 사람들은 여전히 대제사를 몸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라고 여길 것이다.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 침묵을 지키다 말없이 떠났다.
* * *
야홍릉은 홀로 유영수사에서 점심을 들었다.
식사를 마친 뒤, 영일이 최신 소식을 가지고 왔다.
대다수는 영영이 목국에서 보낸 정보였다.
야소숙과 어린 황제의 왕래에 대해 영일은 알아보았지만 시간이 짧아 증거가 부족했다.
“야소숙의 일은 더 알아볼 필요가 없다.”
야홍릉은 일어서며 그에게 물건을 보여 주었다.
비밀 편지와 명부책이었다.
“이 증거를 가져다 영영에게 주어라. 그더러 이것을 4황자에게 전하라고 하고. 단 꼭 조용히 진행해야 한다.”
영일이 대답했다.
“네.”
“그리고 야정연이 그가 적과 내통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슬쩍 흘리거라.”
“네, 알겠습니다.”
야정연은 꿍꿍이가 깊고 조심스러운 사람이라 이 증거를 손에 넣어도 당분간은 야소숙을 공격하지 않고 적당한 시기를 노릴 것이다.
그러나 야소숙이 이걸 알게 된다면 불안하여 야정연을 공격하려고 들 것이다.
야소숙은 황후의 적자라는 강점이 있는 반면, 야정연은 속이 깊고 능력이 출중했다.
만약 야소숙이 불리한 상황에 놓인 데다 야정연이 이 년간 준비를 잘한다면 목국 황위는 그의 것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먼저 이 둘더러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해야 한다.
둘 다 다치는 것이 야홍릉으로선 좋은 일이었다.
영일이 떠난 뒤, 야홍릉은 방으로 들어가 창가에 앉았다.
그녀는 편한 자세로 기대앉아 생각에 잠겼다.
궁에서 사흘 동안 자긴 했지만 자는 동안 머릿속으로 꿈 같은 상황을 계속 지켜보아서 그런지 푹 쉰 느낌이 없었다. 창문에서 미풍이 불어 들어오며 시원한 기운이 풍겼다. 그녀는 편한 나머지 탑에 기댄 채, 소르르 잠이 들었다.
침전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유영수사 안을 책임진 네 궁녀는 멀리 서서 소리를 내지 않았다.
네 명 모두 열일여덟 살 정도로, 청순한 외모에 행동거지가 차분했다. 궁에서 엄격한 훈련을 받은 그녀들은 눈치가 빠르고 언제 뭘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평양 공주가 저택에 들어온 첫날에 그들은 이 공주가 차가운 성미를 가진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이 귀찮게 구는 것을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꼭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그들은 되도록 멀리 떨어져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무작정 멀리 떨어져 있을 수는 없었다. 주인이 분부했을 때, 그들은 바로 듣고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주인이 분부하지 않을 때에는 공기처럼 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능묵은 유영수사에 도착했다.
그는 창가 앞에서 잠든 여인의 얼굴을 보더니 발걸음소리를 낮추고 말없이 손을 저어 네 명의 시녀를 내보냈다.
창가 앞까지 걸어간 그는 여인의 잠든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아무리 보아도 부족한 기분만 들었다.
창문으로 비춰 들어오는 빛이 좀 강한 탓에 그녀는 불편한 듯했다.
능묵은 앞으로 걸어가 그녀를 안은 뒤, 안방의 침대에 올려놓았다.
“……왔느냐?”
야홍릉은 눈을 뜨지 않았으나 자신을 안은 사람이 누구인지 눈치챈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알아보았느냐?”
능묵은 시선을 내리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아냈습니다.”
야홍릉은 낮게 대답했다.
능묵은 그녀를 침대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주인님, 피곤하십니까? 좀 더 주무시겠습니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눈을 감은 모습이 피곤한 듯했다.
“소문을 퍼뜨린 자는 안국공부의 측부인이었습니다.”
능묵은 무릎을 반쯤 꿇은 채로 침대 앞에 앉아 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공손하기만 했다.
“위 국구의 서출 누님이자 현 태후의 서출 동생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야홍릉은 가장 먼저 든 생각이 그녀가 왜 이런 소문을 퍼뜨렸는지가 아니었다.
태후의 여동생이나 되는 여인이 다른 사람의 첩실로 들어간 것이 의아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아무리 서출이라고 해도 신분이 조금 낮은 집에 부인으로 들어가는 것이 귀족의 첩실로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었다.
멀쩡한 가문의 여식들 중에 첩실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게다가 언니가 태후인데 첩실로 들어간 게 이상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야홍릉은 눈을 뜨고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태후가 지시한 일은 아닐 것이다.”
“네, 후소우와 조기헌이 저지른 일입니다.”
능묵이 대답했다.
“후소우는 안국공의 적자인데 그가 협박을 하고 이익으로 꼬시니 위씨가 따른 듯합니다.”
야홍릉은 관심이 없는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철없는 귀족 자제가 벌인 장난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주인님.”
“응?”
“노리개의 직책에 잠자리도 포함되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침전은 조용하기만 했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잠자리?”
능묵은 그녀를 바라보더니 시선을 내리깔고 공손한 얼굴로 대답했다.
“주인님께서 원하시지 않는다면…….”
“허, 욕심이 끝도 없구나.”
야홍릉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말투에서는 특별한 정서를 읽을 수 없었다.
능묵은 입을 꽉 다문 채, 눈을 내리깔았다.
준수한 얼굴은 온화하고 순진하게만 비춰졌다. 정말 고분고분한 노리개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말에 야홍릉은 잠기가 확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일어서서 침대머리에 기대앉으며 담담하게 물었다.
“나간 지 한참 되었는데 겨우 소문에 관한 일만 알아낸 것이냐?”
능묵이 대답했다.
“그리고 영린과 감진의 사이도 알아냈습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영린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 영린이 더이상 야소숙과 왕래하지 않겠다고 명확하게 얘기한 데다 그녀에게 증거까지 주었기에 당분간 그녀가 걱정할 일은 없는 듯했다.
게다가 그녀가 동제에 온 것은 영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젠 영가도 만나 보았고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게 되었다.
영린이 목국에 다른 생각을 품지 않는 한, 영가는 위험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영린과 영위의 사이는……
사실 이 둘의 사이도 그녀와 크게 상관이 없었으나 봉회근과 협력하고 또 며칠 동안 섭정왕부에서 지냈으니 정이 조금이나마 쌓인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동제의 일은 이 정도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녀는 당분간 동제에 올 생각이 없었다.
야홍릉은 노리개가 할 일에 잠자리가 포함되어 있는지에 대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정원에서 산책하며 공기 중에 맴도는 상큼한 향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간만에 보내는 한적한 시간이었다.
능묵은 그림자처럼 그녀의 뒤를 따르며 수시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울적하기만 했다.
“묵백이 동제에 있는 것은 영린 때문이냐, 아니면 너 때문이냐?”
평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고즈넉한 밤과 잘 어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의 마음을 울렸다.
그는 고양이가 할퀴는 것처럼 마음이 저릿해졌다.
능묵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내리깐 채,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영린 때문일 것입니다.”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하느냐?”
능묵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그래, 뭘 보고 이렇게 생각한 거지?’
묵백과 영린은 사적으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만약 영린 때문만이라면 말이 안 되었다.
‘하지만 나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능묵은 미간을 찌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추측일 뿐,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야홍릉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네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해는 언제냐?”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능묵은 야홍릉이 일부러 물어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질문을 그녀는 어제도 했기 때문이었다.
한참 생각을 해본 끝에 그는 어제 태극궁의 밀실에서 깨어났을 때, 남제를 떠난 뒤의 기억이 없다고 말한 것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제를 떠난 뒤, 전 남성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야홍릉은 눈을 깜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성국에 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대신들은 수많은 성인이 된 황자를 놔두고 어린아이를 태자로 세우는 것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헌원씨 황자들도 갑작스러운 저의 출현에 당황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