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혹 묵백 대인의 사촌이신…….”
경장 남자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능묵은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일어나거라.”
경장 남자는 일어서더니 잠깐 머뭇거리다 회랑으로 올라와 허리를 숙였다.
“전하께서 갑자기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이 저택은 영린이 묵백에게 준 거처이긴 하지만 저택의 호원은 대다수가 남성국 소속이었다. 묵백은 많은 영위와 첩자를 동제에 심어 두었다. 능묵이 기억을 잃기 전에 많은 사람들을 목국에 보낸 것과 마찬가지였다.
모두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가 남성국의 황태자인 헌원용수에게 충성하기 위해서임을 알고 있었다.
능묵이 기억을 잃은 동안, 그를 위해 남성국을 지키며 모든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가 있었기에 그 누구도 헌원용수가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려 일을 저지르지 못했다.
그래서 수많은 세월이 지났어도 ‘헌원’이라는 두 글자에 경장 남자는 능묵의 신분을 파악한 것이다. 묵백의 저택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고 헌원 성씨를 가진 남자는 남성국의 황태자 헌원용수를 제외하고 더는 없었다.
잠깐 침묵을 지킨 뒤, 능묵이 말했다.
“최근 들어 제경에서 평양 공주와 황제에 관한 불미스러운 소문이 퍼지고 있던데 배후의 주모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거라.”
경장 남자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는 능묵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위 국구의 서출 누님이자 안국공부의 측부인인 위씨입니다.”
위 국구에게는 누님이 두 명 있었다.
현재 태후로 있는 적녀. 그리고 서출인 안국공부의 측부인.
그러나 안국공부의 측부인은 제경 귀족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귀족들은 문벌을 크게 따지는 데다가 적출과 서출의 차이가 커서 위씨는 시집가기 전부터 어디 나설 수 없는 신분이었다. 안국공부의 측부인이 된 뒤에도 조심스럽게 행동했기에 그녀에 관한 소식은 알려진 게 아주 적었다.
능묵이 실눈을 뜨고 물었다.
“위씨?”
“네.”
경장 남자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위씨와 안국공부의 혼사는 현재 태후가 직접 지시한 일입니다. 태후는 이 여동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위 국구 역시 위씨에 대한 태도 역시 뜨뜻미지근합니다. 위씨는 믿을 만한 배후가 없으니 안국공부에서도 조심스럽게 살고 있는 줄로 압니다.”
조심스럽게 사는 사람이 간 크게 황제에 관한 헛소문을 만들어 퍼뜨렸다는 말인가?
‘그렇게 간이 클 수 있을까? 분명 누군가 지시한 일이야.’
“누가 지시한 일이냐? 위 국구?”
능묵이 물었다.
가장 가능성이 큰 인물은 태후였으나 그녀는 그렇게 할 이유가 없었다.
영린은 아직 직접 정무를 보지 않았다. 열네다섯 살은 이성에 눈을 뜨는 시기였다.
황족의 규칙으로 보면 아직 황후나 비를 뽑지 않았다고 해도 궁녀 중에 황제의 잠자리 시중을 드는 궁녀가 따로 있었다.
황제가 여인과 잠자리를 원한다고 해도 큰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태후는 자신의 아들이 신분도 확실하지 않은 여인과 엮이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여인은 황제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태후는 괜한 헛소문을 퍼뜨려 둘 사이를 확정 짓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능묵은 위 국구를 떠올린 것이다.
그러나 곧 이 가능성도 배제해버렸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궁금하시다면 바로 사람을 보내 자초지종을 알아보겠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능묵이 아직 신분을 회복하지 않았고 평양 공주와 황제 역시 소문에 연연하지 않는 데다 묵백 대인도 이 일에 관심이 없어 보이자 그들은 소문에 관한 일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었다.
“점심 전까지 결과를 알아야겠다.”
“네.”
경장 남자는 공손하게 대답한 뒤, 돌아서서 떠나갔다.
검은색 장포를 입은 묵백이 느긋한 발걸음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경장 남자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그러나 묻지 않고 회랑에 올라와 온화한 미소를 띠었다.
“헛소문일 뿐인데 왜 이렇게 신경을 쓰고 있어?”
능묵은 고개를 돌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헛소문이 퍼지는 걸 진작 알고 있었으면서 왜 막지 않으셨습니까?”
묵백은 어깨를 으쓱했다.
“폐하도 뭐라고 하지 않는데 내가 왜 막아?”
능묵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들 헛소문인 줄 알고 있어. 유언비어를 퍼뜨린 사람도 그것이 진짜라고 믿지 않을 거야. 믿는 사람들은 그저 호기심 그러는 것이니 너무 신경 쓸 것 없어.”
묵백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문에 신경 쓰기보다 얼른 공주 전하가 저택의 측부를 내보내 네 자리를 만들어주게 해야지.”
그 말을 들은 능묵은 잠깐 침묵하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건 급하지 않습니다.”
측부는 명분일 뿐이다.
정말 그녀에게 눈독 들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목국 공주부에 있어으니 당장은 야홍릉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그러니 그들을 내보내는 것도 나중의 일이었다. 만약 야홍릉이 목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측부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묵백은 그를 힐끗 보았다.
‘급하지 않다고? 급해도 소용없는 거겠지?’
호국 공주는 일반적인 여인과 달랐다.
헌원용수 같은 신분이라도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자면 정성을 꽤 들여야 할 것이다.
게다가 야홍릉은 성격이 좀 이상했다. 나중에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더라도 그녀의 행동까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 황위에 올라 후궁을 잔뜩 들이고 싶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능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요.”
묵백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난하는 거지?”
‘얼마나 너그러워야 이런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거야?’
“장난 아닙니다.”
능묵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원하는 거라면 다 이루게 해줄 겁니다.”
묵백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세상에서 그가 가장 탄복하는 사람이라면 전생과 이번 생을 막론하고 그 사람은 헌원용수뿐일 것이다.
그가 전생에 남제를 떠날 때 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다.
아홉 살 전의 삶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용수는 남제의 황궁에서 잘 지내지 못했는데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어머니의 보호가 없었던 그는 황자라는 신분을 제외하고는 대우가 고아와 다르지 않았다.
먹고 입는 것도 다른 황자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어른이라면 그나마 버틸 수 있었겠지만 어린아이인 그가 어떻게 그 시간을 견딘 것인지 묵백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견뎠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것이 능묵은 자신의 처참한 환경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말을 하고 걸음마를 떼고부터 그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을 책을 읽고 글을 읽히며 무예를 닦고 병법을 연구하는 데 썼다.
그 몇 년의 시간을 한결같이 말이다.
물론 용수도 스승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성녀는 죽기 직전에 능력이 뛰어난 스승에게 아이를 맡겼다. 그녀는 스승이 아이의 일상적인 생활을 도와주고 생존 법칙 같은 것을 가르쳐 주기 바랐다.
그러나 이 아이가 뛰어난 천부적인 재질을 보이며 뭐든 빠르게 배우자 스승이 가르쳐야 할 것도 점점 많아졌다.
아이는 영리하고 듬직하며 차분했다.
그는 남성국의 황태자가 되고 장차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이 될 운명이었다.
헌원 황제와 함께 남성국에 돌아온 뒤에도 그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뛰어난 능력으로 남성국의 신하들을 탄복시켜 사람들에게 그가 장차 제왕으로 손색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세 살 어린애를 보면 그 사람의 미래가 보인다고 한다.
아홉 살 아이는 세 살 어린애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아이의 뛰어난 능력, 박력과 패기, 분위기에 사람들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묵백은 이때까지만 해도 용수가 훌륭한 태자감이고 장차 제왕이 될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는 이 이유로 용수에게 탄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헌원용수가 한 행동을 보고 묵백은 그가 세상 남자들과 아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헌원용수는 한 여인을 사랑하면서 몇 년 동안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여인을 위해 한순간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 곤룐산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삼천 리나 걸었다.
묵백은 용수의 집념이 그의 능력과 패기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했다.
용수는 집념이 강할 뿐만 아니라 허리를 굽힐 줄도 알고 있었다.
물론 이 점은 야홍릉을 향한 감정에서밖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용수가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허리를 숙이는 모습에 묵백은 놀랍기만 했다.
그는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왜 기억을 회복한 사실을 숨기는 것인데?”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주가 널 버릴까 두려워서 그러는 거냐?”
묵백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게도 자신이 없어?”
능묵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묵백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궁에서 보았던 능묵의 반응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괜히 네 꾀에 당할 수 있어.”
능묵은 더 말할 생각이 없는 듯, 화제를 돌렸다.
“영린과 감진은 무슨 사이입니까?”
전생에 헌원용수와 영린은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둘이 모두 신령에게 빌어 운명을 바꿀 기회를 얻었지만 제사전에서 본 게 다였다.
만났다고는 하나 그때 둘 모두 슬픔에 잠겨 있어 서로에 대해 알아보거나 대화할 기분이 없었다.
감진은 지금 그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전생에 헌원용수와 감진은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묵백은 침묵을 지키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둘의 사이는…… 말하기 좀 어려워.”
‘말하기 어렵다고?’
능묵은 미간을 찌푸렸다.
문득 뭔가가 떠오른 그는 묵백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단수(斷袖, 남성 사이의 동성애를 뜻하는 고사)입니까?”
묵백은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그럴 수도 있고 그게 아닐 수도 있어. 나도 영린의 마음을 완전히는 모르겠지만 그가 예전에 감진에게 미안한 일을 한 것은 알고 있지.”
능묵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얘기해 보세요.”
묵백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가 언제부터 남 일에 이렇게 관심이 많았냐?”
“그분이 물으시면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능묵은 무표정한 얼굴로 평온하게 대답했다.
“감진은 제가 빙란각에 심어 둔 첩자입니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뭔가를 요구하기도 했지요. 그 원인이 영린과 연관되어 있습니까?”
묵백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감진이 스스로 뭔가를 요구했다고?”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묵백은 눈을 내리깔고 난간에 기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영린이 속죄하는 게 그가 상상하던 것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겠구나.”
“알아듣게 얘기해 주십시오.”
능묵은 고개를 돌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영린이 도대체 감진에게 무슨 미안한 짓을 했다는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