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존함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저와 폐하는 특별한 사이가 아닙니다.”
야홍릉이 평온하게 대답했다.
“궁의 묵백 대인과 잘 아는 사이입니다. 사흘 동안 궁에 있은 건 그와 할 얘기가 있어서지, 폐하와 함께 지낸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을 들은 섭정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헛소문은 퍼지게 놔두면 안됩니다. 공주 전하,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좋은 방법?’
야홍릉은 소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섭정왕비의 말을 들은 그녀는 잠간 침묵하다가 말했다.
“소문은 결국 지혜로운 자로 인해 끝나게 될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들은 소문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소문이 크게 퍼지는 것은 다른 마음을 먹은 사람들이 꾸미는 꿍꿍이에 불과했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문이 얼마나 황당한지 알 것이다.
“소문을 완전히 끝내려고 하신다면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능묵이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의 말투는 차분하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인님과 저의 관계를 알리기만 한다면 소문은 스스로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
이 말에 섭정왕비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야홍릉의 옆에 서 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아주 잘생긴 귀공자였다.
“자네와 공주의 사이라고?”
능묵은 그를 힐끗 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 공주 전하의 노리개입니다.”
이 말에 섭정왕비의 표정이 굳어지고 말았다.
‘노리개?’
야홍릉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조금 미묘해졌다.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노리개라고 소개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모를까 걱정해 이렇게 떠벌리는 것이란 말인가?
분위기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야홍릉은 평온한 얼굴로 차를 마실 뿐, 둘의 관계를 모두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능묵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영묘언은 너무 놀라서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역용액을 지운 뒤에도 능묵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영린과 묵백을 제외하고 영묘언밖에 없었다.
그녀는 부모님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능묵의 신분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섭정왕비는 능묵이 바로 저번에 본 평범한 얼굴의 시위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어영위는 원래 말수가 적어서 야홍릉이 섭정왕부에 있는 동안에서 섭정왕비는 능묵이 하는 말을 한두 마디밖에 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목소리를 듣고도 그가 예전의 그 시위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짧은 침묵이 지난 뒤, 섭정왕비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야홍릉을 바라보며 물었다.
“공주 전하, 이 공자가 한 얘기가 사실인가요?”
그녀는 그저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젊은 공자가 스스로를 ‘노리개’라고 지칭할 때, 야홍릉은 반박하거나 제지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섭정왕비는 저도 모르게 황당한 추측을 하게 되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죠.”
노리개는 그가 원하는 것이고 그녀도 명확하게 반대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그를 노리개로 소개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조차도 노리개인 신분을 영광으로 생각하는데 그녀가 달리 할 말이 있겠는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섭정왕비의 표정이 순식간에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되었다.
‘노리개?’
많은 일을 겪고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는 데 능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표정 관리를 잘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가의 여인이 정조를 신경 쓰지 않고 사내는 자부심을 꺾다니…….’
풍류스러운 기루 출신의 소년이라고 해도 자신이 ‘노리개’ 신분이라고 태연히 소개할 수 없을 것이다.
황제가 직접 책봉한 평양 공주 역시 자신의 명예를 아랑곳하지 않고 노리개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는가?
세속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둘이서 아무렇지 않게 해낸 것이다.
섭정왕비는 기분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상인 출신이었지만 예전에 위성에 있을 때나 동제의 제경에 시집와서 지낸 십수 년 중에 평양 공주는 자신이 본 여인 중 가장 세속을 하찮게 여기는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평양 공주는 불만을 내비친 적이 없고 그저 자유롭고 제멋대로 살 뿐이었다.
그래서 얌전한 여인들과 많이 달랐다.
잠깐 침묵한 뒤, 그녀는 이 침묵을 깨뜨렸다.
“이 일은 공주 전하가 알아서 하세요. 전 더 이상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묘언아, 네 오라버니는 왜 아직 안 온다니?”
“왔습니다.”
봉회근이 회랑에서 걸어왔다. 장포를 입은 그는 훤칠하고 준수했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모와 공주 전하가 얘기를 나누시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오래 기다리게 하셨군요.”
그는 또 시선을 돌리고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볼일이 모두 끝나신 겁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일이 없으니 먼저 떠나도 될 것 같소.”
“그렇다면 내일 떠나시죠.”
봉회근은 옆에 앉으며 직접 차를 따랐다.
“공주 전하께서도 부귀영화에 별 관심이 없으시다면 잠시 피해서 소문이 잦아들기 기다리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소문들은 차츰 가라앉을 것이다.
야홍릉은 헛소문 때문에 곤혹을 치르지는 않았다.
바깥에서 떠도는 유언비어는 그녀에게 타격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목국에 있을 때에도 여섯 명의 측부를 들인 일로 수많은 소문에 시달렸으니 이 정도 소문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 일을 크게 벌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황제가 연루된 일이니 조금만 잘못해도 큰 화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야홍릉은 섭정왕부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는 봉회근과 내일 아침에 떠나기로 정한 뒤, 얘기를 좀 나누고 능묵과 함께 공주부로 돌아갔다.
영묘언은 그녀더러 점심 식사를 마치고 가라고 했지만 야홍릉은 거절했다.
둘 사이가 달라지자 마차에 오를 때도 능묵은 야홍릉이 말할 필요 없이 스스로 올랐다. 그리고 차 안에서도 야홍릉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앉았다.
야홍릉이 그더러 무릎을 꿇지 말라고 했기에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야홍릉은 그를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함께 공주부로 돌아온 뒤, 능묵은 말없이 야홍릉을 유영수사로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직접 차를 탔다.
야홍릉은 그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의 청년은 차를 타는 행동마저 우아하고 느긋했다.
탑 앞으로 간 능묵은 차를 야홍릉의 손 옆에 두고 입을 열었다.
“주인님, 먼저 앉아서 쉬고 계십시오. 제가 나가서 헛소문이 퍼진 원인을 알아보겠습니다.”
야홍릉은 그가 줄곧 이것을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능묵은 돌아서서 떠나갔다.
야홍릉은 탑에 앉은 뒤, 조용히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하얀색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키가 크고 몸이 훤칠했다.
그의 옆모습은 아름다웠고 윤기 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등에서 흘러내렸다.
차분하게 긴 회랑에서 걸어가는 그의 몸에서 감출 수 없는 고귀함이 보였다.
기억을 회복한 뒤로 그의 날카로운 기세는 더욱 뚜렷하게 느껴졌다. 일부러 그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패기였다.
‘노리개라고?’
야홍릉은 실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이 어두워져 있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 같은 사람이 어떻게 ‘노리개’라는 신분을 흔쾌히 받아들이는지 의아할 것이다. 평범한 사내라도 이런 신분으로 자신을 낮추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야홍릉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처럼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들은 신분이나 세속 예법, 규칙 같은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을 이루는 데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면 되었다.
그래서……
노리개라는 신분은 창피할지 몰라도 능묵에게는 야홍릉과 당당하게 가까이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찻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차향이 입안을 맴돌자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능묵은 야홍릉의 앞에서 굽신거리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제경에 야홍릉과 어린 황제에 대한 소문이 떠돌자 능묵은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직접 알아보지 않고 묵백의 저택으로 갔다.
궁에 있는 태극전을 제외하고 제경 중심 청룡 거리(靑龍街)에는 호화로운 저택이 한 채 더 있었다. 널찍하고 조용한 저택이었다.
묵백은 저택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궁에서 보냈다.
지금도 저택에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능묵은 묵백의 저택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아직 계단도 오르지 않았는데 두 문지기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차갑게 말했다.
“멈추시오!”
두 시위는 훤칠한 키에 깡마른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차분하고 날카로운 눈빛을 뿜고 있었는데 능묵은 그들에게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이는 오랜 훈련을 거친 영위에게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영위를 문지기로 쓰는 사람은 묵백 밖에 없을 것이다.
능묵은 팔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내 둘에게 보여주었다.
“궁에 들어가 묵백더러 돌아오라고 하거라. 내가 급한 용건이 있으니.”
말을 마친 그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두 영위는 허리를 숙인 채, 뒤로 물러섰다.
능묵이 대문에 들어서자 그중 한 명은 바로 돌아서서 황궁으로 나는 듯이 뛰어갔다.
묵백의 저택에는 인재가 많았다.
널찍한 앞뜰을 지나 중원(中院)으로 들어가자 숨어 있던 영위들은 움찔하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수십 쌍의 날카로운 눈빛이 능묵에게 고정한 채, 그의 행동을 눈도 깜빡하지 않고 보았다.
능묵은 표정이 평온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앞쪽 회랑에 들어섰다. 그리고 뒷짐을 진 채, 호숫가에 이는 물결을 바라보았다.
묵백의 저택은 아주 컸지만 오가는 하인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저택을 채우는 것은 고요뿐이었다.
주인인 묵백이 늘 집을 비우는 데다 저택의 영위는 항상 숨어 있었다. 시녀들은 안쪽 뜰에서 일을 보기에 아침에 바깥뜰을 청소하는 것 말고는 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묵백이 거주하는 주원에는 사람이 더욱 없었다.
그러나 손님이 오자 접대하는 사람도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미세한 소리와 함께 검은색 경장 차림의 남자가 조용히 다가왔다.
깔끔한 옷차림에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능묵의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훑어보더니 문득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곧 예의 바르게 입을 열었다.
“공자,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의 태도는 아주 공손했다. 그는 능묵의 신분을 알지 못했지만 대문을 지키는 두 영위를 무사히 통과해 저택에 들어왔다는 자체가 일반적인 신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조심스럽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예의를 다하며 손님 접대를 제대로 행해야 했다.
그러나 만약 이 사람이 갑자기 공격이라도 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헌원.”
담담한 두 글자가 들려왔다.
그러나 경장 차림의 남자는 이 말을 듣자마자 안색이 확 변했다.
‘헌원이라고?’
그는 시선을 들고 능묵의 준수한 옆얼굴을 바라보다 대담하게 추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