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잘 알아봐 주십시오
야홍릉은 침묵에 잠겼다.
계 어멈은 공주부의 집안일만 책임지기에 밖에서 누가 유언비어를 퍼뜨렸는지 알 수 없었다.
능묵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제경의 귀족들은 겉보기엔 멀쩡하나 사적으로 모두 이익에 얽매어 있습니다. 유언비어가 퍼지자 사람들은 구경만을 하고 있지만 대다수는 저마다의 꿍꿍이가 있지요.”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능묵도 이 일을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야홍릉에게 구정물을 퍼붓는데 그가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그는 야홍릉이 다른 남자와 친밀한 관계라고 얽히는 게 싫었다.
야홍릉이 도도하고 거만한 것은 그녀가 그럴만한 실력이 되어서 그런 것일 뿐이다.
“당분간 신경 쓸 필요 없다.”
야홍릉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와 함께 섭정왕부로 가자꾸나.”
말을 마친 그녀는 계 어멈더러 아침 식사를 준비하라고 눈치를 주었다.
계 어멈은 바로 허리를 숙이고 물러갔다.
능묵이 물었다.
“주인님, 봉회근과 얘기를 하실 겁니까?”
“그래.”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주요 계획은 사실 동제의 제경이 아니었다. 동제의 평양 공주가 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지. 난 따로 할 일이 있어.”
능묵은 그녀가 말한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목국 서남쪽에 위치한 봉씨 가문 마장과 제철, 제염 사업으로 인한 금전 수익이 그녀가 중시하는 일이었다.
이는 모두 나중에 그녀가 황위에 오를 수 있는 밑천이 될 것이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야홍릉에게 현갑군은 가장 큰 버팀목이었다.
훌륭한 군은 강한 싸움 실력을 제외하고도 강한 무기, 갑옷과 좋은 말, 그리고 충분한 양식이 필요했다.
그러기에 제철과 제염 사업에서 오는 수익도 아주 중요했다.
능묵은 시선을 내리깔고 침묵하다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목국 서남쪽에 봉씨 가문의 사업 말고도 제 개인 사업도 있습니다. 아마도 주인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
야홍릉은 그 말을 듣고 시선을 들었다.
“네 개인 사업이라고?”
능묵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평온한 모습이었다.
‘남제를 떠난 뒤의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개인 사업이 있었다는 건 기억한다고?’
야홍릉은 시선을 돌리고 담담하게 물었다.
“말해 보아라.”
“봉씨 가문 셋째 봉여희 말입니다.”
능묵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는 남제에서 도박장과 기루 몇 곳, 그리고 전장(錢莊, 고대의 은행)을 관리하고 있는데 그 소유주가 저입니다.”
야홍릉은 깜짝 놀랐다.
“봉여희가 네 사람이란 말이냐?”
‘언제 소리 소문 없이 봉씨 가문의 사람을 매수한 거지?’
능묵은 봉씨 가문에서 봉여희가 그를 보고 한 말이 떠올랐다.
‘나한테 구슬이 한 알 있는데 오랫동안 먼지 속에 갇혀 있었지. 그러나 먼지 속에도 빛을 발해 산과 하천, 수많은 꽃송이까지 밝게 비춰주었지.’
잠깐 침묵을 지킨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매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나 보네.’
야홍릉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네 재산이니 남겨 두어라. 나중에 쓸 곳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녀는 심드렁한 얼굴로 한 마디 덧붙였다.
“넌 남제의 황자이니 앞으로 남제에 관심이 있다면 나중에 황위를 노릴 수도 있잖아. 그러려면 뭐든 가지고 있는 게 있어야 하지. 그러지 않고서야 무슨 힘으로 싸우겠느냐?”
‘남제에 관심이 있냐고?’
능묵은 남제 하나만으로 눈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공손한 얼굴로 말했다.
“전 남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남제의 황위를 노릴 생각도 없습니다. 주인님, 잘 알아봐 주십시오.”
‘잘 알아봐 달라고?’
야홍릉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남제는 점점 약해지고 있어 남제의 황위 자리를 두고 싸울 필요가 없지. 얼마 뒤면 영린의 것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능묵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예전의 일을 떠올리면 머리가 아프냐?”
능묵은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프지 않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네가 예전에 남제에 있을 때, 뭘 하면서 지냈는지 말해다오.”
이 말을 들은 능묵은 침묵했다.
‘예전에 남제의 황궁에서 뭘 하면서 지냈냐고?’
그는 잘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에 너무나 많은 일이 있어 그는 어렸을 때, 남제에서 겪은 일들을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홉 살까지의 기억 중에서 중요한 일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생에도 다시 태어난 그는 남제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고 아홉 살 되던 해 남제를 떠나 남성국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태자로 되었다.
그는 일 년의 시간을 들여 남성국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황태자로 되었다.
그리고 남제의 일을 마친 뒤, 조용히 목국으로 가서 신은전의 영위로 되었다.
목국 신은전에 들어갈 때 그의 나이는 고작 열 살이었다.
‘아홉 살 전의 기억이라…….’
능묵은 미간을 살짝 폈다. 사실 특별히 추억할 만한 것도 없었다.
아홉 살 전의 삶은 머나먼 옛날 같지만 떠올리기는 쉬웠다.
너무나 단조롭고 평온한 나날이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이 단조롭기만 한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전 남제에서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기댈 만한 외가 세력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황자와 대신들은 모두 절 얕잡아 보았습니다.”
능묵은 시선을 내리깔고 평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들은 툭하면 절 비꼬고 비웃기 일쑤였죠. 그리고 궁인들은 지시하여 저한테 쓰는 돈을 빼돌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트집을 잡고 괴롭히고…… 다른 건 특별한 게 없었습니다.”
그때의 그는 어렸다.
성인이 된 황자들은 어린애를 괴롭힐 만큼 속 좁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를 괴롭히는 황자들은 대부분 그보다 나이가 겨우 몇 살 더 많은 아이였다.
아이이기에 치사한 방법으로 그를 괴롭힌 것이었다.
“하지만 전 이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능묵은 남 얘기를 하듯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주인님이 어렸을 때 겪으셨던 것과 비슷합니다. 저도 시간 대부분을 글공부하고 무예를 익히는 데 사용했지요. 그들과 작은 일로 다툴 생각이 없었습니다.”
“내가 겪은 일과 비슷하다고? 내가 어렸을 때 어떻게 지내왔는데 네가 어떻게 아느냐?”
야홍릉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능묵은 흠칫하더니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주인님은 무공이 뛰어나시고 병법에도 능하시니 분명 어렸을 때부터 많은 시간을 무예를 닦고 병법을 연구하는 데 들였을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
야홍릉이 씩 웃었다.
“추리 능력이 꽤 좋구나.”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 어멈은 시녀들을 데리고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야홍릉은 일어서서 밖으로 향했다. 능묵은 그런 그녀의 뒤를 바짝 따랐다.
“모두 내려가 보아라.”
야홍릉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계 어멈은 고개를 숙이고 시녀들과 함께 물러갔다.
야홍릉은 식탁 앞에 앉아 능묵과 얘기를 나누며 음식을 먹었다.
그들이 하는 얘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한담이었다. 그러나 야홍릉의 평범해 보이는 질문에 능묵은 항상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한 모습이었다.
능묵은 어쩌면 야홍릉도 진작 눈치챘는데 그저 말을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남제에서 구 년 동안이나 힘들게 살았는데 가서 복수할 생각도 없느냐?”
‘복수라고?’
능묵은 고개를 저었다.
“전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미워할 시간이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복수할 생각도 없고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인 뒤, 더는 묻지 않았다.
조용히 아침 식사를 마친 그녀는 능묵과 함께 섭정왕부로 갔다.
그녀는 밖에서 떠도는 소문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소문을 쉽사리 믿는 사람들이 잘 이해되지 않을 뿐이었다.
어린 황제는 아직 열네 살이 안 되었고 그녀는 이제 열일곱 살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연하를 좋아한다고 해도 어린아이에게 손을 뻗지는 않을 게 아닌가?
‘어디를 봐서 열네 살도 안 된 소년이 여리여리한 소녀를 좋아하지 않고 차갑기만 한, 심지어 네 살이나 많은 여인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참 상상력도 풍부해.’
마차가 섭정왕부 앞에서 멈춰섰다. 능묵이 창문의 발을 젖히자 야홍릉이 마차에서 내려왔다. 공주부의 시녀가 앞으로 다가가 시위에게 말했다.
“평양 공주께서 오셨으니 섭정왕께 말씀드려 주시오.”
시위는 그 말을 듣더니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려온 야홍릉을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왕부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부의 집사가 급히 걸어오더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평양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저희 왕비께서 공주 전하더러 부풍전 화원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따라오시지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부풍전으로 걸어갈 때, 야홍릉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봉 공자는 요즘 바쁘신가?”
집사는 고개를 저었다.
“봉 공자는 바쁘지 않습니다. 가끔씩 왕비와 얘기를 나누시고 위성에서 온 편지에 답장을 보내는 것 말고는 대부분 시간을 책을 보거나 무공을 수련하는 데 씁니다.”
그동안 봉씨 가문은 황제가 나중에 트집 잡을까 두려워 사업을 제경에 발전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제경에 있는 동안 봉회근은 섭정왕, 섭정왕비와 얘기를 나누는 것 말고는 달리 더 할 일이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제경을 떠나지 않는 건 야홍릉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부풍전에 도착하니 멀리서 영묘언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야홍릉을 보더니 기쁜 얼굴로 손수건을 흔들었다.
“언니!”
야홍릉도 미소를 지었다.
“군주.”
부풍전 화청에 들어간 야홍릉은 섭정왕에게 예를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시녀가 차를 올리자 섭정왕비가 말했다.
“묘언이에게서 듣자니 공주께서 곧 제경을 떠날 생각이라면서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봉 공자와 할 일이 있어서요.”
“제경에서 떠돌고 있는 소문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
야홍릉은 찻잔을 들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좀 들었어요.”
“소문을 제 때에 잡지 않으면 이상하게 번질 수 있습니다.”
섭정왕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이미 공주 전하가 저희 대인이 폐하 곁에 꽂은 첩자라는 말도 돌고 있어요. 대인이 일부러 여색으로 폐하를 유혹하고 통제하려 한다고 말이에요. 그래서 폐하께서 요 며칠 섭정왕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달라졌고 심지어 심복 대신들도 멀리한다고 소문이 안 좋아요.”
야홍릉은 침묵하다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이 일은 섭정왕과 폐하께서 잘 처리하실 겁니다.”
섭정왕비는 그녀를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시지요.”
섭정왕비는 한참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공주 전하, 혹시 정말 폐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