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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29)화 (13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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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그녀의 원칙

야홍릉은 남자에게 허리를 숙이지 않을 것이고 그 어떤 이유로도 비굴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왔다. 고고한 그녀에게 허리를 숙이기 위해서.

전생에 실패한 기억 때문에 그는 더욱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는 야홍릉의 성격으로는 총애받는 것보다 보필받는 걸 더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고귀한 신분을 내려놓고 어영위가 되어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는 그녀의 곁에서 낮은 자세로 그녀를 수호하고 보필하며 그녀의 소원을 이뤄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나중에 후궁을 많이 들인다고 해도 그는 막지 않을 것이다.

막는 시늉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녀가 자신에게만 설레도록 힘쓸 것이다.

후궁에 남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는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정인이 될 자신이 있었다.

“옷을 벗고 들어와 있거라.”

야홍릉이 입을 열고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태극궁에 한기가 강하니 목욕하며 몸을 녹이거라.”

밀실 안은 춥지 않았으나 그 전에 그들은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고 밀실을 떠날 때도 태극궁으로 지나쳐 갔다.

추운 곳에 있다가 더운 밖으로 나왔으니 몸에 좋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야홍릉은 능묵이 신은전에 있었을 그 몇 년을 기억하고 있었다.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어쩐지 그의 건강은 한상 그녀의 관심사에 속했다.

그녀는 능묵이 아픈 게 싫었다.

이 말을 들은 능묵은 흠칫 놀라더니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인님?”

‘너, 너무 빠른 거 아닌가?’

그는 아직 마음의 준비를 전혀 하지 못했다.

야홍릉은 그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처음 같이 씻는 것도 아닌데 괜한 생각은 하지 말아라.”

능묵은 침묵했다.

분명 사흘 전의 저녁.

그들은 태극궁의 한지에서 함께 목욕했었다. 그러나 그날 밤 대전 안이 어두워서 그들은 서로를 잘 보지 못했다. 게다가 그때의 상황도 특별하지 않은가?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그러나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기에 능묵도 멍청하게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한 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얌전히 옷을 풀었다.

야홍릉은 그의 몸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보지도 않았다. 그저 그가 말없이 욕지로 들어올 때, 힐끗 본 게 다였다.

능묵의 몸은 말랐지만 훤칠했다. 건강해 보이는 구릿빛 피부에 툭 불거진 나온 척추가 매끈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녀의 곁에서 지낸 몇 달 동안 그나마 편히 지낸 편이었다. 그래서 처음 공주부에 들어와서 계편에 맞은 흔적을 제외하고 피부에는 다른 흉터가 없었다.

매끈하고 탄탄한 몸이었다.

능묵은 야홍릉의 시선을 느낀 건지 말없이 욕지의 옆에 서서 탄탄한 상반신을 드러냈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몸이 야홍릉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했다.

야홍릉은 곧 시선을 거두고 담담하게 말했다.

“너더러 몸을 담그라는 했었지, 몸매를 드러내라는 한 적 없다.”

능묵은 멈칫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전 일부러 몸매를 드러낸 게 아닙니다.”

물 높이가 높지 않은 걸 어떡하라는 말인가?

야홍릉은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능묵은 바로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말했다.

“주인님의 말씀에 반박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주인님, 벌을 내려주십시오.”

‘욕지에서 벌을 내려달라고…….’

야홍릉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오늘 뒤로 둘 사이의 많은 것이 예전과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가짐이 달라졌으니 그를 대하는 태도 역시 달라질 것이다.

“네가 계속해서 어영위로 지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난 이미 네 진짜 신분을 알았으니 함부로 너에게 벌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너도 툭하면 무릎 꿇고 사죄하지 말거라.”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난 함부로 누군가에게 벌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다.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너도 내가 가장 못 참는 게 뭔지 알 것이기에 긴말 하지 않겠다. 너도 잘 알겠지?”

그녀는 자신이 계편을 들고 능묵의 손을 내리치던 것을 잊은 듯했다.

능묵은 흠칫 놀라더니 한참 뒤에 말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원칙이 뭔지 선이 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차가워 보이는 그녀지만 사실 한 사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아주 너그러웠다.

그녀는 일반적인 일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원칙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녀는 다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녀의 원칙이 바로 그의 원칙이었다.

그는 절대 그 어떤 상황에서나 그 원칙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욕지 내벽에 조용히 기대어 앉았다.

능묵도 말이 없었다.

둘은 조용히 몸을 담그고 있었다. 따뜻한 물이 물의 한기를 쫓아주었다. 야홍릉이 일어서자 능묵도 따라서 일어섰다.

둘은 모두 벗은 채로 마주 보았다.

능묵은 몸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를 최대한 억누르며 깨끗한 수건으로 야홍릉의 몸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손수 잠옷을 입혀 주고는 조용하게 말했다.

“주인님, 먼저 가서 쉬시지요. 제가 바로 따라가겠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인 뒤, 편전을 나섰다.

능묵은 말없이 그녀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눈을 내리깔고 몸에 남은 물기를 닦았다. 옷을 입은 그는 다시 밖으로 걸어나왔다.

야홍릉은 홀로 침대에 기대 무릎을 구부려 모았다.

그리고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안방으로 들어간 능묵은 야홍릉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 싸늘한 얼굴이었지만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모습에 능묵은 넋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예전에 전쟁터에서 보았던 반짝이는 느낌이 없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비치는 듯한 후광을 볼 수 있었다.

능묵은 시선을 떼기 아쉬웠다.

“시간이 늦었구나.”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평온한 시선으로 말했다.

“가서 쉬거라.”

능묵은 눈을 내리깔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계속 자도 됩니까?”

“그러거라.”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사람을 시켜 방안에 침대 하나를 더 놓을 것이다. 비단탑이 너무 좁아 자기 불편할 테니.”

능묵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전 괜찮습니다.”

어영위가 불만이 있을 리 있겠는가?

그는 편히 지내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날 안쓰러워하신다면…… 좀 더 일찍 같은 침대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지도 몰라.’

이렇게 생각한 능묵은 말없이 침대 옆으로 걸어갔다.

“주인님, 피곤하지는 않으십니까? 제가 주물러 드리겠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능묵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더 물어보실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

야홍릉은 지금 궁금한 게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늦어 급히 물어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알았기에 남은 문제들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얼마든지 천천히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야홍릉은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넌 네가 남제의 황자였다는 것만 기억하고 남제를 떠난 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니 내가 묻고 싶은 것이 있어도 네가 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능묵은 말이 없었다.

“가서 자거라.”

능묵은 공손하게 대답하고 물러가려고 했다.

그때, 그는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주인님…….”

“왜? 무슨 일이냐?”

야홍릉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능묵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금 어영위가 주인님을 속인 게 주인님의 원칙을 어긴 게 되냐고 물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이 문제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자 능묵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병풍 밖으로 나가 비단 탑에 누웠다.

야홍릉은 비단탑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병풍을 사이 두고 있었지만 그녀는 능묵이 지금 비단탑에 누워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야홍릉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마음이 평온했다.

누군가에게 한없이 사랑받고 소중하게 다뤄진다면 아무리 차가운 사람이라고 해도 그 느낌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좋고 싫음을 떠나서 그런 느낌 자체가 사람을 설레게 했다.

야홍릉은 눈을 감았다. 꿈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쩌면 운명이 정한 인연이 아니겠는가?

전생에 그녀는 한옥금을 위해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 나갔으나 전쟁터에서 본 다른 사람의 눈에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일에 대해 전혀 몰랐다.

칠 년 동안 전쟁터에서 고생한 그녀는 결국 한옥금을 위해 갑옷을 벗었다.

그러나 갑옷을 벗는 날이 그녀가 죽는 날일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녀는 어려서부터 사람들과 멀리하고 정을 쌓지 않았다.

그렇게 음모와 술수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지만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직접 판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죽기 전에 했던 맹세가 떠올랐다.

‘다시는 진심이고 뭐고를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정인에 배신당해 죽을 때, 다른 사람도 평생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고귀하고 패기가 넘치는 헌원용수 역시 정이라는 것에 모든 것을 잃지 않았는가?

그가 보여준 진심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일반인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실제 행동으로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만약 야홍릉이 또다시 진심 따위를 믿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게 될 것이다.

그녀가 그의 마음을 받아주고 말고를 떠나 적어도 헌원용수의 진심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 * *

날이 밝자 사흘간 조용하던 공주부가 다시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좋은 일이 아니라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평양 공주가 궁에서 사흘간 나오지 않은 것이 제경의 곳곳에 소문이 퍼지며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평양 공주가 황제의 정인이라는 둥, 황제와 그렇고 그러는 사이라는 둥, 사흘간 궁에 머문 것도 황제와 운우지정을 나누기 위해서라는 둥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장공주부에서 난처한 상황에 놓이자 황제가 다급히 장공주부로 가서 그녀를 보호하고 사람들에게 그녀가 친구라고 소개했고, 평양 공주로 책봉하여 더없는 영광을 안겨주었다는 것이었다.

평양 공주는 심지어 위 국구에게 중상을 입혀 공분을 일으켰지만 결국 무사하지 않았는가? 그런 그녀가 어찌 황제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궁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춘 사흘 동안, 이러한 소문은 점점 크게 변했다.

결국 공주부의 능묵과 야홍릉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폐하와 친밀한 사이라고?”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유언비어는 누가 퍼뜨린 것이냐?”

계 어멈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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