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다
영린은 그렇게 큰 욕심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수명을 삼십 년이나 내놓았다고 했다.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에게 남제와 동제를 통일시킬 생각이 있다고 해도 세상의 부귀영화에 미련이 없을 것이다.
현재의 상황으로 보면 목국의 감진과 단씨 형제가 헌원용수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그녀의 조력자가 될 사람들이었다.
단씨 형제의 양아버지는 궁중 악사이고 신은전 대교습은 어머니의 옛 친구다.
그들은 언제든지 궁의 동향과 정보를 빼낼 수 있었다.
야홍릉은 목국이 이미 서서히 그녀의…… 아니, 헌원용수의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
옆에 서 있던 능묵은 야홍릉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주인님, 고민하고 계시는 게 있다면 저에게 물어보십시오.”
“주인님?”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그의 얼굴을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아직도 내 어영위가 되고 싶은 것이냐?”
능묵은 긴장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저는 영원히 주인님의 어영위입니다.”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평온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여러 광경들이 하나하나 지나갔다.
처음 공주부에 들어갔을 때, 기억을 잃었으나 무공이 강한 영위가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그리고 순순히 옷을 벗고 그녀의 계편에 맞았다.
그때의 광경을 떠올려 본 그녀는 그가 신은전에서 오랫동안 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기억을 잃은 뒤에 가지고 있는 버릇은 모두 신은전에서 훈련을 받은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는 음식을 먹는 것에도 다른 영위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위병에 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능묵이 글을 모른다고 하자 그녀는 손바닥을 때려가며 글을 가르쳤고 시를 외우지 못할 때마다 손바닥이 퉁퉁 붓도록 매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태후의 정인과 싸움이 붙었을 때, 능묵은 왼손으로 상대방에게 중상을 입혔다. 오른손으로 글을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어영위가 ‘삼자경’을 외울 때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허리를 꼿꼿이 폈다.
한 글자라도 틀리게 말해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불쌍한 소년 어영위에게서 세상을 주름잡던 패자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다시 광경이 바뀌어 그녀의 눈앞에는 말 위에서 천군만마를 지휘하던 고귀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 남자는 그녀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순간, 하늘이 무너진 듯, 하염없이 슬퍼했다. 또 사신처럼 차갑고 냉혹하게 복수했다.
그리고 또 그가 긴긴 길을 무릎 꿇어가며 걸어가는 모습까지……
야홍릉은 미간을 문질렀다.
“난 앞으로 널 능묵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용수라고 불러야 하느냐?”
“주인님이 원하시는대로 부르십시오. 전 다 좋습니다.”
능묵은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내리깔고 말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전 능묵으로 불리고 싶습니다.”
능묵은 그녀가 직접 지어 준 이름인데다가 그녀의 이름인 ‘능’이 있었다.
마치 서로를 품은 듯한 느낌이었다.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다랄까?
그래서 그는 능묵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럼 넌?”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앞으로도 날 ‘주인님’으로 부를 것이냐?”
능묵은 손끝을 떨며 말했다.
“주인님께서 절 내쫓지만 않으신다면…….”
“안 내쫓을 거다.”
야홍릉이 대답했다.
“너도 호칭 바꿔라. 이름 부르면 되겠구나.”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싫으냐?”
능묵은 고개를 젓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그래도 어영위가 좋습니다.”
어영위니 주인의 이름을 그대로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왜?”
‘왜냐고?’
능묵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영위의 신분이어야 그녀와 가깝게 지낼 수 있고 하루 열두 시진 딱 붙어 있을 수는 있지 않는가?
침대는 따로 사용해도 같은 방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말이다.
그는 이것에 만족했다.
야홍릉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능묵은 생각을 해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전하의 어영위일뿐만 아니라 주인님의 노리개이기도 합니다.”
‘노리개?’
그 일을 잊고 있었던 야홍릉은 능묵의 말에 불현듯 다시 기억을 떠올렸다.
막상 들으니 노리개라는 말은 좀 민망했다……
그녀는 입가를 실룩이며 말했다.
“확실해?”
능묵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야홍릉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일어서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목욕을 할 테니 넌 시중을 들거라.”
‘시중을 들라고?’
능묵은 당황하더니 곧바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야홍릉이 목욕하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멍하니 서 있은 뒤에야 야홍릉의 지시에 담긴 의미를 알아챘다.
‘목욕 시중을 들라고? 갈아입을 옷이나 목욕 용품을 준비하라는 게 아니고 옆에서 시중을 들라는 건가?’
능묵은 긴장한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노리개의 신분을 허락하신 건가?’
사실 그들은 굳이 노리개라 칭하는 것은 더욱 가깝게 지낼 명문을 만드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다만 능묵이 스스로 그 신분을 낮추었을 뿐이었다.
‘주인님의 말씀은 나의 존재와 주인님에 대한 내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말씀인가?’
이 생각에 그는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실 그는 전생에 한 일을 빌미로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전에 했던 모든 것은 그녀가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었지,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이번 생에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녀가 자신이 했던 일들을 알고 둘 사이에 의심이나 불신이 없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야홍릉이 그에게 감동을 받아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만약 언젠가 그녀가 정말 그에게 마음이 생긴다면 그는 그 마음이 순수한 연모의 정이지, 감격이거나 미안함 때문이 아니길 바랐다.
능묵은 심호흡을 하고 말없이 돌아서서 야홍릉의 옷을 준비해 주었다.
그는 전처럼 자리를 피하지 않고 목욕하는 편전으로 들어갔다.
맨발로 욕지의 단상 위에 서 있던 그녀는 장포를 풀려고 했다.
능묵이 다가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전하의 옷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능묵의 훤칠한 몸이 야홍릉의 옆에 나타났다. 그녀보다는 머리 반쯤 큰 키였다.
능묵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야홍릉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이런 압박감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름철 옷은 얇았다.
야홍릉은 가벼운 긴 치마 안에 하얀색 속옷만 입고 있어 벗는 데 시간이 별로 들지 않았다.
늘씬한 여인의 몸매가 드러나자 능묵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깐 채,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는 야홍릉의 벗은 몸을 노골적으로 바라볼 정도로 간이 크지 않았다.
야홍릉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욕지로 걸어 들어갔다.
뜨뜻한 물이 곧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녀는 욕지의 내벽에 기대앉아 담담하게 물었다.
“목욕 시중을 들 줄 아느냐?”
능묵은 흠칫 놀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배우겠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느긋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배우거라.”
능묵은 시선을 들고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는 공손하나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주인님, 잘 생각해 보셨습니까? 지금 이렇게 하시면…… 앞으로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친밀한 관계?’
야홍릉은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생긋 웃었다.
“능묵, 내가 얌전한 규수 같은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도 되지 않았어? 난 예법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
능묵은 변함없는 얼굴로 입술을 꽉 다물었다.
“내가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든 말든 예법으로 날 속박하지는 못할 것이다.”
야홍릉이 말했다.
“나 또한 함부로 아무나와 가까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와 다른 사내와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예법 규칙에 어긋나서가 아니라 그녀가 싫어서일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벗은 몸을 보인다고 그 사람의 것이 된다?
야홍릉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제야 능묵의 표정이 좀 풀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어가 욕지의 옆에 무릎을 반쯤 꿇었다. 그리고 야홍릉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앞으로 정말 후궁을 잔뜩 두실 겁니까?”
한담을 나누는 듯한 평온한 말투였다.
“왜?”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불만이냐?”
“제가 어찌 감히…….”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그의 손길을 즐겼다.
능묵도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깐 채, 성심껏 시중을 들었다.
잠시 뒤, 야홍릉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정말 후궁을 잔뜩 들이겠다고 하면 넌 막을 것이냐?”
그의 능력이라면 막는 것은 쉬울 것이다.
능묵은 시선을 내리깐 채, 공손하게 대답했다.
“전 주인님이 행하시는 일 그 어떤 것도 막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님이 원하시는 거라면 최선을 다해 이루어드릴 겁니다.’
전생에 해주지 못했던 일을 이번 생에 최선을 다해 보상해 주고 싶었다.
또다시 그녀가 다치거나 상처받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모든 것을 내놓은 것도 그녀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서였다.
야홍릉은 흠칫 놀랐다.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능묵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능묵.”
야홍릉은 그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평온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만약 네가 세상의 주인이 될 운명이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얼마든지…….”
“전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능묵이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전 세상에 관심이 없습니다. 또 절대 그 어떤 수단으로도 주인님을 강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야홍릉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왜냐고?’
능묵이 대답했다.
“좋아하니까요.”
답은 간단했다.
좋아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야홍릉은 그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깊이 사랑하면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지는 법이다.
그는 모험할 수 없었다.
전생에 실패한 경험이 없었다면 그는 좀 더 난폭한 방법으로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팔에 가두고 자신이 일군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신분을 가지게 했을 것이다. 그의 것이 된 그녀는 세상 여인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사랑과 총애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야홍릉처럼 도도하고 제멋대로인 여인이 어찌 가냘프고 유약한 여인처럼 조심스럽게 다뤄지는 걸 좋아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