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그러지는 않을 거야
야홍릉은 그 원인이 뭔지는 당분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영린은 능묵과 달랐다. 야홍릉은 영린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궁인이 물을 떠오자 야홍릉과 능묵은 세수하고 양치하러 갔다.
곧 네 명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영린은 야홍릉이 궁금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궁인을 내보냈다.
대전에는 네 명밖에 남지 않았다.
야홍릉은 입을 열어 직접적으로 물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제 저택의 어느 측부인가요?”
그 말에 분위기가 급격히 조용해졌다.
능묵을 포함한 세 쌍의 눈이 놀라울 정도로 눈치가 빠른 여인을 바라보았다.
“공주 전하, 정말 대단하시네요.”
묵백은 고개를 저으며 실소를 터뜨렸다.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야홍릉이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께서 저에게 잘 보이려고 한 것은 당연히 그럴 이유가 있겠지요. 그리고 저한테 측부에 대해 물어보시지 않으셨나요?”
그녀가 궁에 들어온 날에 영린은 그녀에게 알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감진이 그녀의 측부 중 한 명이라고 했을 때 영린과 묵백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한 것도 기억이 났다.
그러니 감진이 그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영린이 영정의 얘기를 꺼낸 것은 형식적인 질문이었을 뿐이었다.
영린은 눈을 내리깔고 차를 마셨다. 그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공주 전하께서 앞으로 그 측부들에게 자유를 주실지 궁금합니다.”
이 질문은 묵백도 했던 것이었다.
묵백뿐만 아니라 영린도 아주 신경 쓰고 있는 문제인 것 같았다.
능묵도 그녀의 대답이 궁금한지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녀에게서는 별다른 정서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제 측부가 되어 황실 종책에 올랐습니다.”
뻔한 대답이었다.
명분뿐인 자리라도 그들은 평생 공주의 측부라는 운명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이 말에 셋의 표정은 모두 달랐지만 다들 원하는 대답을 들은 듯한 표정은 아니었다.
영린은 말없이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묵백은 입가를 실룩이며 능묵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 방법은 너무 위험하다고 했잖아. 괜히 연적만 늘어나는 셈이라고. 그것도 다 같은 편끼리…….”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이 호국 공주는 왜 자꾸 이렇게 예상을 뛰어넘는 일들만 하는 거지?’
다른 여인들이라면 측부들 들이는데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수치심에 자결하려 들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사내들을 저택에 들였다 해도 그렇다.
지금은 일편단심으로 그녀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상황이다.
감동에 눈물을 흘리며 이름뿐인 측부들을 내보내고 부마의 자리를 그 사람에게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왜 여전히 이런 반응이지? 다들 호국 공주 야홍릉이 차갑고 제멋대로이며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한다고 하더니…… 역시 헛소문이 아니었어.’
눈을 내리깐 능묵의 준수한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조용하고 또 공손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묵백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공주 전하께서 다시는 누구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는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야홍릉은 시선을 내리깐 채, 침묵했다.
“만약 이 사람이 공주 전하를 한없이 아끼고 공주 전하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기꺼이 견뎠다면, 심지어 공주 전하에게 무릎까지 꿇을 수 있다면, 그래도 전하께서는 여전히 변함이 없을 것입니까?”
‘설마 이 정도로 무정할까?’
야홍릉은 찻잔을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한참 뒤에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구를 좋아할지 말지는 측부에게 자유를 주고 말고와 상관이 없지.”
‘이 말은…….’
능묵은 흠칫 놀라더니 찻잔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보이는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묵백은 그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그녀가 무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옅게 웃었다.
“하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의 일이고 백년해로하는 것 역시 두 사람의 일이지요. 사람이 많아지면 머리가 아파질 거고 감정도 괜히 복잡해질 건데…….”
“감정?”
야홍릉이 담담하게 되물었다.
“난 그저 그들과 얼굴만 아는 사이일 뿐이니 감정이고 뭐고 할 게 없어.”
이 말은 긍정의 뜻을 의미하기도 했다.
묵백과 능묵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묵백이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가 감정을 망칠 수 있지 않습니까?”
한 사람을 좋아한다면 그녀의 모든 것, 몸과 마음까지도 모두 가지고 싶어지는 법이다.
누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옆에 다른 이성이 있는 것을 바라겠는가?
게다가 그런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말이다.
야홍릉은 묵백의 말에 대해 생각을 해보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권을 어길 수는 없다지만 공주 전하만 원하신다면 이런 규칙은 모두 무시할 수 있습니다.”
묵백이 담담하게 웃었다.
“공주 전하께서 계획하고 계신 일은 얼마 뒤에 실현될 것입니다. 목국 전체가 공주 전하의 말을 따를 때, 황실 종책이 뭐가 대수겠습니까? 공주 전하 말 한마디에 해결될 것 아닙니까?”
야홍릉이 혼자라고 해도 몇 년 동안 천천히 준비한다면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될 것이다.
다만 그 시간이 좀 오래 걸릴 뿐이다.
그러나 조력자가 많이 생긴 지금, 그 자리를 손에 넣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묵백의 말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목국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할 때가 후궁을 잔뜩 거느릴 수 있을 때지. 묵백, 이걸 잊은 건 아니지?”
이 말에 묵백의 표정이 굳어지고 말았다.
대전의 분위기는 이상하게 흘러갔다.
영린은 답답한 얼굴로 능묵을 바라보았다.
능묵은 시선을 내리깐 채, 손에 들린 찻잔만 보고 있었다.
묵백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공주 전하는 참…….”
‘참 뭐?’
그는 말을 잇지 않았고 야홍릉도 더 묻지 않았다.
그러나 영린과 능묵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은 분명한 것 같았다. 심지어 우울한 듯했다.
물론 영린의 표정이 더욱 뚜렷했다. 능묵은 여전히 표정을 알 수 없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어 다른 사람은 그의 기분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저녁 식사를 마칠 때까지 야홍릉은 그 측부들을 풀어줄지 말지에 대해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으로 가기 전에 진지하게 물었다.
“묵백 대인, 오늘 전혀 대제사 같지 않군.”
묵백은 좋은 말을 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물었다.
“그럼 뭐 같습니까?”
“중매쟁이.”
야홍릉은 네 글자만 내뱉은 뒤, 건양궁을 떠났다. 마른 몸에서 날카로운 분위기가 뿜어 나왔다. 한기를 숨기고 있는 검 같은 느낌이었다.
능묵은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대전에 남은 둘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중매쟁이라고? 듣기 싫은 말은 아니군.’
“제가 오늘 너무 조급해 보였나요?”
묵백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를 맺어 주는 일은 해본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조급한 것도 나쁜 건 아니지.”
영린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좀 더 빨리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었잖아.”
묵백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무 급하실 건 없습니다. 공주 전하가 아직 용수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어 그런 것입니다. 용수가 전생에 그녀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고 해서 갑자기 용수와 혼인을 하겠다고 할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건 천천히 두고 봐야지요.”
야홍릉은 조금 감동받은 정도로 평생 대사를 결정할 사람이 아니었다.
영린은 피식 웃더니 일어서서 병풍 앞의 탑에 앉았다.
“당사자는 잘 모르는 법이지. 묵백, 넌 당사자도 아닌데 왜 그걸 몰라?”
묵백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영린은 축 늘어져서 탑에 기댔다.
“야홍릉 같은 성격의 여인이 옆에 남자를 오랫동안 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마음속으로 믿고 인정한다는 거야. 그 사람이 아무리 영위라고 해도 말이야. 감정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녀가 워낙 차가워서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속생각을 파악하지 못했을 뿐이지.”
묵백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요?”
사랑에 대해 잘 모르는 그는 영린처럼 섬세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야홍릉의 성격으로 누군가를 미친 듯이 사랑할 것 같지도 않았다.
전생에도 한옥금을 그리 사랑했지만 결국 전쟁터에서 칠 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가?
둘은 칠 년 동안 거의 만나지 못했다.
어렵사리 만나더라도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적었다. 결국 야홍릉은 병권을 내놓고 혼인을 하여 한옥금의 곁에 남으려고 했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점잖은 한옥금은 그녀를 이용했을 뿐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여인은 부드럽고 새침하며 약은 여인이었다.
예를 들면 야홍릉의 여동생, 야자릉 같은 여인 말이다.
야홍릉처럼 부드러움이라고는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없는 여인이 아니라.
야홍릉처럼 성격이 강하고 차가운 여인은 헌원용수 같은 남자와 어울렸다.
둘이야말로 천생연분이었다.
* * *
공주부 동쪽 누각.
계 어멈은 하인들을 데리고 조심스럽게 야홍릉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연속 사흘 동안 공주가 돌아오지 않자 평생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하며 마음을 졸였다.
그러나 오늘 밤 공주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자 그들은 비로소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전하, 지금 목욕하시렵니까?”
“아니다, 모두 내려가 보아라.”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하고 사람들을 내보낸 뒤, 창가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고요한 그녀의 시선에는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
계 어멈은 사람들을 데리고 공손하게 물러났다. 그녀는 자신이 모시는 공주 전하가 황제의 총애를 아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위 국구에게 중상을 입히고도 무사한 사람은 제경 전체에서도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야홍릉은 창문 앞에 앉아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녀는 계 어멈과 하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다지 관심 없는 눈치였다.
눈을 감은 그녀는 묵백과 영린을 처음 만났을 때의 광경과 꿈에서 본 것들을 맞춰 보았다.
현재 확신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있었다.
영린은 전생에 야소숙과 왕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생에 그들은 협력하지 않았고 영린은 그녀에게 야소숙과 왕래한 증거도 주겠다고 했다.
전생에 영린과 영위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고 영위가 영린의 손에 패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이번 생에 와서 달라졌다.
다만……
야홍릉은 전에 능묵에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영위 같은 사람이 패배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 것 같으냐?”
그때 능묵은 이런 대답을 했었다.
“아마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생에 영린이 섭정왕을 전생과 달리 대하는 것은 다른 사정이 있는 걸까? 남성의 대제사인 묵백은 왜 남성국에 있지 않고 영린의 곁에 머무는 거지?
영린과 묵백은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묵백은 남성국의 대제사이자 헌원용수의 사촌 형 겸 신하인데 만약 헌원용수가 이번 생에도 천하를 통일시키겠다고 한다면 영린과 묵백의 사이가 여전할까? 서로 대립하는 거 아닐까?’
야홍릉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지는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