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야홍릉은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눈앞에 남제의 사람들을 발치에 무릎을 꿇리고, 뒤이어 정예병을 이끌고 목국에 쳐들어간 살기로 가득한 남자가 있었다.
한옥금을 능지처참하여 죽이고 남성국의 신하들을 호령하며 태자의 위엄을 한껏 부린 남자.
심지어 신은전에서 나온 으뜸가는 어영위.
어디를 봐서 괴롭힘이나 당할 사람으로 보인다는 말인가?
“절 내쫓으실 겁니까?”
낮게 물어보는 그의 말투에는 불안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어영위는 살아서 주인의 곁을 떠나는 법이 없습니다. 주인님께서 저를 내쫓으실 거면 아예 죽음을 하사해 주십시오.”
야홍릉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밀실의 문이 열리며 검은색 장포를 입은 묵백이 밖에 서 있었다. 그는 온화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용수 동생, 기억이 좀 돌아왔어?”
능묵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그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묵백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이 아이가 네 동생이냐?”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묵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촌 동생인 셈이죠.”
야홍릉은 시선을 돌려 능묵을 바라보았다.
“묵백이 저리 말하는구나. 저이가 네 사촌 형이었다는 것도 기억나느냐?”
능묵은 고개를 저었다.
묵백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네가 사촌형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된 거지?”
야홍릉이 묵백을 바라보며 물었다.
묵백이라고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동생이라고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데…….’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문제가 좀 생긴 것 같습니다.”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이래나 저래나 속을 썩이는 용수 때문에 묵백은 머리가 아팠다.
“일단 나오십시오.”
묵백이 밖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이곳에서 사흘이나 주무셨으니 배가 고플 겁니다. 일단 뭐 좀 드세요.”
‘사흘이라고?’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잤다는 말이야?’
머릿속의 어지러운 생각을 내려놓고 그녀는 밖으로 걸어갔다.
능묵의 신분에 대한 놀라움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다른 사람에게 해코지를 당했거나 음모에 당했을 경우 등을 말이다.
또한 그의 신분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능묵이 그녀를 위해 스스로 신은전에 들어간 것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야홍릉의 옆을 지킬 수 있는 명분.
이유라고는 딱 그것 하나였다.
‘그래서 이번 생에 내가 깨어난 뒤에 그렇게 교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 거구나.’
그녀가 깨어난 뒤에 마침 한옥금이 찾아왔다. 한옥금이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일이 까발려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능묵이 공주부로 보내졌다.
‘그러니 능묵은 내가 다시 살아난 뒤, 그가 나의 곁으로 보내질 것을 확신한 건가? 그는 다 알고 있었어…… 아니, 능묵이 기억을 잃었으니 대교습이 알고 있겠지. 내가 한옥금에게 죽을 뻔했다는 일은 사실 내가 꾸민 일이라는 것 말이야.’
그녀는 한옥금과 원수가 된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위험하게 비춰졌을 것이다.
한씨 가문과 틀어졌다는 것은 황후, 삼황자와 틀어졌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얼마든지 그녀를 해코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상황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위험해 보였을 것이다.
그녀를 지켜줄 사람이 꼭 필요할 정도로.
‘그럼 내 저택에 들어온 소년들은 모두 헌원용수가 일부러 보낸 사람들인가?’
그녀에게 측부를 간택해 준 일은 부황이 결정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만약 그들 중에 헌원용수가 보낸 사람들이 있는걸까?
이것 역시 용수의 계획 중 일부인가?
야홍릉은 문득 영일이 보고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감진이 제경에서 그녀의 행방을 찾는 사람들을 방해한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감진은 헌원용수의 사람인가? 그리고 묵백이 얘기한 쌍둥이도 그렇겠지?’
만약 원래의 계획대로면 그녀는 제경의 공주부에 남아 있었을 것이고 이들과도 접촉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갑작스럽게 목국을 떠나게 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그들도 예상하지 못한 일인 듯했다.
‘그래서 다른 계획을 일단 내버려 둔 것이겠지.’
목국의 제경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렇게 일찍 능묵에게 구전해독단을 먹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능묵의 비밀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뒤로는? 아마도 지금처럼 능묵은 어영위 신분으로 나의 곁을 지켰을 것이고 내가 적을 제거하는 무기로 사용되었을 건가?’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목국의 제경은 크지 않은 데다가 적수가 많고 사람들의 눈도 많았다. 게다가 칠 년 동안 전쟁터를 누빈 경험이 있는 그녀는 드넓은 곳에 있는데 익숙해졌다. 그런데 어찌 다시 태어났다고 하여 그 작은 곳에서 적들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겠는가?
‘그러니 내가 제경을 떠나는 것도 헌원용수의 계획 중 일부인가?’
야홍릉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이만하면 능묵의 비밀이 풀린 셈이었다.
능묵과 야홍릉에게 존재하던 약간의 불신도 사라졌다. 앞으로 능묵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녀는 다 존중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목국을 반드시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누군가 그녀의 인생에 불쑥 나타났다고 해서 계획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헌원용수가 이번 생에도 세상을 통일시키겠다고 한다면 그녀는 다른 선택을 할 것 같기도 했다.
야홍릉의 머릿속에 도도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기나긴 길을 가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 남자는 지나간 길을 피로 물들이며 고통과 피로감을 무릅쓴 채, 곤륜산 꼭대기로 가고 있었다.
‘그래서 묵백이 나더러 세상의 모든 이들을 배신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능묵에게만 상처를 주지 말라고 했구나.’
가슴이 아파 왔다.
야홍릉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태극궁을 나섰다.
‘그래, 세상 사람들을 배신하는 한이 있더라도 능묵을 절대 아프게 하지 말아야겠어.’
진심은 짓밟는 게 아니었다.
어둑한 내전에서 걸어 나오자 바깥의 부드러운 불빛도 눈이 부시게만 느껴졌다. 야홍릉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보다 더 빨리 빛을 막아준 사람이 있었다.
야홍릉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고 널따란 옷소매로 빛을 가려주는 능묵을 보았다.
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헌원용수.”
이 이름에 능묵이 굳어졌을 뿐만 아니라 앞에서 길을 가고 있던 묵백도 놀란 얼굴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공주께서 헌원용수를 아십니까?”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그의 놀란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하마터면 묵백이 진짜로 놀랐다고 믿을 뻔했다.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것도 네 계획이 아니더냐?”
‘나를 밀실에 들여보낸 게 정말 능묵과 함께 있으라는 건 아니잖아? 나한테 진실을 알려주고 헌원용수가 나를 위해 한 일들과 내가 다시 태어난 이유를 알려주기 위한 거 아니야?’
묵백은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공주 전하, 이건 좀 억울합니다.”
“대제사는 고결과 성실의 대명사지.”
야홍릉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난 네가 왜 남성국에 있지 않고 동제에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제사전을 떠났다고 해서 대제사의 신분과 직책을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신이 널 벌할 수도 있어.”
묵백은 입가를 실룩이며 능묵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네, 공주 전하 현명하십니다.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악의는 없었습니다.”
야홍릉은 그가 악의를 가지고 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깐 침묵을 지킨 뒤, 그녀는 시선을 능묵에게 돌렸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다시 말을 삼켰다.
“공주 전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공주부로 가셔서 천천히 하시지요. 제가 식사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폐하께서 건양궁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묵백이 말했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가자꾸나.”
꿈 한 번으로 그녀는 능묵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린이 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속이 깊은지 알게 되었다.
묵백은 그가 잘못을 저질러 죗값을 받고 있다고 했었다.
이제 보니 전생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영린이 처음 보는 그녀를 아주 스스럼없이 대하고 그녀를 누님으로 모신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전생에 헌원용수와 동병상련일 때 그녀를 모르다가 다시 태어난 뒤.
그는 묵백에게서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되고 자세한 얘기를 듣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린은 누구를 위해 신에게 기도한 거지?’
둘이 했던 대화와 영린이 그녀를 누님으로 모시겠다고 한 것을 봤을 때, 야홍릉은 그 사람이 누군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진실과 크게 차이가 있지 않을 것 같았다.
밤바람이 불어오자 살짝 추운 느낌이 들었다.
야홍릉은 하던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흘 전, 밤에 태극궁에 들어가서 사흘 뒤의 비슷한 시간에 나왔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흘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이겠지만 그녀에게는 그저 한숨을 잔 듯한 시간이었다.
궁은 여전히 등불이 환했으나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등불이 밝은 건양궁에서 영린은 서신을 읽고 있었다.
발걸음소리를 들은 그는 시선을 들었다. 찌푸렸던 미간이 펴지면서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누님, 푹 주무셨습니까?”
야홍릉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네.”
꿈으로 사건의 진실을 보여주는 방법은 가장 직접적이고 또 그녀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차갑고 무덤덤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위해 수많은 일을 한 사람을 보고 감동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런 방법은 그 어떤 말보다 더 강력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궁인이 이미 저녁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영린이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편전으로 걸어갔다.
“먼저 씻고 저녁식사를 한 뒤, 다시 공주부에 가서 푹 쉬십시오.”
야홍릉은 몸을 돌려 편전으로 걸어가며 담담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왜 섭정왕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는지 드디어 알겠네요.”
그들은 전생에서는 물과 기름처럼 어우러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 것은 그도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영린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옷소매에 숨겨진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는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런가요?”
야홍릉은 그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떠올리기 싫은 상처가 있는 법이다. 어쩌면 이번 생에 영린이 섭정왕에 대한 태도를 달리한 것은 그가 삼십 년의 수명을 기꺼이 내놓은 것과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