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화면이 바뀌어 검은색 장포를 입은 남자가 서재 안에 앉아 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 남자는 붓을 잡은 채, 책에 쓰인 사람들의 이름을 동그라미 표시를 하며 결정을 내렸다.
“잠깐.”
묵백이 시선을 들고 물었다.
“목국의 신은전?”
용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옆으로 갈 정당한 이유도 되고 그녀가 의심하지도 않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신은전에 대교습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자는 호국 공주 어머니의 옛 친구라고 했습니다. 방법 좀 알려주십시오. 그가 분명 우리를 믿고 도와줄 것입니다.”
묵백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태자가 어영위라니…….”
‘머리가 잘못된 거 아니야?’
“괜찮습니다.”
용수는 자신과 상관이 없는 얘기를 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형님, 만약 형님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세상과 목숨을 모두 그 사람에게 주어도 달갑기만 하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달갑기만 하다고? 어이가 없군. 내가 매정한 사람이라서 다행이야. 그런 느낌을 평생 느끼고 싶지 않거든.’
묵백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용수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책을 받아든 뒤, 묵백이 표기한 이름을 보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이 사람들을 모두 그녀의 곁에 두려고?”
용수가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
“제가 기억을 잃었을 때, 그녀의 옆에 있는 사람은 무조건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녀를 지킬 능력도 충분하고요. 절대 문제가 생기면 안 됩니다.”
그는 야홍릉을 두 번 다시 잃고 싶지 않았다.
묵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모든 게 네 결정이라니 존중할게. 앞으로 더 신경을 써야 하겠네.”
그가 표기한 사람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미소년들이었다.
‘이들이 나중에 용수의 연적이 되면 재미있겠네. 설마 일부러 이들을 야홍릉에게 붙여 그녀가 한옥금에 대한 미련을 접게 하려는 거 아니야?’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용수는 눈을 내리깔고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인생을 다시 한번 살 수 있다고 하니 할아버지께서 다른 태자를 세우게 해주십시오. 전 아마도…….”
“용수야, 네가 이런 생각을 한다면 난 도와줄 수 없어.”
묵백이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넌 내가 너의 바보 같은 사랑을 불쌍히 여겨서, 이런 모험을 하면서까지 운명을 바꾸는 것 같아?”
용수는 침묵했다.
“난 세상을 위해 이러는 것이지 널 위하는 게 아니야.”
묵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널 동생으로 여기긴 하지만 대제사는 천하를 마음에 품어야지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서는 안 돼. 네가 신이 선택하신 제왕이 아니었다면 너와 야홍릉의 일에 난 관심도 두지 않았을 거야.”
용수는 눈을 감고 담담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다시 눈을 뜨고 자신의 치밀한 계획을 또박또박 말했다.
* * *
화면이 또 바뀌었다.
끝없이 펼쳐진 산길에 훤칠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길을 가고 있었다. 하얀색 옷에는 먼지와 피가 가득 묻었고 그의 머리카락 역시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마는 빨갛게 부어올랐고 무릎도 까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제사전에서 곤륜산 꼭대기까지 삼천 리나 되는데 언제야 끝이 보인단 말인가?
다시 태어나는 것은 그다지 기묘한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 목숨을 대가로 내놓고 자부심과 존엄, 평생의 부귀영화를 버리는 것으로 그녀가 다시 태어날 기회를 맞바꿔온 것이었다.
* * *
야홍릉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밀실 안의 새하얀 천장만 보였다. 그녀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온몸에 따뜻한 난류가 흘러 편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이 따뜻함에 빠져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아까 보았던 장면들이 계속해서 떠돌고 있었다.
야홍릉은 눈을 감았다.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낯선 느낌이 들었다.
‘진실이 정말 이러하다고?’
그녀가 아무것도 모를 때, 누군가는 그녀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했다.
그녀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을 때, 누군가는 모든 것을 쏟아부어 그녀 대신 복수를 해주었고 그녀를 해친 사람들에게서 대가를 받아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 사람을 알지도 못했다.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녀가 사랑한 사람은 그녀를 직접 죽였고 그녀가 만나 보지도 못한 사람은 뒤에서 묵묵히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야홍릉은 생각에 잠겼다.
‘그 사람은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았던 걸까?’
그녀는 천성적으로 싸늘하여 사람들과 가까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공이 좀 강하고 전쟁을 잘 치르는 것을 제외하고 그나마 괜찮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얼굴밖에 없을 것이다.
‘내 얼굴을 좋아한 건가?’
야홍릉은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얼굴 말고 다른 장점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배에서 묵직한 느낌이 전해졌다.
야홍릉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배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려 탑 앞에 엎드린 채, 깊게 잠이 든 남자를 바라보았다.
순간, 눈앞의 남자가 꿈에서 본 말을 타고 세상을 호령하던 남자와 겹쳐 보였다.
똑같은 얼굴이었으나 둘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한 명은 고귀하고 세상의 영광과 추앙을 받는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공손하게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꿈에서 본 광경이 지나치게 진실 되지 않았다면 그녀는 고귀하던 사람이 이렇게 비굴한 신분이 되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흠칫 떨렸다.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이니 서로에게 감정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녀를 위해 평생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곧 손에 들어올 천하를 버렸으며 천고일제가 될 기회도 포기했다.
그리고 하찮은 신분의 어영위가 되었다. 그 모든 게 그녀의 옆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매정한 사람이라도 감동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야홍릉은 깊게 숨을 내쉬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의문점이 있었다. 꿈속의 광경은 전생이었으나 이번 생에서 그가 신은전에 들어가기 전의 일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능묵은 몇 살에 신은전에 들어간 것이지? 기억을 잃은 상황에서 어떻게 순조롭게 내 옆에 보내질 것을 확신했지? 그가 내 옆에 붙여둔 사람들은 누구지? 그가 기억을 잃었을 때, 그들이 그의 지시에 따를 거라고 어떻게 확신한 거지?
영린이 되살아나길 바란 사람은 또 누구지? 그리고…….’
많은 의문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녀는 능묵이 깨어난 뒤에 물을 생각이었다.
이때, 그녀의 귓가에 능묵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야홍릉은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옆에서 엎드린 채, 잠들었던 소년은 이미 깨어나 있었다.
준수한 얼굴, 공손한 표정이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녀는 이상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킨 뒤, 물었다.
“무슨 꿈을 꾸지 않았어?”
“꿈 말씀이십니까?”
능묵은 당황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꿈을 꾼 것 같기도 하나 깨어나니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야홍릉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자신의 허리를 감싼 능묵의 팔을 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묵백이 널 속였나 보구나.”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곧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꾹 다문 채로 신음을 삼켰다.
오랫동안 무릎을 꿇은 자세로 엎드려 있다 보니 두 다리가 감각이 없을 정도로 뻣뻣했다. 휘청거리던 그는 하마터면 바닥에 쓰러질 뻔했으나 탑을 잡고서 간신히 일어섰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능묵이 시선을 들며 물었다.
“주인님,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으십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궁금한 게 많았으나 평소와 다름이 없는 능묵의 얼굴을 보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그녀는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능묵.”
준수한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주인님?”
그 꿈을 꾸지 않았다면 아무런 느낌이 없었겠지만 태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호령하던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온순하게 ‘주인님’이라고 부르자 야홍릉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말했다.
“꿈을 꾸었다.”
능묵은 눈을 내리깔고 조용하게 서 있었다.
“긴 꿈을 말이야.”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밀실의 하얀 벽을 보면서 말했다.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복잡한 기분이 들어.”
‘복잡한 기분이 든다고?’
능묵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꿈은 다 거짓이니 주인님께서 골치 아파하지 마십시오.”
“그래?”
야홍릉이 옅게 웃었다.
“묵백이 네 기억을 회복시켜 주겠다고 했는데, 지금 기억이 돌아왔느냐?”
능묵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지금 날 떠보는 것이냐?”
능묵은 무릎을 꿇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야홍릉은 그의 자세를 눈여겨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앞으로는 무릎을 꿇지 말거라. 이러는 건 좀 불편하구나.”
과거 제왕의 위엄이 이렇게 자꾸만 무너지는 것을 야홍릉은 볼 수 없었다.
능묵은 재빨리 일어서며 말했다.
“좀 떠오르는 것이 있기는 합니다만, 많지는 않습니다”
“뭐가 떠올랐는데?”
능묵이 말했다.
“사람들이 좀 떠올랐습니다. 묵백, 그리고 남제의 사람들과 일들 말입니다. 전 예전에 남제의 황자였습니다.”
그는 말을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주인님께서 저에게 남제에 황자가 몇 명 있냐고 물으셨지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에는 다섯 명이라고 알려졌지.”
“저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전 남제에서 존재감이 별로 없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홉 살이 되던 해에 남제를 떠났으니 저를 아는 사람은 더욱 적겠지요.”
야홍릉이 계속해서 물었다.
“남제를 떠난 뒤에 어디로 갔느냐?”
능묵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저었다.
“그 뒤로 기억이 없습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능묵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홍릉은 탑에서 일어서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너는 남제의 황자이니 남제로 돌아가야 하지 않더냐? 고귀한 황자가 영위로 살 수는 없잖느냐?”
능묵은 고개를 저었다.
“전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
능묵이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남제의 4황자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돌아가도 냉대나 받고 괴롭힘을 당할 텐데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냉대받고 괴롭힘을 당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