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기회가 있다
용수는 그들에게 야홍릉에게 저지른 행위를 후회하냐고 묻지 않았다.
뻔했기 때문이었다.
야홍릉을 죽인 게 이렇게 큰 파장을 부를 줄 알았다면 그들은 절대 야홍릉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고이 모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정의와 충성 대신 그들의 눈에는 권세, 탐욕, 이익, 간사함밖에 없어서 야홍릉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황제는 야홍릉이 세운 눈부신 군공 때문에 그녀를 꺼려 했다.
야소숙은 야홍릉의 존재만으로 그녀를 꺼려 했다.
한옥금도 마찬가지였다. 야홍릉이 살아 있다면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야자릉과 혼인할 수 없었다. 그가 야홍릉에게 보여준 가식적인 사랑은 모두 야홍릉이 야소숙 대신 변방을 지키고 군공을 쌓게 조종하기 위함이었다.
야소숙은 소원대로 태자가 되었으니 야홍릉은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었다.
그는 야자릉과 혼인하기 위해서 야홍릉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용수는 그들에게 후회하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뉘우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홍릉도 그들의 가식적인 참회를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들이 피로 참회하기를 바랐다.
한 사람을 능지처참으로 처형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생각보다 많이 걸리지 않았다.
용수는 그들이 조금씩 고통을 맛보기를 바랐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시간을 많이 쏟고 싶지 않았다.
시위의 수법은 아주 깔끔했다.
그는 한옥금의 살점을 조금씩 조금씩 정교하게 베어냈다.
한옥금이 멀쩡하던 사람에서 피가 뚝뚝 흐르는 해골로 변하는 데 반 시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그는 고통을 못 이겨 네 번이나 기절했지만 그때마다 시위는 그를 깨워서 다시 형을 집행했다.
결국 그는 숨만 몰아쉬며 산 채로 피투성이 인간이 되었다.
이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황제와 황후, 그리고 비빈, 황자들은 넋이 빠져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기절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의식이 남아 있는 사람들도 얼굴이 사색이 된 채,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소에 위풍당당하며 툭하면 다른 사람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던 황족 귀족들도 지옥에서 온 사신 같은 용수의 눈빛에 온몸이 굳어 두려움에 떨었다.
능지처참은 계속되고 있었다.
용수는 빙관 앞에 무릎을 꿇어앉아 야홍릉이 보관된 빙관을 쓰다듬었다.
그는 야홍릉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청혼하는 날이 오기를 얼마나 꿈꿔 왔던가?
‘사랑하는 이여, 내 아내가 되지 않겠소?’
그러나 강한 피비린내에 그의 마음은 슬프기만 할 뿐이었다.
용수는 얼굴을 차가운 관에 붙인 채,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사랑하는 감정을 얘기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차가운 빙관에 누운 여인은 그에게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연모의 정을 표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야홍릉을 데리고 남성국에 데려가 아내로 맞이해야겠어.’
이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그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는 빙관에 누운 여인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떨리는 입술로 애달픈 미소를 지었다.
“원래 당신에게 내 아내가 될 생각이 없는지 물으려고 했소. 지금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려. 적어도 당신이 거절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
복수로 울분을 토한 그는 그녀가 담긴 빙관을 들고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반대해도 그는 이 여인을 정실로 맞이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호국 공주는 대군의 호송을 받으며 머나먼 남성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능묵이 느낀 꿈의 광경은 어지럽게 변했다.
누군가 분노에 차서 큰소리로 외쳤다.
“절대 안 되는 일입니다! 남성국의 태자가 어찌 죽은 여인을 태자비로 맞이한다는 말입니까? 황당한 일입니다!”
또 누군가는 설득하려고 했다.
“전하,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옵소서. 태자의 혼인은 애들 장난이 아닌 큰일입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대제사, 전하를 좀 설득해 주십시오. 절대 태자가 이런 짓을 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훤칠한 남자가 대전 위에 우뚝 선 채,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남성국 태자 자리를 포기하면 내 혼인은 자네들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 되지 않겠소?”
그 말에 대전은 정적에 잠겼다.
사람들은 무릎을 꿇은 채, 가슴 아픈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태자는 그들의 자랑이었다. 등극하기도 전에 세상 절반을 손에 넣었고 곧 세상을 통일시키고 여섯 나라를 남성국으로 만들 수 있었다.
남성국 사상 이렇게 눈부신 성적을 이루어낸 태자는 없었다.
그는 신이 직접 뽑은 황제감이고 남성국 및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제왕으로 될 것이다.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천고일제 역시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
수백 명의 대신은 무릎을 꿇고 간청을 드렸다. 이 순간만큼은 파벌 싸움도, 권모술수도 없이 한마음 한뜻으로 태자가 생각을 바꾸기를 바랐다.
누구도 이런 태자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훌륭한 태자가 이미 죽은 여인 때문에 미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황제는 이 일로 아예 앓아누웠다.
세상을 거머쥐게 될 남성의 황실이 고작 여인 한 명 때문에 혼란스러워진 것이란 말인가?
신하들은 속이 탔고 안타까웠으며 불안했다.
“용수야.”
하얀 장포를 입은 대제사가 대전 밖에 서서 그를 불렀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모든 것을 감싸 안을 것 같은 힘을 담고 있었다.
“나와 함께 제사전으로 가자꾸나.”
그 말에 대신들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들은 희망을 보았다.
‘대제사가 드디어 입을 열었어. 그는 분명 태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이야.’
용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전의 사람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는 곧 묵백을 따라 대전을 나간 뒤, 제사전으로 향했다.
용수는 제사전의 석실에서 한 소년을 보았다.
그 소년은 준수한 얼굴에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림에서 보았던 귀공자를 연상하게 했다.
소년은 조용히 포단 위에 앉아 있었는데 온몸으로 처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어제 너 대신 점을 쳐보았어.”
묵백은 대전 안에 서서 흰색 장포에 숨겨진 두 팔을 내려뜨린 채,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
용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싸늘한 표정을 고수했다.
그는 묵백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눈앞의 소년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목국에 가서 야홍릉의 복수를 마치고 그녀의 시신이 담긴 빙관을 남성국에 가져온 뒤, 그는 모든 일에 관심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오로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생각밖에 없었다.
누구도 그의 생각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대신들이 반대하면 그는 남성국 태자의 자리를 포기하고 야홍릉을 데리고서 먼 곳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리고 만약 대제사가 그를 막는다면……
“네 소원을 이룰 방법을 찾았어.”
묵백이 담담한 얼굴로 내뱉은 말은 용수가 꿈에도 그리지 못한 반전이 들어 있었다.
“나한테 이 모든 것을 되돌릴 방법이 있다면…… 넌 대가를 치를 거야?”
‘이 모든 것을 바꾼다고?’
용수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차갑게 물었다.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면 그 어떤 대가도 치를 겁니다.”
그는 묵백이 그더러 강산과 황위를 포기하라고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원래 네가 삼십 년 수명을 내놓아야 운명을 바꿀 기회를 가지고 야홍릉이 되살아날 수 있는데, 그 수명을 대신 내어 줄 사람이 생겼어.”
묵백은 그를 바라보며 포단 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을 가리켰다.
“너희가 같은 일을 바라나 되돌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야. 신이 자비를 베풀었으니 난 한 번 시도해 보고 싶어.”
‘운명을 바꾼다면 야홍릉이 다시 살아난다는 거야?’
용수는 몸을 흠칫 떨었다. 그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묵백을 바라보았다.
“뭐라고요?”
묵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되었으니 세상을 위해서라도 규칙을 어겨 보려고.”
‘나라고 다른 수가 있겠어? 고지식한 이 녀석이 굳이 죽은 사람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말이야. 일반적인 백성 가문이라면 정이 깊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제왕의 혼인을 이렇게 치를 수는 없잖아?
황후의 자리를 비우는 한이 있더라도 죽은 사람을 황후로 세울 수는 없지 않겠어?
그러나 만약 이 녀석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정말 다 포기하고 빙관과 함께 떠날 텐데 남성국도 혼란에 빠지지 않겠어?’
“그러고 보니 너희는 같은 뿌리 출신이네.”
묵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동병상련이 된 셈이지.”
둘은 동병상련인 것도 같고 고지식한 것도 같았다.
정에 얽매여 자승자박하는 것도 같았다.
‘같은 뿌리라고?’
용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내리깔았다.
그제서야 그는 소년의 옆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소년은 놀랍게도 동제의 황제, 영린이었다.
“둘 다 목욕하고 이곳에서 사흘간 기도해.”
묵백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온화했다.
“곤륜산 산꼭대기는 남성국의 신이 거주하는 성지야. 제사전에서 곤륜산 산꼭대기까지 삼천 리인데 삼보에 한 번 무릎을 꿇고 구보에 한 번 고개를 조아려야 해. 용수야, 네가 이 과정을 겪으면 소원이 이루어질 거야.”
용수는 항상 묵백의 말을 믿어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묵백에게서 단호한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묵백을 바라보면서도 미칠 듯한 기쁨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정말입니까?”
그는 삼천 리를 꿇으면서 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그가 이 과정을 견딜 수 있을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소원만 이루어진다면 그는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묵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야.”
한 명은 삼십 년의 수명을 대가로 내걸었고 다른 한 명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삼천 리를 걸어야 했다.
같은 혈통의 두 황족이 이렇게 협력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협력은 천하를 가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면 황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확답을 들은 용수는 바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침착함을 되찾고 지혜가 번뜩이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또다시 차갑고 담담하며 속이 깊은 남성국 태자 헌원용수로 돌아왔다.
“묵백 형님, 이 전에 제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가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협조 좀 부탁드립니다.”
묵백은 그의 속생각을 깨달은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지금 나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