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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23)화 (12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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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자업자득

용수의 정예 대군은 아직 황성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는 홀로 성 밖의 군영으로 가서 현갑군의 병부를 들고 야홍릉을 따라 전쟁터에 나갔던 병사들에게 말했다.

“나는 호국 공주를 대신하여 복수하려고 한다. 아직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면 가만히 있으면 된다. 날 도울 필요도 없다. 난 그녀의 동포였던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고 현갑군의 병사들을 직접 죽이고 싶지도 않다!”

호국 공주가 죽은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데다가 그녀 휘하의 네 장군마저 살해당해 현갑군은 지금 대장이 없이 방치된 상태였다.

병사들은 뼈를 깎는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호국 공주를 잊을 수 있겠는가?

‘동포’라는 용수의 말 한마디에 병사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온몸으로 살기를 내뿜는 이 공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가 황권에 도전장을 내밀 사람이라는 것은 알아보았다.

그는 이 며칠 동안 호국 공주를 위해 나서겠다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용수는 이 말을 던진 채, 군영을 떠났다.

한씨 저택은 이미 말이 아닐 정도로 혼란스러워졌다. 비명과 울부짖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땅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를 풍겼다.

한옥금과 그의 신부 야자릉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용수가 한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 천여 명의 정예 병사들은 이미 한씨 저택을 떠난 뒤였다.

그러나 그가 떠나 있는 동안, 목국의 금위군들은 한씨 저택을 포위하고 길거리의 양쪽에, 지붕 위에 잠입하여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촘촘한 화살들이 번뜩이는 한기를 내뿜으며 남성국의 정예 병사들을 노렸다.

공기는 더없이 차가웠으며 또 한 번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바로 일어날 것 같은 위태로운 분위기였다.

용수는 말에 앉은 채, 고개를 들었다. 그의 서리 낀 시선은 태자 옷을 입은 사람에게 향했다.

야소숙이었다.

야홍릉의 죽음에 그도 끼어 있었다.

태자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는 용수의 한 서린 차가운 눈빛과 마주하자 깜짝 놀랐다.

그에게서는 완벽하게 가려지지 않은 공포가 보였다.

진정한 공포 말이다.

누구라도 이렇게 무시무시한 장면을 보게 된다면 겁을 먹을 것이다. 완전히 낯선 사람이 홀로 천여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방위가 엄격한 황성에 쳐들어와 사신처럼 사람을 마구 죽이는데 누가 겁을 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그들은 어사부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

야소숙은 더이상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황성의 금위군은 모조리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야소숙은 현갑군에게 지시를 내려 이곳을 진압하라고 했지만 현갑군은 지금까지 아무런 기척을 보이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궁수들에게 포위되었음에도 침착하고 온몸으로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는 정예병들을 보자 야소숙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용수는 시선을 돌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옥금과 야자릉은 어디 있느냐?”

이 말에 야소숙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포위된 사람들 중에서 차분하고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께 아룁니다. 제가 이미 그 둘을 잡아 두었습니다.”

그는 잡아 두었다고만 했지 어디에 잡아 두었는지 말을 하지 않았다.

용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기 어린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지옥에서 온 사신처럼 음산했다.

“오늘 밤 야씨 황족의 모든 생명을 없애버리겠다. 한 놈도 빠짐없이!”

그의 말이 끝나자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야소숙은 안색이 확 바뀌었다. 그는 경악했고 분노했고 또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성이 멸망할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그는 다급히 손을 휘두르며 지시를 내렸다.

그의 목소리는 긴장한 탓에 떨리고 있었다.

“활을 쏴! 얼른 쏴죽이라고!”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저녁 무렵, 이십만 대군이 밀물처럼 성문 밖에 다다랐다.

그와 함께 황성은 멸망되었으며 야소숙이 꿈꾸던 제왕이라는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나라가 망한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떠들썩하고 번화하던 황성이 눈 깜작할 사이에 멸망했다.

이십만 명의 대군을 막을 수 있는 나라는 없었다. 남성국은 원래도 병력이 강해 천하의 나라들 중 으뜸이었다. 게다가 용수는 천하를 통일시키려고 칠 년 동안 밤낮없이 훈련을 거듭했기에 병사들은 하나같이 정예병들이었다.

거기다 현갑군까지 가만히 있지 않은가?

설사 야홍릉이 직접 거느렸던 현갑군이 모조리 나선다고 해도 우두머리가 없는 그들은 남성국 정예병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시간을 잠시나마 끌 수 있는 게 다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갑군은 야소숙의 반복된 명령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황궁의 황제도 똑같은 명령을 세 번이나 내렸지만 현갑군 전체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를 해칠 수 없었고 공주 전하를 위해 복수할 수 없었으나 공주 전하를 죽게 만든 범인들을 지키고 싶지 않았다.

다른 황자와 공주들은 제경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매일 산해진미를 먹고 비단 옷을 입을 때, 호국 공주는 그들과 함께 먼지투성이인 전쟁터에서 칠 년 동안 고생했다.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세월을 전쟁터에 바쳤다.

그들의 호국 공주는 칠 년 동안 목숨을 바치며 전쟁터에서 쌓아 온 군공으로 결국 역모죄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결말을 맞이했다.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 법.

세상 사람들의 무정한 마음에 그들은 마음이 차게 식었다.

야씨 황족의 멸문 역시 자업자득이었다.

* * *

말을 타고 궁으로 들어간 용수는 검은 옷을 입은 키 큰 남자를 보게 되었다.

아무 이유 없이 그는 느낌만으로 이 남자가 대교습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용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금위군의 궁수들이 그의 정예병들을 포위했을 때, 갑작스럽게 나타난 흑의인 때문에 야소숙의 계획이 흐트러졌다. 흑의인은 궁수들을 죽여 용수에게 시간을 벌어 주어 용수의 병사들이 크게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

“별말씀을요.”

흑의 남자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호국 공주의 시신은 신은전의 빙관(氷棺)에 있습니다.”

말을 멈췄던 그는 다시 이었다.

“이 세상에 그녀를 아직 기억하고 대신 복수를 해주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용수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용수는 이 말에 또다시 가슴을 저미는 후회를 느꼈다.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숨기며 말했다.

“다시 돌이킬 수 있다면 전 절대 그녀 대신 복수나 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가 이미 죽었는데 복수를 해서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렇게 해서 그녀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흑의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수도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대정전(大正殿)으로 말을 몰았다.

황제, 태후, 황후, 후궁 비빈, 그리고 황자와 야씨 종친까지 야씨 황족의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갇혀 있었다.

대정전 밖에는 깃발이 우뚝 솟아 있어 각별히 눈에 띄었다. 남성국 병사들은 늠름한 자태로 늘어서 있었는데 그들에게서 소름끼치는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몸서리를 치게 될 것이다.

용수는 차가운 눈으로 이들을 훑어보았다. 그는 누가 주모자인지, 누가 공모자인지 알아보고도 싶지 않았다. 그는 차갑게 한 마디만 던졌다.

“이들을 모두 신은전으로 데려가거라.”

말을 마친 그는 신은전으로 달려갔다.

투명한 수정 빙관에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누워 있었다.

다만 전쟁터를 누비던 어여쁜 모습과는 달리 지금 빙관에 누워 있는 여인의 하얀 얼굴에는 검푸른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의 빨갛던 입술도 검푸르게 메말라버린 채였다.

그녀에게서는 더 이상 생기와 예전의 눈부신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용수는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슴을 찌르는 아픔에 그는 피를 왈칵 토했다. 빙관에 튄 빨간 피가 유난히 눈을 찔렀다.

“전하!”

시위가 다급히 앞으로 나서며 그를 부축했다.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난 괜찮다.”

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 그러나 그의 말투에 담긴 서글픈 마음을 느낀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아팠다.

용수는 고개를 들고 관속에 누워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얼굴을 가슴 깊이 담아두고 싶었다.

이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끌려온 사람들을 보았다.

비빈들은 겁을 먹어 창백한 안색으로 훌쩍거리기 바빴다.

황제와 황자들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했다.

심지어 그들은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뼛속 깊이 스며든 공포를 숨기지 못했다.

“너, 너는 도대체 누구냐?!”

황제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난 너와 원한도 없는데 왜…….”

“원한이 없다고?”

용수의 담담한 목소리에는 조롱을 담고 있었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이 여인을 죽인 이상, 나와 철천지원수를 진 것이다….… 호국 공주로 책봉했으면 알아야 하지 않느냐? 이 호국 공주가 없는 이상, 네 나라, 네 강산, 네 황위, 그리고…… 너희들의 목숨을 지켜줄 사람은 더 이상 없다는 것도 말이야!”

그는 차갑게 덧붙였다.

“한옥금과 야자릉을 데려오거라!”

명령과 함께 한옥금과 야자릉이 끌려왔다.

둘은 머리가 헝클어진 채,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입은 옷과 얼굴에는 모두 빨간 피가 묻어 있었다.

“오늘 나는 너희들의 피로 야홍릉의 영혼을 달랠 것이다!”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흠칫 놀랐다.

“여봐라, 한옥금과 야자릉을 능지처참하거라!”

그 말에 처절한 절규가 들려왔다.

“부황! 어마마마! 살려주세요! 전 죽기 싫어요! 전 죽기 싫어요! 살려주세……!”

“이…… 이러면 안 된다!”

황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버럭 화를 냈다.

“자릉이는 내 딸이자 황실의 공주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 아이를 죽이는 것이냐?”

“내가 이러면 안 된다고?”

용수는 코웃음을 치더니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두고 보면 알 것이다.”

한옥금은 덜덜 떨리는 입으로 물었다.

“당신은 도…… 도대체 누구요?”

“내가 누군지 넌 알 자격이 없다.”

용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넌 네가 저지른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손을 내저었다.

정예병이 그를 붙잡았다.

검이 휘둘러지자 옷과 함께 살이 베어지며 피가 튕겼다.

한옥금은 처참하게 비명을 질렀다.

“아악!”

“저 녀석의 입을 막거라.”

용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호국 공주가 쉬고 계시거늘, 시끄럽게 굴면 안 되지.”

시위는 한옥금의 옷을 베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또 검을 휘두르자 아까보다 더 큰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한옥금은 창백한 얼굴로 기절해버렸다.

이 모습을 본 야자릉도 덩달아 기절했다.

비명, 울부짖음, 흐느끼는 소리가 떨어져 가는 살점과 함께 신은전의 정전 밖까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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