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목국을 공격하다
“용수야.”
묵백의 온화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먼 곳에서 들리는 신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고통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너답지 않구나. 정말 이렇게 자신을 놓을 것이냐?”
평온한 목소리는 부드럽게 상처를 쓰다듬는 것 같았다.
용수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그는 모든 우울한 마음을 검은 눈동자에 숨긴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의 모습은 곤경에 빠진 흉악한 늑대와 다름이 없었다.
“형님, 전 피로써 그녀의 영혼에 제사를 지내겠습니다.”
묵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묵백은 몇 년이 지나서 용수가 이미 그 여인에 대해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슴 깊이 뿌리를 내린 사랑은 싹을 피워내 뼛속 깊이 새겨졌다. 운명은 그도 모르는 사이에 용수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이것은 묵백의 실책이었다.
대제사로서 이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그도 절대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라서 받아들여야 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있는 한, 다른 것은 그대로 지키고 있을게.’
* * *
목국 십칠 년 봄, 황성은 피로 물들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호국 공주는 역모죄로 사살당했고 공주부의 사람 수백 명이 죽임을 당했다. 그녀의 휘하 네 심복 장군의 가족까지 더하면 일천이 넘는 숫자였다.
피가 땅을 붉게 물들고 짙은 피비린내는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제경 백성들은 깊게 탄식하며 호국 공주가 세운 공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황권이 무서워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호국 공주는 성미가 차가운 탓에 그녀는 평생 신임한 사람이 몇 명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그녀의 모든 심복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자 그녀를 대신해 억울함을 호소할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생전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8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결혼 날짜는 삼월 십육일로 봄이 될 무렵으로, 야홍릉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듯 차갑고 무정했다.
황성에서 풍기는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한 어사부와 황후의 8공주의 혼례가 성대하게 열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더 큰 재난이 곧 닥쳐올 줄 생각하지 못했다.
정예병 이십만 명이 갑작스레 쳐들어왔다.
그들이 지나간 곳마다 시체가 널브러졌다.
용수는 홀로 정예병 천 명을 거느리고 밤낮없이 달려왔다.
그날은 마침 삼월 십육일이었고, 한옥금과 야자릉의 혼례 날이었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사신처럼 지나가는 길을 피로 물들이며 어사부로 향했다.
그의 검이 휘둘러지는 곳마다 피가 흩날렸다.
어사부는 겁에 질린 비명과 함께 황망히 도망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람에게서 뿜어지는 피는 신랑이 입은 혼례복과 같은 빨간색이었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피는 악몽으로 남게 될 이 날을 화려한 색깔로 치장했다.
“으악!”
말에 앉은 준수한 청년은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온몸으로 살기를 내뿜었다. 그의 검은색 눈동자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음울함만 가득했다.
“한씨 가문 사람 중 한옥금만 제외하고 모두 죽여라!”
이렇게 명령만 달랑 남겨놓은 채, 용수는 돌아서서 홀로 호국 공주부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변고에 황제는 깜짝 놀랐다.
이미 태자로 정해진 야소숙은 태자 옷차림으로 다급히 금위군을 거느리고 어사부에 출동했다. 그리고 한씨 저택에서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병사들을 포위했다.
그러나 궁에서 편히 지낸 금위군은 남성국 정예병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정예병의 칼에 무참히 패배했다.
용수의 앞을 막은 사람들은 모두 몸이 잘렸다.
용수는 길을 피로 물들이며 호국 공주부의 대문 앞에 도착했다.
위풍당당하던 호국 공주부에는 흰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익숙한 슬픔과 후회가 또 몰려왔다. 용수는 목구멍이 뜨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피비린내가 단번에 그의 코를 찔렀다.
그는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억누른 채, 말에서 내려 굳게 닫힌 대문을 열었다. 그러자 아직 처리하지 못한 시체가 이리저리 널브러진 것이 보였다.
공기 중에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용수는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한 뒤, 공주부 안으로 들어갔다.
주원으로 들어간 그는 피가 묻은 ‘홍릉원’이라는 팻말을 보았다. 가슴이 또다시 칼에 찔린 것처럼 아팠고 발걸음이 무거워져 움직일 수 없었다.
삼월의 날씨는 제법 따뜻한 편이었다.
그런데 시체를 이런 기온에 며칠이나 내버려 두다니……
용수는 입술이 핏기를 잃도록 꽉 깨물고 방문을 열었다.
그는 방안을 둘러보았지만 야홍릉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공주의 침전은 가구도 적고 스산했다.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처럼 여인다운 아늑함이 아닌 싸늘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주 깔끔했다.
‘너무 사내다운 성격을 가져서 이런 결말을 맞이한 것인가?’
안방으로 들어갔지만 여전히 그가 보고 싶은 사람을 찾지 못했다.
용수의 표정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는 오래 머무르지 않고 방을 나왔다.
이때, 마침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사람은 용수를 보더니 다급히 정원의 나무 뒤에 숨었다.
용수가 차갑게 말했다.
“나와.”
그의 말이 끝나자 머슴 차림의 사람이 고개를 숙인 채, 걸어와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고, 공자, 호, 혹시 호국 공주를 찾으시는…….”
용수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머슴의 옷깃을 잡은 채, 시뻘게진 눈으로 물었다.
“그녀는 어디 있느냐?”
머슴은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구…… 궁에 있어요.”
용수는 실눈을 뜨고 한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널 보낸 것이냐?”
“대…… 대교습이오…….”
‘대교습?’
용수는 차가운 얼굴로 캐물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냐?”
“저, 저도 모릅니다…….”
머슴은 놀란 나머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용수에게서 풍기는 살기가 너무 무시무시했다.
“저, 저더러…… 말을 저, 전하라고 하셔서…….”
용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의 옷깃을 놓고는 대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고…… 공자…….”
머슴은 뒤돌아서 그를 쫓아갔다.
“대…… 대교습이 공자더러 머, 먼저 바깥의 일을 마치라고 하셨습니다. 고, 공주 전하의 시신은 보존되어 있으니…….”
용수는 발걸음을 멈췄다.
‘먼저 바깥의 일을 마치라고?’
그는 눈을 감고 조급한 마음을 억눌렀다.
‘그래, 먼저 바깥의 일을 마쳐야지.’
“공자.”
머슴이 조심스럽게 병부를 내밀었다.
“이것은 현갑군의 병부입니다. 대교습이 폐하에게서 받은 것인데 공자에게 필요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용수는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 병부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또 욱신거렸다.
그는 손을 뻗어 병부를 받아 들었다.
차가운 느낌이 드는 게 그녀의 병부가 맞는 것 같았다.
용수는 애달픈 얼굴로 병부에 또렷이 새겨진 글을 어루만졌다.
마치 전쟁터를 누비는 그녀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진 듯했다.
그녀의 싸늘한 얼굴과 도도한 분위기가 보고 있는 것처럼 눈에 선했다.
그는 병부를 꽉 움켜쥐고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교습이 날 안다더냐?”
머슴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하지만 대교습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시기에 한씨 저택에 쳐들어가 사람을 죽이고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공주부에 들어간 사람은 절대 공주 전하의 적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분명 공주 전하의 복수를 하실 능력과 담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대교습은 공자께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다는 말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용수는 시선을 돌려 젊은 머슴을 바라보았다.
“넌 대교습의 사람이냐?”
머슴은 두려움을 내려놓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해다오…….”
용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감정을 억누르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호국 공주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 보아라.”
머슴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공주 전하는 좋은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좋은 사람은 명이 길지 않지요.”
‘좋은 사람이라고?’
용수는 입을 꽉 다물었다.
그는 한 번도 그녀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어찌 단순하게 좋고 나쁨으로 한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는 그녀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어떤 여인보다도 특별했다. 차가워 보이나 열정이 넘치며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절벽 위의 꽃 같은 존재였다.
대단하다고 자부하는 남자들도 그녀에게 한참 못 미칠 것이다.
그녀는 권모술수를 부리지 않는 도도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남을 해치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해치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공주 전하와 한씨 가문의 2공자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전하께서 전쟁터에 나간 것도 그를 위해서였죠. 그러나 폐하는 공주 전하가 가지고 있는 병권을 두려워하며 줄곧 사혼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머슴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공주 전하의 사랑을 듬뿍 받던 한 공자가 그녀를 직접 죽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때마침 도착한 황제의 성지가 야홍릉을 죽인 한옥금에게 그럴듯한 핑계를 마련해 주었다는 거였다.
호국 공주는 역모죄를 뒤집어썼고 공주부는 하룻밤 사이에 피로 물들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대교습이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때였다.
용수는 병부를 꽉 움켜쥐었다. 마음속에서 둔탁하고 익숙한 고통이 또 느껴졌다.
‘한옥금.’
순간 용수는 그녀에게 욕을 퍼붓고 싶었다.
‘당신은 얼마나 멍청하기에 이토록 가식적이고 악독하며 치졸한 인간을 사랑하게 된 것이지? 당신처럼 도도하고 대단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 당한 것이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 중에 평소에는 아무리 똑똑하다고 하더라도 누군들 평생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도 그중 하나이지 않은가?
묵묵히 대사를 계획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후회밖에 남지 않았는가?
천하를 통일시키고 야홍릉에게 가장 큰 영예를 안겨주려고 했던 그의 소망이 결국 한 줌 모래로 흩어져 끝없는 아픔과 후회로 남지 않았는가?
“대교습은 어떤 사람이냐?”
용수가 물었다.
“그자는 왜 야홍릉을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냐?”
머슴은 고개를 숙였다.
“대교습께서 공자가 이 질문을 하시면 이렇게 대답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은 공주 전하의 모친의 옛 친구라고요.”
용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