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내 아내가 되어주오
용수는 일 년의 시간을 들여 남제를 파멸시켰다.
그리고 남제의 성문 위에 서서 금국과 목국이 전쟁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앞에는 여전히 여인의 깡마른 몸매가 아른거렸다.
중원에는 여섯 개의 나라가 공존했다.
남성국은 가장 강한 나라 중 하나였다. 그러나 천하를 통일시키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조금씩 계획대로 움직이며 항상 금국과 목국의 상황을 살폈다.
남제를 멸망시킨 것은 다른 나라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남제는 용수가 자란 곳이자 어렸을 때 갖은 냉대를 받은 곳이기도 했고 그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몬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가 어머니를 위해 복수하는 것은 황족 귀족들에게 더없이 당연한 일로 보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분노가 있는 법.
그가 다시 날개를 펼쳤을 때, 자신이 당했던 일에 대해 화풀이를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용수가 전쟁을 일으킨 것은 복수도, 화풀이도 아닌 좋아하는 이를 위해서 싸우는 것임을 아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전쟁터에서 천군만마를 상대할 때면 그는 야홍릉과 어깨 나란히 전쟁을 치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선사했다.
그가 남성국의 궁에 있든, 아니면 남제의 전쟁터에 있든, 한두 달에 한 번씩 그가 보낸 첩자는 야홍릉의 소식을 비밀 서신의 방식으로 그에게 보내왔다.
그래서 그는 항상 그녀에 대한 정보를 받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야홍릉이 또 전쟁에서 승리하고 금국을 물리쳤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라 하나를 손에 넣은 것보다 더 기뻐했다.
다만 그는 오랫동안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데 익숙해져 누구도 그가 속으로 기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 뿐이었다.
이는 그의 마음속 비밀로 남았다.
그는 언젠가 그 소녀를 만나 직접 이 얘기를 해주기를 바랐다.
그 소녀를 만날 때마다 그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소녀에게 너무 깊이 빠질까, 걱정되어 열여덟 살이 된 뒤로는 군영과 조정에 집중하며 병법에 전쟁터에 몰두했다.
그는 그 소녀에게 가장 고귀한 신분을 주고 싶었다.
그는 세상 모든 이의 주목을 받으며 가장 화려하게 그녀를 황후로 맞이하고 싶었다.
그는 천하를 통일시켜 유일한 제왕이 된 그 순간에 직접 그녀에게 이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사랑하는 이여, 내 아내가 되어주오.”
그는 그녀에게 가장 눈부신 영광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는 둘이 함께 손잡고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설 날이 올 것을 갈망하며 끊임없이 노력했다.
심지어 그녀에게 마음껏 눈부시게 활약할 기회를 주려고 그는 목국과 금국의 전쟁에도 나서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도와 직접 금국을 멸하게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도도하고 자부심이 넘치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보호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목국의 유일한 호국 공주가 될 정도로 강한 여인이었다.
여인의 몸으로 목국을 수호할 정도로 훌륭한 여인이자 그녀의 오라버니들보다 훨씬 눈부신 여인이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유일하게 그의 마음을 빼앗아 간 여인이기도 했다.
그는 이 감정을 조심스럽게 수호하며 그녀의 자부심을 지키려고 했다.
그는 매일 나랏일에 힘썼다.
휘하의 정예 병사들이 점차 육성되자 그는 열아홉 생일이 지난 다음 동제를 공략할 생각이었다.
제국의 강산을 그의 손에서 통일시킨 다음 남성국의 땅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묵백이 그를 제지했다.
“동제는 지금 어린 황제가 곧 정사를 보는 중요한 시기야. 그와 섭정왕 사이의 내전은 동제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키겠지. 그들의 내전이 끝나서 원기가 크게 다쳤을 때, 다시 동제를 공략해.”
강한 자가 둘이 싸우다 보면 필시 한 명은 다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둘 다 다칠 가능성이 더 컸다.
제왕이 원기를 다친다면 국력과 병력은 약화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지금 동제의 병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영위였다. 병사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섭정왕 역시 상대하기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키는 것보다 그들이 먼저 치열한 내전을 벌이게 하는 게 나았다. 만약 어린 황제의 손을 빌려 이 무장을 쓰러뜨린다면 동제를 공략하는 일 역시 반쯤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용수는 결정을 바꾸었다.
그는 젊은 대제사인 묵백을 믿었다.
묵백이 헌원 황제와 함께 그를 남제에서 데려온 순간부터 둘은 서로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묵백은 어린아이가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남성의 황제와 대신들을 탄복시키며 강한 장군으로 거듭나는지, 그가 어떻게 위엄으로 자신을 무장하며 남성국에서 가장 고귀한 태자 전하가 되는지 지켜보았다.
용수도 묵백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제사전 지배자의 입지를 다진 것과 제사전이 묵백의 관리로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눈부신 영광을 누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가 나중에 황제로 등극한다면 묵백은 그가 가장 신임하는 오른팔이 될 것이고 그 또한 묵백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제왕이 될 것이다.
둘의 우정은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의 능력 역시 굳게 믿었다.
하지만 용수가 동제를 공략을 생각을 당분간 포기하려고 할 때, 남성국의 도움을 받지 못한 금국 황실이 서릉에 도움을 청했다.
그러면서 야홍릉의 초상화를 가져갔다. 그들은 서릉의 황제에게 금국을 도와 이기게 해준다면 이 도도하고 차가운 미인을 반드시 황제의 침실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서릉의 황제는 잔혹한 폭군이었다. 그는 미인을 못살게 괴롭히는 것을 좋아했다.
심지어 남녀를 가리지 않는 색마였다.
그는 성격이 거칠고 순종적이지 않은 미인을 잔인한 수단으로 굴복시키는 것을 좋아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용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초상화를 건네준 사람과 금국의 병사들, 그리고 서릉의 황제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는 소녀의 능력이 충분히 강하고, 그녀를 건드리는 사람들은 좋은 결말을 맞이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더러운 마음을 품은 사람들을 떠올리자 마음속에서 치솟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다음 목표를 서릉으로 정했다.
서릉은 금국과 목국의 전쟁터와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용수는 남성국과 서릉의 전쟁이 그 소녀에게 방해가 될까, 그녀가 전쟁터에서 세우는 판단이 흐려질까 걱정되어 조금씩 작전 방식을 변경하여 조용하게 서릉의 내정을 침식했다.
칼을 들어 무력을 사용하는 것보다 조용하고 치밀하게 내정을 간섭하는 것이 더욱 많은 인력과 재력을 소모했지만 이렇게 하는 가장 좋은 점은 병사들의 죽음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그러나 용수는 급하지 않았다. 그도 그녀도 아직 어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이가 많지 않았고 앞으로도 시간이 많았다.
그녀에게 세상을 선물할 수 있는 인내심과 시간이 그에게는 충분히 있었다.
목국 경제 십칠 년 봄.
금국과 목국의 전쟁이 끝날 무렵, 용수의 계획도 드디어 끝을 보게 되었다.
그는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칠 년의 시간을 들여 천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서릉, 동제, 그리고 목국에게 당해 망가진 금국 역시 그의 칠 년 동안 벌인 작전으로 서서히 용수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삼 개월도 되지 않아 서릉, 동제와 금국은 모두 남성국의 전리품이 될 것이다.
그동안 그는 딱 이 순간만 기다려 왔다.
용수는 직접 목국에 가서 그녀에게 청혼해야 하나, 아니면 목국이 전쟁을 끝내고 돌아갈 때, 난폭한 방식으로 그녀를 잡아 와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녀는 부드러운 것을 좋아할까, 아니면 거친 방법을 좋아할까? 내가 그녀를 잡아 온다면 나와 싸우려고 들지 않을까? 차가운 얼굴에 노기가 드리운다면 또 색다른 느낌이겠지?’
용수는 절박한 마음으로 그녀와의 만남을 기대했다.
하지만 설렘이 가시기도 전에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지독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 소식을 들은 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소식은 그의 모든 아름다운 환상을 깨버렸고 그가 꿈꿨던 둘의 미래를 부수어버렸다.
그는 자신이 들은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목국의 호국 공주 야홍릉이 약혼자의 비수에 찔려 사망하였다. 비수에 독이 묻혀 있어 미처 구할 수 없었다.”
“호국 공주는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썼고 공주부의 사람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호국 공주 휘하의 네 대장군 역시 역모의 죄명을 뒤집어쓰고 경성에 들어선 뒤, 금위군에 붙잡혀 천뢰에 갇혔다. 그리고 그날 온 가족이 몰살당했다.”
말 한마디, 한 마디, 한 글자, 한 글자가 그의 머리속에 들어오자 그는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을 맛보았다.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피를 왈칵 토한 뒤,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당황한 목소리며, 태의들의 조급한 발걸음 소리와 애타게 그를 부르는 외침을 듣지 못했다.
그는 오랫동안 그를 지탱하게 하던 신념이 무너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느끼게 되었다.
모든 열정이 식은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소녀의 싸늘하고 어여쁜 얼굴만이 떠돌 뿐이었다.
아름답고 도도한 소녀, 차갑고 차분하던 소녀.
갑옷을 입고 전쟁터를 누비며 한혈마보다 더 눈부시던 소녀.
‘그 소녀가 죽었다고?’
순간 용수는 미칠 듯한 후회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녀를 일찍이 데려오지 않은 자신을 증오했다.
‘왜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기만 했을까?’
그는 그녀가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할 줄 알았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적이 무섭다는 것을 그조차도 잊고 말았다.
그녀가 아무리 강해도 어찌 주변에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겠는가?
남성국의 태자로서 조정에서나, 전쟁터에서나 인정받는 그였지만 어렸을 때, 힘든 시간을 겪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어떻게 제왕의 무정함을 홀시했고 인간의 비열함을 잊었을까?
아무리 여인이라도 권력이 높아지면 황제는 위압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지 못했지?’
후회와 죄책감이 그를 숨 못 쉬게 억눌렀다.
모든 영광과 아름다운 미래를 꿈꿨던 환상이 한순간이 와장창 무너진 것이다.
용수는 극도에 달하는 절망과 고통에 사로잡혀 몸부림쳤다.
그는 시간을 반년 전으로…… 아니, 한 달 전으로 돌리고 싶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녀가 무사할 수 있도록 뭐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가장 무정한 것이었다.
그는 생각할 수 없었다.
생각만 하면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