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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20)화 (12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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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사람 한 명을 만났습니다

남성국은 강한 데다가 신을 모시는 제사전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런 나라의 황제가 정말 성녀의 행방을 찾지 못했을까?

당연히 아니었다.

헌원 황제는 딸의 행방을 알고 있었으나,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은 들어서 알게 되었다.

그는 딸이 황족과 제사전을 배반한 데 화가 났다.

동시에 딸이 사랑할 가치가 없는 사람을 사랑한 데 화났으며 젊은 나이에 죽은 것에 더욱 화가 났다.

아버지로서, 황제로서 딸에 대한 그리움은 여느 아버지 못지않았던 헌원 황제는 체면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는 딸이 제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

하지만 일찍 죽은 딸은 잘못을 뉘우칠 기회조차 없었다.

남성국의 헌원 황제는 사람을 남제의 황실에 보내 구 년 동안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는 딸이 낳은 아이가 궁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성격은 어떤지, 매일 뭘 하면서 지내는지,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는지 항상 지켜보았기에 용수의 친부인 남제 황제보다 그에 대해 아는 게 더 많았다.

그러나 그는 바로 나서서 아이를 데려오지 않았다.

황제는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그는 당분간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일 수 없었다.

그는 용수를 데려와 남성국의 황제로 키우고 싶었다. 그의 딸은 제사전을 배신했어도 남성국 공주라는 고귀한 신분에 성녀 직도 맡았었기에 신분적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원인은 남성국 대제사가 직접 말했다시피, 성녀의 아이는 신이 직접 선택한 남성국의 황제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용수는 헌원 황족의 성씨를 더해 헌원용수가 되었다.

낯선 곳에 온 아홉 살 아이가 보여준 행동은 실로 놀라웠다. 그는 과묵했으나 겁이 없었다. 구 년 동안 냉대받는 황자로 살다 하루아침에 남성국의 고귀한 태자가 되었음에도 전혀 으스대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차분했다.

구 년 동안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그의 지식과 무공은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외로웠던 삼천일 동안 홀로 책을 보고 병법과 진법을 연구하는 데 사용했다.

그의 문학 지식 역시 대단했다.

남성국 조정에서 차가운 얼굴로 한 몇 마디의 말에 대신들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연습장에서는 장창 한 자루로 천 명의 병사들을 쓸어 눕히며 제왕이 될 자의 위엄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어린아이는 짧은 두 달 동안 남성국 문관과 무장의 탄복을 불러일으켰고 차기 황제의 입지를 단단히 다졌다.

남성국은 신을 숭배하고 모시는 나라이자 강자를 숭상하는 나리이기도 했다.

황자들 간에 다툼이 있었으나 신이 직접 선택한 용수에 대해서는 순종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아이가 그들의 외조카라고 해도 다툼이 심하지 않았다.

그 뒤로 칠 년 동안 헌원용수는 남성국에서 점점 더 성장하여 차기 황제의 입지를 단단히 다졌다. 헌원 황제는 헌원용수를 볼 때마다 딸에 대한 그리움이 더 짙어지며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었던 분노도 점차 사그라졌다.

그러나 헌원 황제는 딸이 일찍 죽은 이유를 쉽게 잊을 수는 없었다.

‘정’이라는 한 글자는 사람을 참 아프게 하는 법이다.

그러나 황제는 감정에 너무 깊이 얽매일 수 없다.

손자가 딸과 똑같은 길을 밟을까 걱정이 되었던 헌원 황제는 용수가 등극하기 전에 정실 한 명과 측비 두 명을 간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헌원용수가 열여덟 살이 될 때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헌원용수는 열여덟 살이 되기 전에 운명의 여인을 만나버렸다.

“묵백 형님.”

어느 날.

준수한 소년은 제사전의 최고 높이에 서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그의 옷자락도 위엄 어린 얼굴에서 풍기는 멋스러움을 가리지 못했다.

“그저께 전쟁터에서 사람 한 명을 만났습니다.”

금국이 전쟁터에서 지게 되자 남성국에 대신을 보내 도움을 청했다.

그래서 용수가 직접 전쟁터에 다녀온 길이었다.

제사전의 신임 대제사로 임명된 묵백은 그 일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의 말에 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어떤 사람을 만났냐고?’

소년의 차갑고 준수한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주 특별한 사람요.”

묵백은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냐?”

‘전쟁터에서 만났다니 남자겠지?’

헌원용수는 시선을 내리깔고 담담하게 말했다.

“여인입니다.”

‘여인?’

묵백은 흠칫 놀랐다. 전쟁터에서 여인을 만났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나 이것보다 헌원용수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더 궁금했다.

남성국 차기 황제가 될 그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여인이 나타났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헌원 황제는 용수가 그의 어머니와 같은 잘못을 저지를까 항상 두려워했다.

‘만약 이 아이가 정말 그 여인에게 마음을 품었다면…….’

그 여인이 누군지 짐작이 간 묵백은 조용하게 물었다.

“그 아이, 몇 살이냐?”

용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본 묵백은 좋지 않은 예감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묵백은 용수가 첫눈에 반했다는 차가운 소녀가 몇 년 뒤에 세상을 발칵 뒤집고 죽음으로 천생 황제인 용수의 앞날을 무너뜨렸으며 더욱이 목국을 피바람에 몰아넣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런 일은 아무리 제사전의 대제사인 묵백이라고 해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주 특별한 여인입니다.”

잠시 뒤, 헌원용수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는 불안한 느낌이 풍겼다.

“저와 아주 닮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묵백은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용수와 닮은 여인이라고는 목국에서 열두 살부터 전쟁터에 오르고 열네 살에 홀로 병사를 이끄는 야홍릉 공주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목국과 금국의 전쟁터에 야홍릉을 제외한 다른 여인이 나타날 리 없었다.

젊은 대제사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옅게 웃어 보였다.

“용수야.”

그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대제사답게 부드러웠다.

“전쟁터는 아주 위험한 곳이야. 넌 장차 남성국의 황제가 될 몸이나 스스로의 안전에 조심해야 해. 앞으로 전쟁터에는 나가지 말아라.”

용수는 고개를 저었다.

묵백의 걱정을 느끼지 못한 듯,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 여인은 아주 특별했습니다.”

그리고 곧 말을 이었다.

“가서 또 보고 싶습니다.”

‘본다고?’

묵백이 물었다.

“뭘 보는데?”

“음……. 적을 상대하는 법이요.”

소년은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전 전쟁터에서 그렇게 침착한 소녀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아주 특별했어요. 그래서…… 자꾸만 보고 싶습니다.”

묵백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 옅게 웃었다.

“그래도 정사에 힘을 쓰는 편이 좋지 않겠어?”

헌원 황제는 이제 갓 예순이 넘었고 황자들도 나이가 꽤 있었다.

황제를 도와 정사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차기 황제는 용수이고 지금 마침 황제를 도와 조정 정사를 봐야 할 때였다.

용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따라 바람이 세서 둘의 옷자락이 끊임없이 나부꼈다.

한 사람은 먹처럼 새카맸고 다른 한 사람은 눈처럼 새하얬다.

노을빛이 소년의 얼굴에 드리우자 수묵화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그러나 새까만 눈동자에서는 알 수 없는 빛이 반짝였다.

그 뒤로도 한 달에 한 번씩 헌원용수는 이 년간 직접 키운 정예 심복과 함께 전쟁 상황을 살핀다는 이유로 금국의 변방에 갔다.

실은 그 소녀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그는 차가워 보이는 소녀가 정말 그가 생각하던 것처럼 강한지 직접 보고 싶었다.

금나라가 도움을 청하며 많은 이익을 내걸었지만, 용수는 항상 못 들은 척,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았다.

그 결과, 소녀는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 나가고 있었다.

암홍색 옷을 입고 전쟁터를 누비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탄 한혈마보다 더욱 눈이 부셨다. 그 모습은 소년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아 큰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그의 귓가에는 소녀의 짧은 인생에 대한 정보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다섯 살에 무공을 읽히고 일곱 살에 병서를 줄줄 읽었으며 열 살에 검 한 자루로 목국의 고수를 쓰러트렸다.

그리고 열두 살에 전쟁터에 나가고 열네 살에 홀로 병사들을 이끌었다.

그녀는 성미가 차가워서 그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고 항상 홀로 다녔다.

그녀와 그는 정말이지 너무나 닮았다.

그때부터 용수는 야심을 품기 시작했다.

“묵백 형님, 전 이 세상을 가지고 싶습니다.”

열일곱 생일이 지난 뒤, 용수는 더 이상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묵백을 만났을 때, 평온한 얼굴로 이런 말을 했다.

우아하고 온화한 묵백은 놀라서 눈썹을 치켜세웠다.

“남성국을 말이냐?”

질문을 했으나 그는 마음속으로 용수가 남성국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남성국은 원래 그의 것인데 굳이 ‘가지고 싶다’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요.”

용수는 고개를 저었다.

평범해 보이는 행동에 감출 수 없는 귀티가 더해지자 남다른 위엄이 전해졌다.

“저는 이 여섯 나라의…… 유일한 제왕이 되고 싶습니다.”

그는 이 여섯 개의 나라를 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 세상으로 만들고 싶었다.

묵백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한결같이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남성국은 오랫동안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병력이 강하고 국고가 부유하니 네가 정말 이 같은 야심을 가지고 있다면 폐하께서도 지지하실 거다.”

제왕에게 천하를 통일하는 것은 아무것과 비교할 수 없는 공적이 될 수 있었다.

역대 제왕들도 모두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 수 있는 훌륭한 황제로 되고 싶었다.

천고일제(千古壹帝, 훌륭한 황제를 칭송하는 말).

짧은 네 글자지만 모든 황제가 이루지 못한 꿈이기도 했다.

묵백은 용수가 왜 갑자기 이런 야심이 생겼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가 사랑에 푹 빠져 있는 것보다 큰 곳에 뜻을 두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다.

용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남성국에서 황제를 제외하고 신분이 가장 고귀한 태자였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할 일을 해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저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각국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집중하면 되었다.

정예 병사와 장군은 그가 세상을 정복하는 무기가 될 것이다.

그가 세상을 통일하는 첫 번째 목표는 바로 그를 낳고 키워주기도 했지만 그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던 남제였다.

그가 병사들을 이끌고 남제에 갔을 때, 그를 무시하고 조롱하던 황형들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고 남몰래 그를 괴롭혔던 내관들은 땅에 무릎을 꿇고서 눈물을 흘렸다.

소년은 갑옷을 입은 채, 말 위에 앉아서 흔들림 없는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눈앞의 광경에 꿈쩍하지 않았다. 그가 명사들을 이끌고 남제로 찾아간 것은 복수를 위한 것도 아니고 이들의 비굴한 모습을 보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의 귓가에는 황형들과 내관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암홍색 옷을 입은 깡마른 소녀가 자꾸만 떠올라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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