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잠 못 드는 밤
잠이 들기 전 야홍릉의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생각은 이곳이 참 신기하다는 것이었다.
겉보기에 고결하고 신비로워 보이는 묵백도 거짓말을 할 줄 안다는 생각이 들었고.세 번째로 떠오른 생각은……
세 번째의 생각이 떠오르기 전에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능묵이 만약 그녀를 해치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라면 용서해야 할지 말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능묵의 잘생긴 눈에는 부드러운 기색이 흘렀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야홍릉의 미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 입맞춤에는 깊은 사랑과 뼛속 깊이 새겨진 미련.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되찾아서 느끼는 희열이 담겨 있었다.
가냘픈 몸이 평평한 침대에 눕혀졌다.
준수한 청년은 한쪽 무릎을 탑 앞에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아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다. 그는 오랫동안 이 순간만 기다려 왔었다.
조용한 방에는 짙은 향기가 감돌았다.
다시 고개를 들고 그녀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는 능묵은 그녀의 모습 하나하나를 마음속 깊이 새기고 싶었다.
아니, 이미 오래전에 마음에 새겼을 것이다.
그는 야홍릉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밀실 안에는 깨끗하고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방에는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 말고도 부드럽게 피어오르는 온기가 가득했다.
침대 앞에 무릎을 꿇어앉은 능묵은 향기와 온기가 몸속으로 스며들자 짙은 잠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야홍릉의 손을 꽉 잡은 채, 오래도록 놓지 못했다.
* * *
“향을 피우고 목욕을 하러 간 거지?”
건양궁의 편전에서 영린이 탑에 기대서 눈을 내리깐 채, 물었다.
“그곳의 상황은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둘은 지금쯤이면 같은 꿈을 꾸고 있겠지요.”
검은색 장포를 입은 묵백이 창문 앞에 서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떤 방법도 이것처럼 효과를 보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할 필요도 없고 시간이나 정력을 낭비할 필요도 없으니 말입니다.”
영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이야?”
묵백은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등불에 비친 그의 얼굴은 더욱 귀티가 나는 것 같았다.
“제 말을 알아듣기 힘드십니까?”
“내가 멍청해서 그래.”
눈을 내리깐 영린이 쓸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보고 싶구나.”
“그 사람은 폐하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린은 멈칫했다. 책에 집중할 수 없었던 그는 아예 책을 내려놓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칠흑같이 어두운 밖을 바라보며 턱을 괴고 한층 더 쓸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가 예전의 일을 기억한다면 날 죽여버려도 속이 풀리지 않을 것인데 어떻게 날 그리워할 수 있겠느냐?”
침묵을 지키던 묵백이 말했다.
“폐하, 폐하와 헌원용수(軒轅容修)는 다릅니다. 너무 깊이 빠져 있지 마시고 이제 그만 헤어 나오십시오. 그게 둘 다가 편히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묵백, 지금 이런 말을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
영린은 시선을 들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헤어 나올 수 있다면 내가 지금 왜 이러겠어?”
묵백은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헤어 나올 수 있다면 왜 지금처럼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겠는가?
“헌원용수는 나와 다르지.”
영린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의 눈은 쓸쓸한 빛을 담고 있었다.
“그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꾼이야. 한 사람을 위해 세상을 버리고 곤륜산 아래에서 삼천 리 길을 참배하며 걸었으니. 시간을 되돌려 사랑하는 이가 다시 살아나게 하려고 말이야…….”
하지만 그는 어떻게 했던가?
온갖 추악한 수단으로 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았던가?
계략을 사용하며 자신이 똑똑하다고 자부했지만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가슴을 찌르는 후회밖에 없었다.
모두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려놓을 수 없었다.
죄를 너무 많이 지은 탓인지 그는 항상 악몽에 시달렸다.
매일 밤 그는 맑고 아름답던 눈이 서서히 원래의 빛을 잃어가더니 텅 빈 눈으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에 빠진 것처럼 모든 감정과 믿음을 잃어버리고 결국……
결국 어둠밖에 남지 않았다.
영린은 한숨을 내쉬고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은 언제쯤 깨어날 수 있어?”
“사흘 뒤요.”
묵백은 뒷짐을 지고 창가에 서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훤칠하고 귀티가 넘쳤다.
“그들이 깨어날 때쯤에는 이 세상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겠지요.”
묵백은 침묵을 지키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뱉었다.
“둘은 모두 강한 자들이니 둘이 손을 잡는다면 세상에 그들의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야.”
묵백은 침묵을 지켰다.
“궁금한 게 있어.”
영린이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들어 검은색 장포를 입은 묵백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누구의 것이 될까?”
묵백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묵백은 영린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용수는 그녀를 위해 제 손에 들어올 세상을 포기했어. 그의 진심은 더 의심할 나위가 없지. 하지만 예로부터 세상을 지배한 사람은 모두 사내였지.”
영린은 입꼬리를 올린 채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마찬가지로 이 호국 공주 역시 야심이 있는 인물이야.”
어쩌면 그녀는 처음부터 야심이 있는 사람인 아니라 핍박을 못 이겨 이렇게 변한 것일 수도 있었다.
배신을 당한 사람은 뭔가를 하려고 할 것이다.
야홍릉이 깨어난 뒤, 황제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람 때문에, 갑자기 드러난 비밀 때문에 자신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은 야홍릉의 천하가 될 것인가?
아니면 헌원용수의 헌원씨 천하가 될 것인가?
묵백이 옅게 웃으며 물었다.
“폐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영린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헌원씨.”
“전 폐하의 생각과 다릅니다.”
묵백은 고개를 젓고 담담하나 단호하게 말했다.
“전 이 세상이 결국 야씨 천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헌원용수는 제왕이 될 재목이야.”
“하지만 한 사람 때문에 제왕의 자리를 포기했지요.”
묵백은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한 번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두 번도 포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에 영린은 또 침묵에 잠겼다.
‘한 번을 포기했으니 두 번도 포기할 거라고?’
어쩌면 묵백의 말이 맞을 수 있었다.
야홍릉을 위해 세상을 포기하고 사내로서 자부심을 포기하고 곤륜산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던 모습이 아직도 영린의 눈앞에 선했다.
그때의 용수는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있었고 이마와 무릎은 피투성이가 된 채였다.
헌원용수는 얼마나 도도하고 패기가 넘치던 사람인가?
그러나 그는 여인 한 명 때문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구부렸다.
한 걸음만 나아가면 천하를 얻는데 그는 망설이지 않고 천하를 포기했다.
그런 마음과 집념을 어찌 세상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영린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은 채, 창가 앞에 기대앉아 끝없이 밀려드는 적막을 한껏 느꼈다.
이날 밤은 누구도 잠 못 드는 밤이었다.
* * *
세상의 만물은 모두 잠들었는지 고요하기만 했다.
엷은 한기가 아른거리며 감도는 궁전과 달리 따뜻한 밀실에는 깊이 잠든 두 사람이 있었다.
따뜻한 침대에 누운 야홍릉은 기나긴 꿈을 꾸었다.
그는 남제에서 제일 눈에 띄지 않는 4황자 용수였다.
외가가 든든한 힘을 보태주는 다른 황자와는 달리 용수의 생모는 신분이 낮은 데다 일찍이 난산으로 죽는 바람에 그는 태어나자마자 사람들의 냉대를 받았다.
황형들은 물론이고 궁중의 노복들조차 그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용수는 가히 경국지색이라 불릴 수 있는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도도하고 말수가 적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홀로 자신의 궁전에서 온갖 냉대를 받으며 아홉 살까지 버텼다.
구 년 동안의 인생은 고통스럽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황형들이 찾아와서 조롱하거나 궁중 내관이 몰래 생활비로 나눠주는 돈을 빼돌려 그가 먹는 음식이 좀 부실하고 입는 옷이 좀 초라한 것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구 년 동안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쓸쓸한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용수가 출신 때문에 평생 외롭고 쓸쓸하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면 한참 잘못된 생각이었다.
하늘은 큰 인물이 될 사람에게 먼저 시련을 내린다는 말이 맞았다.
삼천 날 동안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는 게 중임을 떠맡은 이 아이에게는 마음을 단단하게 키울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남성국 황제 헌원요(軒轅曜)는 남성 대제사의 자제 묵백을 데리고 찾아왔다.
이 일로 남제의 황성은 순식간에 들끓었다.
여섯 나라 중 가장 강하고 신비로운 남성국의 황제가 아닌가?
그의 방문은 점차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남제에게는 평생에 다시 없을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남제 황제와 신하들은 더없이 경건한 마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남제 황제는 연회를 아주 크게 마련했다.
그러나 남성국 황제는 이 연회에 참가하지 않고 남제의 황제와 어서방에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반 시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남제의 4황자 용수를 데리고 조용히 떠났다.
용수를 데리고 떠나는 과정은 조용하고 순조로웠다.
그러나 그날의 일로 남제의 문무백관은 모두 남제 황제가 멍청한 잘못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용수의 모친이 죽은 일과 용수가 황궁에서 받은 구 년 동안의 냉대는 앞으로 남제가 맞이할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용수의 어머니는 출신이 낮지 않았다. 그녀는 남성국 제사전의 성녀이자 헌원씨 황족의 공주였다.
그녀는 준수하고 온화한 황제 용명을 사랑하게 되어 신분을 숨기고 그에게 시집온 것이었다.
신령을 모시는 대제사와 성녀는 몸과 마음이 깨끗해야 하고 아무런 욕심이나 욕정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성녀가 사랑에 빠질 경우, 최대한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했다.
이렇게 해야만 자신의 마음과 사랑하는 이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사랑한 남자가 그녀에게 일편단심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
임신한 몸으로 남제의 후궁에 들어온 뒤에야 그녀는 자신도 그의 수많은 여인 중 한 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용명이 누차 절절하게 고백했던 사랑은 결국 남자가 아름다운 여인에게 품은 욕정을 미화한 말일 뿐이었다.
감정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던 그녀는 결국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되었다.
임신한 동안 궁에서 잘 지내지 못한 데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와 후궁 여인들의 권모술수에 꽃처럼 아름다웠던 그녀는 결국 꽃처럼 시들고 말았다.
그녀는 아이가 태어나는 날에 난산으로 죽으면서 아이의 얼굴만 간신히 보았을 뿐, 아이가 커갈 동안 그의 옆을 지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