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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18)화 (11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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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그러고 싶습니다

희미한 등불에 주렴(珠簾, 구슬로 장식한 커튼)이 맑은 소리를 냈다. 알 수 없는 동물 그림이 그려진 바닥에 빛이 아른거리며 이 궁전에 신비하고 장엄한 색채를 더해 주었다.

대전 내부의 온도는 아주 낮았다. 밖에서 들어온 그들은 무더운 여름에서 갑자기 추운 겨울에 발을 들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한기에 피부에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텅 빈 대전은 조용했다. 화려한 가구들이 가득했으나 쓸쓸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 한기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야홍릉은 다시 시선을 앞에 있는 묵백에게 돌렸다. 바닥에 닿을 것 같은 장포를 입은 묵백의 훤칠하고 어두운 모습에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곳의 환경과 이상한 분위기에 그녀는 평소처럼 침착한 마음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야홍릉은 이곳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 단순히 능묵에게 신은전에 들어가기 전의 기억을 찾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묵백이 괜히 신비로운 척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면사로 만들어진 듯한 문발들을 지나자 자욱한 안개가 나타났다.

묵백은 손을 뻗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능묵은 말없이 야홍릉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능묵은 입술을 꽉 다문 채, 너무 긴장한 탓인지 호흡도 거칠어졌다.

야홍릉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불안한 그의 얼굴을 보고 하려던 말을 삼켰다.

그녀는 사색에 잠겼다.

‘능묵이 왜 긴장하고 있는 거지? 지금은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고?’

“이곳은 욕지입니다.”

묵백의 목소리에 야홍릉은 사색에서 헤어 나왔다.

“이곳에서 목욕하시면 됩니다.”

야홍릉은 안으로 들어갔다. 대전 문을 지난 그녀는 안이 아주 어둡다는 것을 발견했다. 등불로 환한 밖과는 달리 이곳은 사람의 그림자나 어렴풋이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묵백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커다란 욕지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 선경 같은 느낌을 주었다.

“참, 말씀드리는 것을 깜박했네요. 향을 피우는 것은 제가 할 일이니 두 분은 목욕만 하시면 됩니다.”

말을 마친 묵백은 멀지 않은 곳에 매달려 있는 밧줄을 가리켰다.

“목욕을 마친 뒤에는 이곳의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밧줄 위에는 새하얀 면사 옷이 두 벌 걸려 있었다.

한기로 가득한 대전에서 면사 옷은 반짝이는 윤기를 내뿜는 것 같았다.

묵백은 벽 가까이 가더니 문을 밀어서 열며 말했다.

“옷을 다 갈아입으시고 이 밀실에 들어가 좀 쉬시면 됩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렸다.

밀실보다 침전에 가까운 방이었다. 침전의 바닥에는 푹신한 하얀색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남쪽 벽에는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무슨 재질로 만들었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침대 주변에 아른거리는 안개가 뒤덮여 있었다.

야홍릉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사술(邪術, 사악한 주술)이라도 할 것 같은데.”

이곳의 모든 것이 이상했다.

주변의 환경, 온도, 대전의 배치.

정상적인 게 하나도 없었다.

“사술?”

묵백은 입가를 실룩거렸다.

“참 상상도 풍부하십니다.”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힐끗 보았다.

“그럼 아니더냐?”

단순히 기억을 되찾는 것이라면 능묵에게 필요한 것은 의원이거나 해독약일 것이다.

목욕을 하고 향을 피운 뒤, 이상한 침전에 들어온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묵백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두려우신가요?”

‘두렵냐고?’

야홍릉은 침묵에 잠겼다. 그녀는 두려움이 뭔지 알지 못했다.

정말 뭔가를 두려워했더라면 그녀는 묵백을 믿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가 하라는 대로 따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주인님.”

오랫동안 침묵을 치키고 있던 능묵이 입을 열었다. 그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백옥호접고 말입니다…….”

묵백은 당황했다.

‘백옥호접고라고?’

야홍릉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갑자기 왜 이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치였다.

“뭐?”

“주인님, 그것을 제 몸에 넣으셔도 됩니다.”

능묵은 고개를 숙였다. 대전 안이 원래 어두웠던 데다가 그가 눈까지 내리깔고 있으니 더더욱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만약 사고가 생긴다면 저는 주인님과 함께 죽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들은 묵백은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파악했다.

위성의 봉씨 가문에서 그녀는 능묵에게 구전해독단을 주었었다. 그 약을 먹은 뒤로 능묵은 점차 기억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이런 말을 했었다.

“주인님께서 만약 이 녀석들을 피로 사흘만 키운다면 주인님의 피 맛에 적응하고 의존할 겁니다. 이렇게 사흘이 지나면 호접고를 제 몸에 심으셨을 때, 호접고는 자동적으로 독소를 배출하게 됩니다. 그때면 주인님의 피로만 녀석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런 방법으로 그를 통제하는 것이 제일 안전한 수단이었다.

최근 능묵에게서 이상한 점이 점점 많이 나타났다. 어영위인 그는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자 이런 방식으로 주인을 안심시키려 했다.

그 뒤로 야홍릉은 자신의 피로 호접고를 사육했다. 그러나 호접고로 능묵을 통제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만일의 경우를 위한 대비책으로 사육한 것이었다.

능묵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 것은 기억을 회복하는 게 제 일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과 연관이 없는 야홍릉은 그와 함께 이곳에 들어올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야홍릉은 그와 같은 곳에 서 있었다.

누구도 야홍릉을 강박하지 않았지만 능묵은 속으로 야홍릉이 그와 함께 있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왔다.

하지만 그들이 겪을 일에는 위험이 있을 수 있었고 야홍릉은 의식을 잃을 수도 있었다.

만약 이 과정에 묵백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다면 의식을 잃은 야홍릉은 반항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능묵은 백옥호접고로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에 야홍릉에게 사고가 생긴다면 그도 야홍릉을 따라 죽을 생각이었다.

“백옥호접고는 일반인에게는 소용이 있겠지만 너에게는…….”

야홍릉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내가 정말 호접고를 너의 몸에 심는다고 해도 묵백이 꺼내 주겠지.”

능묵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걱정할 것 없다.”

야홍릉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간만에 누군가를 다시 믿으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배신당한다고 해도 내가 운이 없어 그런 것이니 그 누구도 탓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둘의 대화를 듣는 묵백의 표정은 점점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기억을 되찾는 의식을 치를 뿐인데 왜 곧 죽을 사람처럼 이러지?’

묵백은 야홍릉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아주 나쁜 사람으로 보이나 봅니다?”

“나쁜 사람은 얼굴에 티를 내지 않는 법이니까.”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더 조심할 게 있느냐?”

“없습니다.”

묵백은 고개를 저었다.

“자시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야홍릉과 능묵을 바라보며 물었다.

“또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더 할 얘기는 없지만…….’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능묵과 함께 씻으라는 것이냐?”

묵백이 가볍게 웃음소리를 냈다.

“공주 전하,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능묵이 아무리 간덩이가 부었다고 해도 공주 전하를 어찌하지 못할 것입니다.”

욕지는 아주 크고 불빛이 어두워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야홍릉도 남녀가 유별하다는 것에 중점을 둔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본 것뿐이었다.

묵백의 말을 들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능묵은 그녀의 측근 어영위였다. 애정 행각을 벌인 적은 없지만 둘 사이의 친밀도는 애정 행각을 제외하고는 부부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오늘 밤 연회에서 영린 때문에 ‘노리개’의 신분까지 더해지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백은 문을 닫은 뒤, 대전 밖으로 나갔다.

주변은 다시 고요해졌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빛 속에서 그녀는 그녀와 능묵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목욕하는 도중에도 궁녀가 들어오거나 할 것 같지 않았다.

이곳은 묵백의 개인 영역이자 출입이 금지된 곳이기도 했다.

그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이상 누구도 가까이하지 못할 것이다.

“주인님, 추우십니까?”

능묵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한지(寒池)라 목욕을 하실 때 추우실 것 같으면 제가 진기를 뿜어 한기를 막아드리겠습니다.”

‘한지?’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욕지 위쪽에 피어오른 한기를 보면서 물었다.

“바깥이 추운 것은 한지이기 때문이냐?”

“네, 그러합니다.”

능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느냐?”

능묵은 당황하더니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지라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이냐?”

“……짐작한 것입니다.”

‘짐작했다고?’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능묵은 시선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홍릉도 그를 몰아붙일 생각이 없어서 안쪽으로 걸어갔다.

능묵이 따라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시중을 들겠습니다.”

야홍릉이 물었다.

“목욕 시중을 들겠다고?”

능묵은 침묵을 지키다 낮게 ‘네’라고 했다.

“정말 내 노리개가 되고 싶은 것이냐?”

능묵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 싶습니다.”

‘또 그러고 싶다니.’

야홍릉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리 가까이 오너라.”

“네.”

목욕하는 데 시간이 그다지 길게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한지의 물은 아주 차가워서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은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능묵은 야홍릉의 뒤에 가서 섰다.

그는 한지의 물이 몸을 감싸자 손가락 끝으로 야홍릉의 척추에 있는 혈위를 꾹 눌렀다. 손가락 끝에서 진기가 나오며 따뜻한 느낌이 온몸의 경맥을 타고 흘렀다.

따뜻함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느낌은 이상한 쾌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참을 수는 있지만 차가운 물에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은 썩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그래서 반 시진이 지난 뒤, 야홍릉은 한지에서 나왔다.

능묵도 따라 나와서는 직접 그녀의 몸을 닦아주고 또 밧줄에 걸린 하얀색 옷을 그녀에게 입혀 주었다. 그리고 그도 다른 하얀색 옷을 몸에 걸쳤다.

목욕을 마친 둘은 조용히 묵백이 사전에 얘기한 방으로 들어갔다.

방금 한지의 한기에 몸이 얼어붙어서인지 따뜻한 방에 들어서자 온몸의 모공이 활짝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공기 속을 떠도는 특수한 향기에 잠이 몰려왔다.

능묵이 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야홍릉은 짙은 피로감을 느끼며 목소리도 풀어졌다.

“능…….”

가냘픈 몸이 쓰러지려고 할 때 단단한 팔뚝이 그녀를 받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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