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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17)화 (118/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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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능묵은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등불에 비친 그의 옆모습은 정성 들여 그린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세상에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야홍릉의 시선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능묵이 보여준 행동은 너무 이상했다.

과묵하기만 했던 예전의 모습과는 아주 달랐다.

‘무슨 자극이라도 받은 건가?’

그는 오늘 자꾸만 충성심을 강조했다.

예전에도 충성을 표한 적이 있었지만 금방 그녀의 곁에 보내졌을 때, 어영위로서의 순수한 충성심을 보여줬을 때와 비교하면 오늘 한 말에는 색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전 흔쾌히 주인님의 노리개로 되고 싶습니다.’

‘전 주인님의 사람입니다. 누구도 물어갈 수 없습니다.’

야홍릉은 실눈을 뜨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능묵.”

“네, 주인님.”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는 이미 측부가 여섯 명 있다. 모두 황족 종책에 올린 사람들이지.”

궁에는 순찰하는 금위군이 있었지만 그들과 거리가 꽤 있는 데다가 야홍릉의 목소리가 크지 않아 그들이 들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 말을 들은 능묵은 잠깐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전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노리개가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느냐?”

야홍릉이 물었다.

그녀의 노리개가 된다는 것은 그녀의 수많은 측군이나 시군 중 일인이 된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명분이 없고 종책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신분 말이다.

게다가 여섯 명의 측군을 보면 예를 올려야 하고 수많은 측군들 사이에서 그녀의 관심을 얻으려고 끼를 부릴 수도 없었다. 물론 그의 성격을 보면 끼를 부릴 것 같지도 않았다.

노리개는 어영위와 달랐다.

어영위는 주인의 지시를 잘 듣고 주인이 시킨 일만 잘하면 되었다.

주인의 잠자리 시중은 들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리개는……

능묵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기다란 속눈썹에 그의 눈을 가리자 야홍릉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건양궁으로 걸어갔다.

건양궁에 곧 발을 들이게 될 때쯤, 능묵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은 그 측부들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뭐?’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안 좋아하는 줄은 어떻게 알았지?”

그녀의 여섯 측부는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특히 기루 출신의 감진은 소문난 미소년이었고, 한씨 가문의 서자 한경백은 온화하고 준수하며 아는 것이 많고 예의도 밝았다.

단백의, 단홍상도 흠잡을 데 없는 미소년이었다.

세상에서 이렇게 많은 미남을 측부로 들인 여인은 야홍릉을 제외하고 더 없을 것이다.

“……주인님께서는 그들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능묵은 눈을 내리깐 채, 한결같이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투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겉만 번지르르할 뿐입니다.”

‘실제로는 별 쓸데가 없지.’

야홍릉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능묵.”

“네, 주인님.”

“혹시 뭔가가 떠오른 것이냐?”

“주인님께 아룁니다, 아닙니다…….”

“무릎 꿇거라.”

능묵은 멍하니 있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릎을 털썩 꿇고 허리를 굽혔다. 야홍릉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공손한 자세였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주인님, 계편을 드릴까요?”

어영위의 규칙을 뼛속 깊이 새긴 그는 주인의 불쾌한 눈빛에 바로 무릎을 꿇고 벌 받을 준비를 했다. 주인이 입을 열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야홍릉은 평소 항상 그더러 툭하면 무릎을 꿇지 말라고 했다.

이는 그가 야홍릉의 곁에 온 뒤로 처음 명령을 받아 무릎을 꿇은 경우였다.

그전까지 야홍릉은 그더러 먼저 무릎을 꿇으라고 한 적이 없었다.

야홍릉은 허리를 굽힌 그의 공손한 자세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세운 규칙 중에 거짓말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다는 것을 모르더냐? 거짓말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이다.”

능묵은 그녀의 말을 듣자 흠칫 놀랐다.

기억이 되돌아오기 전부터 그는 주인이 겉보기엔 차갑지만 속마음은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도 그녀는 ‘잘못’이라고만 하지 ‘죄’라고 하지 않았다.

이 두 단어의 성질은 완전히 달랐다.

잘못은 작게 벌을 내리면 되었지만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능묵은 눈을 내리깔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전 주인님께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그는 잠깐 망설였다.

“저는 다만…….”

“다만 뭐?”

야홍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다만 영린이 ‘노리개’라고 말할 때, 그는 속으로 기쁘고 설레었다. 순간 그는 주인님의 노리개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인님이 거절하거나 그가 원하지 않는다고 여길까 걱정되었다.

야홍릉이 ‘저 인간이 하는 헛소리 듣지 마’라고 했을 때, 다급히 자신의 의견을 내비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능묵이 말을 하려고 했다.

“다만…”

“뭐 하시는 겁니까?”

검은색 장포를 입은 묵백이 건양궁에서 걸어 나오며 무릎을 꿇은 능묵을 보더니 놀란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능묵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백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폐하는 안에 계시냐?”

묵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거라.”

야홍릉은 평온한 어조로 이상한 기분을 누른 뒤, 앞으로 걸어갔다.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서서 야홍릉의 뒤를 따랐다.

묵백은 그의 곁으로 걸어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오?”

능묵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묵백은 입가를 실룩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뭔가 떠오른 것이오?”

능묵이 대답했다.

“아니.”

‘아니?’

묵백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생각에 잠긴 얼굴로 능묵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혹시…….”

그러나 능묵은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곧장 야홍릉의 뒤를 따라 건양궁으로 들어섰다.

“전 빨리 능묵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요.”

야홍릉은 대전으로 들어간 뒤, 앉아서 상주서를 보는 영린에게 직설적으로 말했다.

“뭘 해야 하는지 말씀하세요.”

‘이렇게 말투가 화끈할 수가…….’

“폐하께 얘기해도 소용없어요. 이런 얘기는 저한테 해야죠.”

묵백이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능묵의 기억을 회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폐하가 아닌 저입니다.”

야홍릉은 묵백을 힐끗 보더니 시선을 돌려 능묵을 바라보았다.

“긴장돼?”

능묵은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닙니다.”

그 말을 들은 야홍릉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기억을 되찾는다는 얘기만 나오면 능묵은 항상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오늘에는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기억을 빨리 되찾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할 것도 없고요. 궁전에서 머무르며 목욕을 하고 향을 피우는 것 외에 사흘간 금식하면 됩니다.”

묵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물론, 실행하면 그렇게 간단할 리 없었다.

그러나 다른 과정은 그들과 무관했다.

묵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참, 말하는 것을 깜박했네요.”

야홍릉은 그를 바라보았다.

“음…… 다음에 얘기할게요.”

묵백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신비하게 웃었다.

“신비감을 남겨두는 게 좋죠. 제가 두 분께 선물을 드리는 셈 치고요.”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신비로운 척하기는.”

“이건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묵백이 정정하고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은 지금 목욕하러 가실 건가요? 아니면 내일 아침에 시작할 건가요?”

‘두 분?’

야홍릉은 그제야 묵백의 말에서 중점을 잡아내고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목욕을 하고 향을 피워야 해?”

‘내가 기억을 되찾는 건 아니잖아?’

“남기로 하셨으니 친히 해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묵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들은 것은 거짓이고 직접 본 것만이 진실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직접 본 것만이 진실이라고?’

야홍릉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능묵이 잃어버린 기억 부분을 내가 볼 수 있기라도 하다는 건가?’

능묵을 바라본 야홍릉은 그가 시선을 내리깐 채,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불안한 듯한 얼굴이었다.

야홍릉은 잠깐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알아서 준비해.”

“만약 다른 문제가 없으시다면 지금 절 따라가시죠.”

말을 마친 묵백은 고개를 돌려 영린을 보더니 말했다.

“폐하께서는 계속 상주서를 읽으실 건가요?”

등불에 비친 소년의 준수한 얼굴에는 윤기가 흘렀다.

맑고 깨끗한 피부가 잘 다듬어진 옥 같았다.

묵백의 말을 들은 그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쳐들었다.

새카만 눈동자에는 안개가 드리운 것처럼 그늘이 비꼈다. 그의 목소리는 얇은 장막을 사이 두고 있는 것처럼 딱딱하고 진실 되지 않게 들렸다.

“먼저 가. 난 상관하지 말고.”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영린의 정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이 소년은 마음속에 너무나 많은 비밀을 담아두고 있었다. 항상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가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는 있었으나 그가 짊어진 마음의 짐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영린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씩 올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멍했던 표정은 사라졌고 그의 미소는 홀가분하기만 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공주 전하께서는 지금 저를 신경 쓰실 게 아니라 능묵의 일에 집중하셔야죠.”

야홍릉은 침묵했다. 그녀도 영린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그가 오늘 보여준 모습이 평소와 너무 달라 모른 척 넘어갈 수 없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말을 하자 야홍릉도 더 이상 뭐라고 하기 불편했다.

그녀는 말없이 돌아서서 묵백을 따라 건양궁을 나섰다.

영린은 들고 있던 상주서를 내려놓고 푹신한 털가죽이 펴진 의자에 몸을 기댔다. 눈을 비비는 그의 손가락은 하얗고 가늘었으나 창백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대전 밖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순찰하는 궁중 금위군을 제외하고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궁중을 누비는 궁녀들의 발걸음도 아주 가벼워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셋은 여러 궁을 지나 묵백이 머무는 태극궁(太極宮)에 도착했다.

대전 앞의 돌계단을 오른 그들은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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