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누구도 물어갈 수 없습니다
동제에는 이제 공주가 두 명이 되었다.
평양 공주는 황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영가 장공주보다 고귀하지 않았으나, 오늘 연회에서 사람들은 황제가 평양 공주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게다가 장공주와 평양 공주 모두 미혼이었다.
장공주는 성미가 온화하고 부드럽기에 그녀야말로 황제가 조서에 쓴, 총명하여 우아하며 성품이 훌륭하다는 찬사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새롭게 책봉된 공주는 차갑고 매정하며 채찍을 휘둘러 사람을 때리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사람을 죽일 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은 흉악한 사람인데다 공적인 장소에 노리개까지 데리고 나왔다.
이렇게 비교해 보니 황족 혈통의 장공주는 평양 공주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장공주는 평양 공주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렇게 연회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 * *
사람들이 연회를 마치고 흩어질 때, 영가는 태후의 인수궁에 가 있었다.
태후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으니 딸로서 어머니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고 얘기를 나눠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인수궁에 발을 들일 때부터 태후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 궁녀가 태후를 둘러싼 채,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무릎을 꿇거나 서서 태후의 어깨를 주무르랴, 등을 두드리랴, 바삐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태후는 여전히 화난 표정을 풀지 않아 인수궁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영가는 다가가 태후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생긋 웃으며 물었다.
“어마마마, 왜 장희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오시지 않으셨어요?”
태후는 시선을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보더니 물었다.
“연회는 끝났느냐?”
“곧 끝날 것 같아요.”
영가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궁녀가 건네주는 차를 받아 들었다.
“누가 우리 어마마마의 심기를 건드렸을까요?”
“누구긴 누구겠느냐?”
태후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새로 책봉한 평양 공주인가 하는 것 때문이지.”
영가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미 만나 보셨어요?”
“안 만나느니만 못했구나. 예의 없고 규칙도 모르는 한심한 여자애였어. 폐하께서 그 아이에게 받아낼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다면 내가 진작 궁의 예법을 손수 가르쳐 줬을 텐데.”
태후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폐하께서 받아낼 게 있다고요?”
영가는 깜짝 놀랐다.
“그게 뭔데요?”
태후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아직도 아까의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했다.
“모르겠다. 폐하께서도 말하지 않았단다.”
영가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에게 폐하가 필요한 것이 있다고? 폐하가 어마마마를 달래느라 둘러댄 핑계인가? 아니면 정말 능야에게 폐하가 필요한 물건이 있을까?’
“네 외삼촌도 오랫동안 궁에 들어오지 않았더구나. 많이 바쁘다고 하느냐?”
태후는 고개를 돌려 영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외삼촌은…….”
영가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제 다치셔서 지금 누워 계세요.”
“뭐라고?”
태후는 안색이 확 변하더니 벌떡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다쳤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외삼촌이 조기헌, 후소우와 함께 평양 공주를 모욕했다가 공주부의 사람에게 맞았나 봐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태후는 버럭 화를 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영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마마마, 노여움을 푸세요.”
“노여움을 풀라고?”
태후가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영가야, 외삼촌이 다쳐서 누워 있는데 넌 모른 척할 거야?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계집애가 공주로 되어 적공주인 너와 같은 영광을 누리는데도 화가 나지 않냐고?”
영가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차를 마시며 담담하게 말했다.
“어마마마, 뭔가를 잊으신 것 같네요.”
태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뭘?”
“이 세상은 폐하의 세상이라는 사실 말이에요.”
영가는 시선을 들고 태후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폐하께서 그녀를 공주로 책봉했으니 이 일은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 수 없을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고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폐하는 아무나 주무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말은 들은 태후는 어두워진 안색으로 말했다.
“난 황상의 어미야.”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영가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어마마마, 폐하께서 요즘 우리와 많이 멀어진 것 같지 않으세요?”
그 말을 들은 태후는 흠칫 놀라더니 침묵에 잠겼다.
그녀 또한 최근 몇 달간 황제가 갑자기 멀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폐하께 말 못 할 사정이 생기셨나 봐요. 이 평양 공주는…… 제가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했는데 딱히 알아낸 것은 없어요. 하지만 그녀가 동제에 오기 전까지 폐하께서 만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인 것은 확실해요.”
영가가 말했다.
태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폐하는 왜 갑자기 그녀를 공주로 세운 거지?”
“저도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정말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녀에게 꼭 받아낼 것이 있을 수도 있고요.”
영가는 고개를 저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황제와 평양 공주만 알 것이다.
“어마마마, 깊이 생각하지 마시고 편히 지내세요. 가끔 고양이랑 노시고 심심하면 연극도 보시고요. 더 이상 그녀를 찾아가지 마세요.”
영가가 말했다.
“지금은 움직이지 않는 게 상책이에요. 굳이 이런 일로 모자 사이가 멀어질 필요가 있나요?”
태후는 여전히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럼 네 외삼촌의 상처는…….”
“그건 외삼촌이 자초한 거였어요.”
담담한 영가의 말투에서는 위녕에 대한 동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폐하의 말씀으로는 사내 셋이서 여인 한 명을 괴롭히러 찾아갔다가 실력이 안 되어 얻어맞은 거래요. 창피한 일이니 앞으로 이 일을 교훈으로 삼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태후는 미간을 찌푸리고 언짢은 얼굴로 영가를 바라보았다.
“너도 왜 그 계집애 편을 드는 거야? 위녕은 네 외삼촌이야.”
영가가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그녀의 편을 드는 게 아니라…….”
태후는 영가의 말을 끊었다.
“됐어, 모른 척하마. 그럼 되겠느냐?”
태후는 다시 탑에 기대앉았다.
예쁘게 화장한 그녀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위녕의 상처는 심각하더냐?”
“죽을 정도는 아니에요.”
간결한 한 마디였다. 여기서 외삼촌에 대한 걱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낯선 사람의 얘기를 하듯 싸늘함만 감돌 뿐이었다. 태후는 또 미간을 찌푸렸다.
“말 좀 예쁘게 하면 안 되겠느냐? 원수가 아니라 네 외삼촌이란 말이다.”
영가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다른 화법으로 말했다.
“생명의 위험도 없고 후유증도 남지 않을 거예요. 한동안 푹 쉬면서 요양하면 깨끗이 낫는대요. 이러면 되죠?”
태후는 영가 때문에 화가 나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너도 이제는 어리지 않은데 혼사를 생각해야지. 노처녀가 되어서 후회하지 말고.”
영가는 눈을 내리깔고 한참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전 혼인하기 싫어요.”
‘혼인하기 싫다고?’
태후는 깜짝 놀랐다.
“여인이 혼인을 안 하면 어떻게 하려는 게냐? 넌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영가는 말없이 찻잔을 내려놓더니 일어서서 말했다.
“시간이 늦었네요. 어마마마도 일찍 쉬세요. 전 이만 가볼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태후가 뭐라고 하기 전에 다급히 대전 밖으로 걸어갔다.
* * *
달이 휘영청 걸린 밤이었다.
영가는 궁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뒤에서는 여덟 명의 시녀가 그녀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뒤따르고 있었다.
먼 곳에서 보니 밝은 등불이 화려한 인수궁을 비추고 있었다.
영가의 눈빛이 일렁거렸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혼인하라고? 혼인을 왜 해?’
그녀의 입꼬리에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혼자 살면 이렇게 자유롭고 좋은데 왜 굳이 날 속박할 사람을 찾아야 하는 건데?’
산해진미에 비단옷, 보석과 값비싼 장신구, 부족한 것이 없었다.
게다가 공주부에는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하인들도 많았다.
주변의 수많은 세가 공자들이 그녀를 떠받들며 구애하기 바쁜데 왜 굳이 시집을 가야 한다는 말인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혼인해 평생 받들어 모셔야 한다고?’
영가는 입을 삐죽였다.
‘됐어, 난 매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살고 싶지 않아. 내가 연모하는 사람은 영원히 나와 혼인하지도 않을 텐데. 그럴 바에는 평생 혼자 사는 게 낫지.’
* * *
연회가 끝나자 야홍릉과 능묵은 궁에 남아 있었다.
영묘언이 야홍릉에게 물었다.
“언니, 공주부로 안 돌아가세요?”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틀간 궁에 머무를 겁니다. 폐하와 묵백 대인과 나눌 얘기가 있거든요.”
영묘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가 문득 요 며칠 봉회근을 보지 못한 것이 떠올라 물었다.
“오라버니는 언제 떠난다고 하던가요?”
영묘언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물어보지 않았어요.”
“돌아가서 물어보세요. 급한 일이 없다면 며칠 기다려 달라고 해요. 제가 폐하와 얘기를 마치면 같이 갈 거라고 전해주고요.”
야홍릉이 말했다.
영묘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동제를 떠나시려고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할 일이 있거든요.”
영묘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언니의 말을 전할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야홍릉의 옆에 서 있는 능묵을 힐끔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능묵 공자가 너무 잘생겨서 오늘 밤 노리는 사람도 있었어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회에서 능묵 공자를 바라보는 소저들의 시선이 아주 이글거렸어요. 며칠 동안 굶은 늑대 같았다니까요…….”
영묘언은 말을 하며 입가를 실룩거렸다.
“언니, 호위무사를 잘 지켜요. 암컷 늑대에게 빼앗기지 않도록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상한 눈빛으로 영묘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소녀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했다.
‘암컷 늑대? 비유도 참…….’
“전 이만 갈게요.”
영묘언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저도 모르게 능묵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능묵 공자는 정말 잘생겼어요. 이런 얼굴을 보니 저도 설레잖아요. 정말 집에 데려가서 꽁꽁 숨겨 두고 싶어요.”
그녀는 자신이 얼굴만 보고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는 능야가 남장한 여인인 줄도 모르고 능야를 좋아했다.
그러다 능야가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는 바로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바람둥이가 아닐까?’
영묘언은 속으로 자신을 한껏 꾸짖고 야홍릉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궁문 방향으로 걸어갔다.
야홍릉은 떠나가는 영묘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능묵에 돌렸다. 그녀는 능묵의 얼굴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암컷 늑대가 널 물어가지 않게 잘 지켜.”
말을 마친 그녀는 돌아서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능묵은 눈을 내리깐 채,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의 준수한 얼굴은 수묵화처럼 아름다웠다.
“전 주인님의 사람입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충성을 표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잣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구도 물어갈 수 없습니다.”